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롱(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장정일, <중국에서 온 편지>, (1999)

 

 

<들어보십시오. 나는 부소입니다.> 이 짧은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화자의 이러한 자기 선언과 고백은 잊을 만하면 이야기 사이를 비집고 다시 나타난다. 이는 혼란스러운 화자의 상황에서 정체성 사이로 자신을 붙잡으려는 허망한 시도이며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고백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부소라는 이 고백마저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도 아니고 평전도 아니고 역사는 더욱 아닐> 이야기를 엮는 단어와 장치들은 절대 그 시대의 것이 아니다. 결국 부소라고 주장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의 진실성이 모호한 중얼거림으로 변한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떠돈 진나라 태자의 유령일 수도 있지만 사마천의 사기에 심취한 정신나간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야기를 읽도록 이끄는 것은 픽션에 대한 믿음이 아닌 그의 혼란스러운 서술 자체였다. 이야기는 부소와 부소가 아닌 것, 낮과 밤, 만리장성의 안과 밖,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흐리며 나아간다.

 

 

부소는 진나라의 첫 황제이자 유일한 황제였던 진시황의 장남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간략하게 실린 바에 따르면 그는 분서갱유 당시 유학을 옹호하다 변방으로 쫓겨났으며 진시황 사후, 음모에 휘말려 자결했다. 작중에서 진시황은 부소에게 북쪽 변방으로 가 몽염 장군을 감독하도록 명한다. 이 대목에서 부소는 그 순간 자신의 눈이 멀어버렸다고 말한다. 세상이 한순간에 어둠으로 덮이는 것이 아니라 몇 겹의 비단으로 싸인 것처럼 흐려지며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닌 이 변화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아침과 낮으로 대변되는 만리장성 안의 태자가 어둡고 추운 만리장성 밖의 변방으로 유배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하고 만다.

 

 

몽염 장군은 만리장성의 건축을 감독한 인물이다. 황제의 수도인 함양을 보호하고자 만리장성을 증축하고 백성들의 원망과 황제의 신임을 받던 장군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 경계를 지키라는 명을 받는다. 부소는 이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몽염을 경계한 황제가 황태자인 부소 자신을 쫓아내듯이 유배 보낸 것이라 주장한다.

우여곡절 끝에 북쪽 변방에 도착한 눈먼 태자는 몽염의 지극한 간호 속에서 약간이나마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데, 마침 회복된 그의 시력이 맞이한 것은 은은한 달빛이다. 만리장성의 안과 밖, 화려한 수도와 춥고 거친 변방, 태양과 달, 부소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대조와 맞물린다. 만리장성의 밖에서 이제는 태양이 아닌 달을 마주하며 부소는 다시 말한다. 나는 부소입니다.

 

 

부소는 말한다. 몽염과 자신, 둘 다 진시황의 두려움에 의해 거세된 존재들이라고. 황제를 위해 장성을 쌓았지만 군대와 함께 쫓겨난 몽염과 장차 이세황제가 될 것이 분명해보이나 진시황이 자신의 불안 밖으로 쫓아낸 부소’. 중국인도, 변방인도 될 수 없는 부소와 몽염. 부소는 낮이면 군주론을 썼고 밤이면 황금의 가지를 썼다고 말한다. 낮에는 진시황과 같은 절대군주의 권력을 꿈꾸고 밤에는 그와 같은 권력승계의 과정을 끔찍하다며 경멸한다. 북쪽 변방의 낮밤 속에서 부소의 정체성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불사약을 구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진시황처럼 부소는 자신 역시 불사약을 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떤 약을 먹고 양성의 존재가 되었다고 말한다. 약이 문제였는지 변방의 어둠이 문제였는지는 부소 자신도 알 수 없다. 부소는 자신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야기 속의 부소가 정말로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양성의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화자 역시 부소이거나 부소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독자에게 불사약을 먹고 양성을 갖게 된 부소가 진실을 말하는지는 알려줄 수 없다. 다만 그는 자신이 양성 모두를 가진 사람이 되어 몽염과 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비단이 겹겹이 둘러싼 세계를 빠져나와 달밤에 눈을 뜬 부소는 이미 경계가 없는 사람, 경계가 있더라도 그 앞에서 경계가 의미를 잃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소와 몽염, 두 사람 모두 수도인 함양에서 쫓겨난 사람들인 동시에 수도에 매혹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양성(兩性)을 깨달은 부소는 자신과 같이 쫓겨난 사람, 함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나 돌아갈 수 없는 몽염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들을 변방의 연인이라 칭하는 부소에게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부소는 수도에서 쫓겨난 후의 이야기에서 줄곧 아버지인 황제를 욕하고 헐뜯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이좋은 부자를 부러워하고 그들의 비밀을 알기를 갈망한다. 몽염과 사랑에 빠지며 그는 이제야 다정한 부자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동성애가 부족한 부성애나 모성애에서 발생한다는 식의 작가가 가진 왜곡된 인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양성을 갖게되며 몽염을 사랑하는 부소가 주로 여성으로 묘사된다는 점 역시 작가의 이성애 중심적 사고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부소가 몽염이 있는 변방에 도착하기 전 몽염은 꿈인 듯 꿈같지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여인이 나타나 그를 꾸짖고 몽염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읊어준 후 그를 밤으로 데려가고자 한 꿈이었다. 후에, 사기의 기록과는 다르게도 부소가 자객의 칼에 죽었다 다시 살아나고 몽염이 감옥에서 자결한 뒤 부소는 몽염을 찾아간다. 이 장면에서 부소는 여자로 묘사되는데 그 역시 몽염을 데리고 밤으로 떠나고자 한다. 밤 속에서 부소가 시력을 찾은 뒤로, 주변부의 어두움으로 묘사되는 추운 변방에서야 연인들은 함께할 수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몽염은 <해를 보고 취한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장성 안의 세력에 의해 자결한 몽염은 태양 속에서 굳어지고 부소의 유령(혹은 부소의 유령이 아닌 유령)은 어둠 속을 떠돌며 독백처럼 떠들 뿐이다. 연인들은 죽고 제국은 멸망한다. 옛날 이야기는 보통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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