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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퀴어퍼레이드

스톤월 항쟁과 자긍심 행진의 정신

by 행성인 2015. 6. 10.

호림(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자긍심 행진에 참여해 본 성소수자들은 누구나 각별한 첫 행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처음 행진하던 날, 광장에서 거리로 첫발을 떼던 순간의 떨림, 함께 걷던 사람들의 벅찬 표정, 거리에 크게 울리던 음악소리,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던 순간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임을 한껏 드러내며, 행렬을 함께 하는 수많은 성소수자들,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낮의 도심 거리를 걷는 순간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성소수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종교를 제 명분 삼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를 선동하는 이들이 활개 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자긍심 행진은 즐거운 축제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자긍심 행진은 ‘스톤월 항쟁’이라는 성소수자들의 투쟁의 결과물이자,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맞선 투쟁의 중요한 장이기 때문이다.

  스톤월 항쟁은 1969년 6월 28일, 미국 뉴욕의 게이 술집이었던 스톤월인(Stonewall Inn)을 단속하는 경찰에 맞서 성소수자들이 집단적으로 항거한 날이다. 당시 미국의 게이업소들은 마피아가 소유한 곳이 많아 손님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경찰의 단속과 이를 빌미로 한 괴롭힘이 빈번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내며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69년 6월 28일 새벽, 경찰은 여느 때처럼 스톤월인을 단속, 손님들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체포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스톤월인 주변의 군중들이 경찰에 항의와 야유를 퍼부으며 동전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항쟁이 시작되었다. 200여명의 군중은 2000여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밤새 경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7월 초까지 스톤월인 주변 크리스토퍼가에서 산발적인 항쟁이 지속되었고, 거리엔 ‘게이 파워’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스톤월 항쟁은 성소수자 운동의 거대한 전환점이 된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성소수자의 모습을 강조하며, 청원이나 로비를 통해 성소수자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던 기존의 호모필 운동(homophile movement)은 스톤월 이후, 더 이상 충분치 않은 것이 되었다. 스톤월을 경험한 새로운 세대의 운동가들은 흑인 민권 운동의 슬로건을 차용한 ‘게이권력(Gay Power)’, ‘게이는 좋은 것이다(Gay is Good)’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성소수자로서의 자긍심을 강조했다. 스톤월 이후 나타난 게이 해방 전선(Gay Liberation Front)과 다양한 조직들은 성소수자 대중의 직접 행동과 연대를 통한 기존 사회 질서와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해 나간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과 여성 해방운동, 반전운동 등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스톤월 항쟁’을 통해 성소수자 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자긍심 행진도 스톤월 항쟁의 주요한 성과 중 하나다. 스톤월 이전에도 성소수자들의 행진은 있었다. ‘Annual Reminders’라는 이름으로 1965년에서 69년까지 매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 앞에서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피켓팅이 있었다. 소수의 운동가만으로 구성된 참가자들은 성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고용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성는 자켓과 타이를, 여성은 드레스를 입고 피켓팅에 나섰다. 하지만 스톤월 이후, 이러한 방식의 시위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스톤월 항쟁 이후 열린 호모필 단체 동부 지역 컨퍼런스(Eastern Regional Conference of Homophile Organizations; ERCHO)에 모인 운동가들은 기존의 ‘Annual Reminders’의 날짜와 장소를 옮겨 현재의 자긍심 행진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거리 해방의 날(Christopher Street Liberation Day)’을 개최하기로 결의한다.


“Annual Reminder가 보다 의미 있고,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미치며, 우리가 참여하는 - 우리의 근본적인 인권에 대한 - 더 광범위한 투쟁의 아이디어와 이상을 아우르기 위해 날짜와 장소를 옮긴다.
우리는 1969년 크리스토퍼 거리의 즉흥적 시위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6월의 마지막 토요일 시위를 개최하고, 이 시위를 “크리스토퍼 거리 해방의 날”로 명명할 것을 결의한다. 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어떠한 복장이나 연령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전국의 호모필 단체에 연락하고 그들이 그날 유사한 시위를 개최할 것을 제안할 것을 결의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전국적인 지지를 표출할 것을 결의한다.”

- 1969년, ERCHO의 결의문


  1970년 6월 28일, ‘게이 해방 행진(Gay Liberation March)’ 혹은 ‘게이 자유 행진(Gay Freedom March)’라는 이름을 단 행사가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곧 미국 전역으로, 서유럽과 호주 등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6월 경 개최되는 현재의 자긍심 행진의 원형이 된다.


  1980년대, 급진적 운동가들의 힘이 약화되며, 행진의 이름은 ‘게이 해방 행진’에서 ‘자긍심 행진(Gay Pride Parade; LGBT Pride Parade)’으로 변화한다. 미국 등 서구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면서, 자긍심 행진에 정치인과 기업들이 참여하기 시작하자 행진이 정치적 의미를 잃고 상업화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호주 시드니의 마디그라나 미국 주요 도시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지역의 주요 행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긍심 행진인 ‘퀴어 퍼레이드’는 그 개최를 위한 과정에서부터 여전히 한국 성소수자들의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퀴어 퍼레이드의 개최를 저지하고자 하는 차별 선동 세력의 방해와 경찰의 행진금지 통고 때문이다. 퀴어 퍼레이드의 집회 신고를 방해하려는 이들과 중립을 가장하며 사실상 그들의 편에 선 경찰 때문에 퀴어 퍼레이드를 지키려는 많은 이들은 8일 밤낮을 남대문 경찰서 앞에서 노숙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경찰은 교통을 방해할 우려가 있고, 어떻게든 행진를 저지하고자 하는 이들의 방해목적 행사와 충돌이 예상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퀴어퍼레이드에 대한 집회신고를 불허했다. 퀴어문화축제는 6월 9일 개막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자긍심 행진, 퀴어퍼레이드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열성적 안티는 열광적 팬에 다름없다는 말이 맞나보다. 퀴어퍼레이드를 방해하려는 이들 덕에(?) 한국의 성소수자들은 올해의 퀴어퍼레이드를 스톤월 항쟁이 일어난 6월 28일, 시청 광장에서 맞이하게 되었다(*퀴어퍼레이드는 6월 13일 대학로에서 개최된 예정이었으나, 반대세력의 집회신고 방해로 인해 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6월 28일 시청광장으로 퀴어퍼레이드의 날짜와 장소를 변경한 바 있다.). 어느 해 보다 거센 방해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 성소수자들의 자긍심 행진, 퀴어퍼레이드는 열릴 것이고, 누군가는 올해 잊을 수 없는 첫 행진의 해방감을 맛볼 것이다. 45년 전, 성소수자에 대한 부당한 억압에 저항하며 거리로 나선 이들이 내딛은 첫 발걸음을 기억하며, 더 많은 이들과 즐거운 투쟁의 장에 함께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