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처음에 '퀴어락'을 방문하기로 생각했을 때 퀴어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역사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퀴어락'을 방문했을 때 더더욱 긴장을 했던 것 같다. 학술적이고 유달리 딱딱한 공간은 아닐까 이런 걱정을 하면서 '퀴어락'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런 내 걱정은 사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열려있는 공간이었으며 '퀴어락'은 다른 단체들과 함께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었고, 서지류나 영상류도 보기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결 아늑하게 다가오는 공간에서 우리는 편안히 앉아 '퀴어 아카이브 퀴어락'에서 근무하는 루인님과 대화를 나눴다.
<사무실 출입구 앞에는 이런 스티커들이 예쁘게 붙어있다>
'퀴어락'에서 "락"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퀴어 아카이브를 영어로 쓰면 Queer Archive잖아요. 그래서 arch까지 끊어서 queerarch을 발음 그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고요. ‘락’은 한자로 “즐거울 락(樂)”을 쓰는데, “퀴어의 즐거움이 되는 아카이브가 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 혼자는 즐겁게 자료를 모으자는 의미로 쓰기도 하고요.
커뮤니티에 아카이빙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음… 아카이빙의 의미는 아카이브 자체에 대한 의미와 같이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카이브 자체는 매우 오래된 작업이잖아요. 중세시대에도 있었고, 현대에도 국가기록원처럼 존재하고요. 아카이브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건 그것이 왜 필요했느냐란 질문을 포함하는데, 관련 문헌을 보면 아카이브는 권력자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 같더라고요. 새로운 왕조나 왕국이 만들어지면 권력을 잡은 자는 자신의 정통성과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만들었다고 하고요. 그래서 아카이브는 일정의 권력을 보증하는 기관으로 존재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아카이브는 오직 최고 권력자인 왕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고도 하더라고요.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왕조의 역사와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제작한 게 조선왕조실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아카이브는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양의 아카이브기도 하죠. 현대에 들어서면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의미로 아카이브가 존재하지는 않는 거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 한 국가의 정통성이나 존엄 같은 것을 입증하려는 의미에서 기록원이 존재하는 것 같고요. 그런데 이것은 주로 기록관리학에서 하는 논의고요.
퀴어 아카이브로 논의를 집중하면, 사실 다들 아시겠지만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하는 말인데 퀴어 역사는 기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잖아요.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고 지금도 주류 역사에선 기록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고, 때론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요. 그렇다고 기록이 없는 시대에 존재가 없었느냐면 그렇지는 않지요. 1970~80년대 명동, 종로, 이태원 등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살아계신 분들에게 그 당시 역사를 여쭤보면,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면서도 엄청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따로 기록할 가치가 있는 역사로는 인식이 잘 안 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그때 활동하셨던 분들이 자서전을 써주시면 정말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정말 멋질 거 같고요.
LGBT/퀴어 당사자로 불리는 집단이나 퀴어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퀴어 역사는 여전히 큰 공백으로 남아 있죠. 물론 몇 년 전부터 몇몇 사람들이 한국 퀴어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긴 한데, 여전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고요. 그래서 아직도 한국 LGBT/퀴어의 역사가 1990년대 초반 즈음 시작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물론 인권 운동의 역사는 그럴 수도 있지만요. 그 전에 LGBT/퀴어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정확히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알려지지 않은 측면도 있고, 자료가 충분하지도 않아서, 혹은 수집된 자료나 정보의 양이 충분하지 않은 편이죠. 그러다보니 뭔가 체계적으로 조직된, 어떤 흐름으로 LGBT/퀴어가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 논쟁할 수 있게 정리된 형태의 역사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몇 년 전 일이지만 어느 목사는 방송에서 “한국은 동성애 청정국”이었다와 같은 헛소리가 가능하다고 고민해요. 1990년대 미국문화가 본격 들어오면서 동성애가 퍼졌다와 같은 헛소리도 가능한 거고요. 물론 많은 사람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화를 내고 또 열심히 반박하잖아요.
이런 반박은 분명 중요한 작업이라고 고민해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런 반박이 1990년대 시작한 LGBT/퀴어 인권 운동사와 1980년대부터 어떤 퀴어 공간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삶과 역사, 1970년대 퀴어의 삶과 역사를, 물론 이렇게 10년 주기로 역사를 구분할 순 없지만, 잘 연결해주진 않잖아요. 그냥 1970년대 비이성애자 여성이며 택시를 운전했던 '여운회'가 있었다 정도인 거죠. 마치 에피소드처럼, 단절된 사건처럼 회자되고 인식되는 거죠.
다른 한편, 퀴어 정치학도 그렇고 페미니즘도 그렇고 누군가가 이와 관련한 차별이나 부당함을 깨닫는 순간, 마치 내가 그것을 처음 깨달은 것처럼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는 마치 내가 그 이슈를 처음 제기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죠. 몇 년 전에도 트위터의 어떤 분이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한 모임이 전혀 없다고 자신이 그 모임을 만들겠다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셨고요. 분명 역사적으로 존재했지만, 바로 몇 년 전에 존재했거나 당장 다른 곳에서 존재하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역사적으로 충분히 정리되거나 기록물로 조직된 것이 없다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싶기도 해요. 아울러 분명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임에도 계속 마치 처음 일어나는 사건처럼 생각하기 쉽고요. 정확하게 이런 분위기에서 아카이브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고민해요.
지금 '퀴어락'에 대략 6,200여 건의 기록물이 있는데요. 사실 턱없이 부족하지만 퀴어와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축적된 자료가 이 정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고민해요. 그 자료 중엔 1993~4년에 짧게 활동했던 '초동회' 자료도 있고, 1990년대 중후반에 활동한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 자료도 있고요. 이런 기록물을 살펴보면 당시 어떤 목적으로 협의회를 만들었는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거죠. 예를 들어, ‘1990년대에 어떤 일이 있었다 카더라’라고 알고 있는 것과 그때 무슨 논의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그 당시 생산한 문서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죠. 퀴어의 역사, 퀴어의 삶을 실체 없는 신화가 아니라 구체적 사건으로 입증하니까요. 이와 관련해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요. 1991년에 주한외국인이 모여서 '사포'란 모임을 만들었어요. 단체에 활동했던 분들이 이후 단체의 존재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니 '사포'란 모임은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모임을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발행하는 영자신문에 광고를 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작년에 그 광고를 찾는 작업을 했는데 발굴 작업이 부족했는지 아직은 못 찾았어요. 분명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을 잊지 않고 회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시 만들었다는 광고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여기저기에 보여줄 수 있다면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죠. 정확하게 어떤 문구로 사람을 모았는지를 알 수 있고 모임의 또 다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사포'의 광고를 찾는 작업은 계속될 거고요.
<'퀴어락' 사무실은 다른 단체들과 함께 쓰고 있다>
또 다른 면에서 '레인보우보트'가 올해 발족해서 활동을 했는데요. 유권자 운동이나 정치에 개입하는 작업은 1990년대부터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게 질문지를 보내고 답변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얼추 20년 가까이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죠. 이런 기록은 '레인보우보트'의 활동에 역사성을 부여한다고 고민해요. 이렇게 역사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요즘 들어 퀴어가 갑자기 시끄럽게 튀어나와서 떠든다’와 같은 식의 헛소리를 반박하죠. 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기록물을 통해서요. 아직 등록은 안 되었지만 1990년대 초중반 '끼리끼리'의 자료를 보면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겠다는 문서가 있어요. 사실 그 문서를 보면 요즘의 사업 기획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충격이기도 한데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정말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은 삶의 역사, 존재의 역사를 결코 함부로 폄하할 수 없게 하고 존재와 삶에 역사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퀴어 아카이브가 있다는 건, 퀴어가 어떤 형태로건 존엄이 있는 존재라고 알린다고 고민해요. 기록관리학에서 주장하는 아카이브의 역할을 퀴어 맥락에서 다시 하고 있는 거죠. 여기서 오해하면 곤란한 건 퀴어가 초역사적 존재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거고요. 예를 들어 누군가는 신라시대에 누가 있었고 화랑이 있었고 이런 식으로 LGBT/퀴어의 역사를 말하고 이를 통해 LGBT/퀴어가 초역사적 존재로 잘못 독해되기도 해요. 그렇다기보다는 퀴어의 삶이 단편적으로, 단발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길게 삶을 구축해왔고 논의를 해왔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며 싸우기도 했고, 그래서 결코 단일하지 않은 삶을 구축했고 단편적 모습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란 점을 아카이브가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퀴어 아카이브에 그 구체적 기록물이 있으니까요.
퀴어 아카이브는 지난 과거의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사건을 기록하는 역할도 하는데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니까요. 누구나 현재 일어나는 사건, 최근 만든 자료는 흔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런 자료는 1년만 지나도 찾기 어려울 때가 많죠. 예를 들어 2014년에 진행되었던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과 관련해서 '퀴어락'엔 600건 가량의 자료가 있어요. 물론 별도의 기획단이 '무지개농성단'과 관련해서 백서를 만들긴 했고 그래서 하나의 자료집으로 관련 기록이 잘 정리되어 있지만 서울시에서 공개했던 회의록은 포함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원래 서울시가 헌장 제정 관련 논의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면서 회의록을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회의록이 공개되고 몇 달 지나자 하나씩 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분명 예전엔 공개한 회의록인데 몇 달 지나 다시 확인했더니 찾을 수 없는거죠. 그걸 거의 다 '퀴어락'이 가지고 있죠. 당시 기준으로 현재 사건이지만 제때 자료를 수집해서 관리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자료는 사라지고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사건이 되기도 하죠. 그래서 '퀴어락'은 현재 생산되는 자료를 모두 수집하여 기록물로 등록함으로써 현재의 퀴어 역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쓴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한편으로는 A가 주장하는 역사가 있고, B가 쓸 수 있는 역사가 있고, C가 논하는 역사가 있는데요. 역사를 써나갈 때 아카이브가 구축한 역사가 중요하다고 고민하는 건 지금 회고하는 역사와 당시 생산된 기록물의 역사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를 테면 '끼리끼리'가 1990년대 초반 단체의 영문명을 만들 때 “Lesbian & Bisexual Association of Korea”라고 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바이섹슈얼은 정치화하기 어렵다,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과 '끼리끼리'의 기록물은 다른 이야기를 하죠. 물론 '끼리끼리'에서 정확하게 어떤 의미에서 단체명을 한때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더 연구를 해야 하지만요.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을 할 수 있겠죠.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왜 어떤 사건이나 존재는 지워지는가? 이런 측면에서 아카이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아카이브에서 자료를 수집할 때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고민해요. 어떤 자료를 모을 것인가, 어떤 자료를 더 열심히 살피고 수집할 것인가와 같은 점에 있어, 자칫 잘못하면 동성애 중심으로만 자료를 수집하기 쉬운 거죠. 그래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곳이 아카이브예요.
<사무실에는 트랜스젠더 깃발이라던지, 무지개 등이 걸려 있었다>
겨울: 초역사성에 대해서 조금만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초역사성의 뜻이라던지요.
이를테면, LGBT/퀴어는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며 원래부터 LGBT/퀴어가 있었던 존재로 말하는 방식이죠. 시대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동성간의 성행위나 복장을 이원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입는 것과 같은 행위의 의미가 다 다르고, 각 행위를 범주화하는 방식, 각 범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초역사적 존재로 사유하는 태도는 그 존재가 등장한 시기의 의미를 무시하고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거죠. 예를 들어 그리스시대의 남성 동성간의 성행위와 지금의 게이를 동일시한다거나, 신라 화랑을 현대 동성애 정체성의 역사적 순간으로 이해하는 식으로요. 초역사적 범주로 LGBT/퀴어를 이해하면 각 범주가 각 시대에 어떤 의미였는지 말하지 않기 시작하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거나요. 하지만 1980년대 동성 간의 연애를 했던 사람과 1990년대, 2000년대 동성 간의 연애를 했던 사람의 행위는 그 의미가 다 다른데 그것을 같다고 묶을 수는 없죠. 그걸 지우기 시작하면 LGBT/퀴어란 존재가 매우 단순해지고요. 예를 들여, 현재 의료적 조치를 원하는 트랜스젠더라고 이야기를 하면, 대중의 이미지에서 어릴 때부터 괴로워했고 부모님과 불화를 겪었고 학교 생활이 힘들었고 성인이 되어 수술비를 마련하고 수술을 했다는 어떤 관념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다른 트랜스젠더퀴어를 만나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도 전에, “쟤 트랜스젠더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파악했다는 착각을 야기하죠. 그래서 더 이상 알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하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다고 자만하죠. 비슷하게 신라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LGBT/퀴어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순간 이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죠. 초역사적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역사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1980년대엔 성을 전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였고, 지금과는 어떤 다른 의미로 살아갔는지를 알아가는 작업이죠. 동시에 그런 시대적 맥락의 차이를 이해하면서 어떤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고요.
단체 설립준비나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퀴어락' 설립엔 두 가지 공식 기록이 있는데요. 일단 설립을 위한 공식 논의는 2009년에 시작했어요. 정확히는 2008년 12월에 '아름다운재단' 프로젝트 지원서를 냈지만 2009년에 본격적으로 설립 논의를 했고 단체를 만들었죠. 그런데 '퀴어락' 공식 연대기에 따르면 잡지 <버디>를 만들면서 자료 수집 작업도 같이 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것은 '퀴어락'의 역사를 길어보이게 만드는 작업은 아니고요. 아카이브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시간과 역사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라서 그래요. 자료가 일정 정도 축적되어야 하고, 사건의 역사도 어느 정도 축적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기록도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을 때 퀴어 아카이브를 만들 수 있어요. 퀴어락에서 일하다가 어느날 문득 깨달은 거죠.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트랜스젠더퀴어 이슈에 별 관심이 없다가 어느날 갑자기 “오늘부터 트랜스젠더퀴어 아카이브를 만들겠어”라고 결정하곤 바로 아카이브를 설립할 수는 없어요.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선 자료가 축적되어 있어야 하는데, 자료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것은 아카이브야"라고 주장할 수는 없으니까요.
한국에서 LGBT/퀴어 인권운동사를 중심으로 했을 때, 물론 이것은 더 많이 재검토해야 하지만, 어쨌거나 1990년대 초반부터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운동이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자료가 생성되었죠. 그리고 누군가가 그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고 기록물로 정리하고 한 곳에 모아둬서 축적하는 작업을 했다면 그때 비로소 아카이브가 성립될 수 있겠더라고요. 공식 연대기상으로는 1998년 잡지 <버디>를 만들면서 아카이브를 시작했다지만 사실 그 전부터 한채윤 님이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죠(참고: 한채윤님은 잡지 <버디>를 만드는데 함께 했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함께 했고, '퀴어락'을 만드는데 함께 했음). [버디]가 종간한 이후엔 2003년부터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센터 사업의 하나로 퀴어 자료 수집을 했었고요. 그렇게 자료를 수집하다가, 2005년엔 '레즈비언미술아카이브'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죠. 그렇게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그냥 수집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는 단계가 2008년이었던 거 같아요. 그해 겨울 '아름다운 재단'에 3년짜리 사업 프로젝트를 냈고 그것이 선정되면서 2009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아카이브 설립 논의를 진행했어요. 그때 10명의 설립위원이 일을 했는데 그 중 두 분은 기록관리학 전공자였고, 한 분은 지금까지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계시고요.
퀴어 아카이브는 퀴어란 주제에 특화된 아카이브다 보니까 주제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엔 아카이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랐어요. 기록관리학 전공자가 두 분 있었지만 기록관리학에서 주로 논하는 건 국가기록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분들 역시 주제 아카이브를 아떻게 만들 것인가엔 낯선 부분이 있었죠. 나머지 사람들은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데엔 관심이 많지만 이것을 아카이브로 어떻게 관리하고 정리하는지에 대해선 잘 몰랐고요. 그래서 좌충우돌하며 만들었어요. 이 자료를 어떻게 등록해야 이 자료와 관련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까, 어떤 분류체계를 만들어야 할까… 하나하나 다 논의했죠. 이 과정에서 기록관리학을 전공하신 분들의 지식과 퀴어 연구자 혹은 활동가의 지식이 잘 섞여서 지금의 아카이브가 만들어졌죠.
<사무실의 또다른 풍경>
단체 구성 방식과 운영은 어떻게 되나요?
앞서 말씀드렸듯 처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프로젝트에서 시작했다가 2014년에 '비온뒤무지개재단' 부설기관으로 소속을 바꿨어요. 그리고 재단 차원에서 '퀴어락'을 더욱 활성화시켜야겠다는 판단이 있었고 2015년부터 인건비와 운영비를 지원하기 시작했죠. 그러니 재단 후원 부탁드립니다! 아카이브 자체의 재정 운영은 그렇고요.
특별하게 언급할 부분이라면 처음 '퀴어락'을 만들 땐 그 의미를 잘 몰랐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하다고 깨달은 게 있는데 '퀴어락'은 2009년에 프로젝트로 시작할 때부터 상근자를 채용했다는 점이에요. 3년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니 이제 상근자를 둘 수가 없잖아요. '퀴어락'은 상근자가 있을 때부터 10명 가량의 운영위원이 각자 등록 파트를 나눠서 운영위원이 기록물을 등록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했거든요. 그런데 상근자가 없는 상태로 시간이 지나자 등록이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등록 건수가 현저하게 떨어져서 1년에 400건 정도를 등록하는 상황이고, 기증품도 제대로 관리가 안 되었죠. 무엇보다 상근자가 없다 보니 방문자를 받기도 어려웠죠. 그래서 2015년부터 상근자를 두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확실히 달라지는 면이 있더라고요. 방문자를 받을 수 있고 등록과 기증품 관리가 가능하고, '퀴어락'의 장기 전망을 세울 수 있는 식으로요. 혹시나 다른 곳에서도 아카이브를 만들겠다면 아카이브 업무만 전담하는 상근자를 꼭 따로 두라고 말하고 싶어요.
자료수집정리상의 한계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자료를 기증하실 때 너무 부피가 크면 곤란하지 않을까 걱정하실 수도 있는데요. 기록물을 보관할 공간은 어떻게든 만들어냅니다. '퀴어락' 수집 홍보문구 중 하나는 “버리시려거든 '퀴어락'에 버려주세요. 보관부터 폐기까지 '퀴어락'이 하겠습니다”예요. 예를 들면 옷 종류는 따로 분류체계가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종류를 별도의 분류체계에 따라 수집하고 보관하고 있어요. 더구나 '퀴어락' 사무실이 이사를 하면서 조금씩이나마 서가가 넓어지고 있어요. 물론 더 넓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단독 건물이나 한 층 전체를 사용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자료를 수집하며 조금 복잡한 고민이 있어요. 예를 들면 2006년에 발족해서 2012년에 공식 해소한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의 회의록이 대거 등록되어 있어요. 발족 전에 논의했던 회의록과 함께 채팅창으로 했던 회의록도 등록했고요. 사실 처음엔 채팅창 회의록까지 등록해야 할까란 고민을 했어요. 회의 내용과 함께 뻘농담과 헛소리 같은 것도 많거든요. 그래서 등록해도 괜찮을까란 고민을 했죠. 그런데 회의록이라는 게 정말 정제된 내용만 있잖아요. 어떤 안건이 있었고 어떻게 결정을 했다와 같이요. 녹취록 역시 농담 같은 부분은 기록이 안 될 때가 많고요. 그런데 '지렁이'의 채팅창 회의록은 실시간으로 했던 헛소리와 뻘농담도 다 기록되어 있죠. 그 자료를 등록하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구나, 어떤 친밀감이 있었고, 어떤 농담을 나눌 수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그런 흔적까지 기록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모든 단체에 이런 것을 요구하긴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자료도 기증해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만약 단체가 해소된다면 '퀴어락'에 홈페이지부터 각종 문서까지 모두 기증해주시면 좋겠다 싶고요.
또 다른 고민은 기증 받는 건수, 등록대기 건수에 비해 등록하는 건수가 느리다는 점이에요. 작년부터 기증을 독려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기증이 더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요. 재단에서 '퀴어락'에 상근자가 필요하다고 고민했을 때 그 이유 중 하나는 등록대기 건수를 줄이는 게 1차 목표였는데, 상근자가 일하면서 더 많이 쌓였죠. 그래서 기증하신 분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항상 있어요. 내가 기증한 자료가 바로 등록되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기증하신 입장에선 마음이 상하실 수 있겠다 싶기도 하고요.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고 양해를 구할 것인가가 고민이에요. 물론 '퀴어문화축제' 관련 자료라면 그래도 이듬해 축제 전까진 등록될 거예요.
2015 제16회 '퀴어문화축제' 관련 자료가 현재 300건 가량 등록되었는데요. 이미 공개되어 있지만, 5월 즈음 컬렉션으로 다시 한 번 공개될 거예요. 컬렉션을 공개하면 작년 '퀴어문화축제'에 어떤 자료가 나왔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좀 더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을 테고요. 작년 부스 행사에 참여하신 분이라면 자신이 만든 자료를 찾아보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특정 주제의 자료는 기획등록을 하기 때문에 일정 시간 안에 모두 등록될 거예요. 그렇지 않은 자료는 등록에 시간이 조금 걸리곤 하죠. 이런 점이 기증하신 분들에겐 늘 미안해요.
재연: 보유한 자료의 종류별로 비율을 알 수 있을까요?
등록된 기록물은 모두 홈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6,200건 중 서지류가 반 정도를 차지하는 것 같고, 영상류가 600건 정도 있고요. 박물류가 1,000건 정도, 사진류가 1,400건 정도 있습니다. 주로 기증되는 종류는 박물류와 서지류고요. 최근 들어 박물류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고요. 과거 자료의 경우엔, 관리상의 문제였는지 서지류가 대부분이에요. 최근에는 박물류를 적극 수집하다보니 박물류가 증가하는 추세기도 하고 박물류를 더 많이 제작하는 듯도 하고요. 참고로 작년 '퀴어문화축제' 부스 땐 텀블러 제작이 유행이었구나 싶더라고요.
<아카이빙되어 있는 많은 자료들>
아카이빙 사업 외의 활동을 했거나 기획중이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전시회 포함인가요? 올해는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 참가를 못 할 것 같습니다. 작년에 했던 전시회는 “한국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20년”이었는데요. 전시회를 하니까 전시 부스를 지켜야 하는데, 하루 종일 운영위원 몇 명으로 다 지키기엔 무리가 있더라고요. 무엇보다 작년에 처음으로 했던 사업이 있어요. 2014년 '퀴어문화축제' 및 '퀴어영화제' 컬렉션으로 모은 기록물이 얼추 22~23건 정도거든요.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렸듯 2015년에 등록 마무리한 기록물은, '대구 퀴어문화축제' 것을 포함해서 300건이 넘어요. 그 차이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작년부터 '퀴어문화축제' 부스행사에 참가하는 부스 80여개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기증을 받았거든요. 어떤 곳은 홍보 문서를 다 챙겨주셨고, 어떤 곳은 판매 물품도 기꺼이 다 기증해주셨고요. 그러다보니 수집한 양이 확 늘어났죠. 부스 행사 자료를 수집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는 '퀴어문화축제'가 어쨌거나 LGBT/퀴어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행사로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이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 자료만으로는 행사 기록이 충분하게 안 되더라고요. 무엇보다 부스행사만을 위해 제작한 자료가 있는데 이들 자료는 행사가 끝나면 더 이상 구할 수 없는데 이런 자료가 또 상당하고요. 그래서 작년에 부스를 돈다고 돌았는데요. 나중에 보니 다른 장소에서 나눠줬거나 해서 미처 수집을 못 했거나 뒤늦게 어렵게 구한 자료가 있더라고요. 누락된 자료도 있고요. 그래서 올해는 이런 자료를 집중해서 수집해야겠구나 했죠. 전시회보단 수집 작업에 집중하기로요.
지금까지 전시회를 여러 번 진행했어요. 2010년에 “10년 전, 세상을 놀라게 한 어느 커밍아웃의 이야기”라는 전시회를 했고, 2011년엔 “우리가 자부심입니다. '퀴어락'”이란 주제로 전시회를 했고요. 전시회를 하지 않을 땐 부스 행사를 통해 '퀴어락'을 홍보했고요. 전시회를 하는 건 '퀴어락'이 수집한 자료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에요. '퀴어락'에서 퀴어 관련 자료를 수집해서 기록물로 보관하고 있지만 이들 기록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어떤 기록물이 있는지, 그 기록물이 어떤 의미인건지, 단순해 보이는 이 팔찌가 어떤 의미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해야 의미가 있죠. 그래서 '퀴어락' 입장에서 전시회는 꾸준히,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고 고민해요.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근자는 이 기록물이 저 기록물과 이렇게 연결되는구나를 새삼 깨닫기도 하고요. 그래서 상설 전시회도 고민을 하고 있어요. 사무실 복도에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데 뭔가를 전시하고 싶달까요.
다른 한편으로는 퀴어 관련 자료가 모여 있으니까 이들 자료를 토대로 연구 모임이나 연구 네트워크를 만들면 좋겠다는 고민도 하고 있어요. 연구 네트워크를 만드는 작업은 하는 것이 좋을지 안 하는 것이 좋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요. '퀴어락' 소장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하면서 더 많은 연구물 등이 축적되면 좋겠다는 고민과 연구 기능을 활성화했을 때 '퀴어락'은 어쨌거나 아카이브인데 아카이브 기능이 약해지면 어떡할까란 고민을 하고 있어요.
추후 아카이빙을 통해 기획하는 활등은 무엇이 있으신가요?
아카이빙과 관련한 추가 기획이 두 가지 있는데요. 하나는 웹아카이브입니다. Archive.org 정도는 아니지만요. 최근 들어 바뀐 경향 중 하나는 포스터보다는 웹자보를 더 많이 만들고, 카페나 홈페이지를 많이 만든다는 점이죠. 물론 많이 사라지기도 하지만요. 아울러 신문 기사의 경우 종이 신문 형태가 아니라 웹 형태로 더 많이 소비되고 생산되고 있잖아요. 이런 자료를 어떻게 등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어요. 아직은 '퀴어락'에서 이들 자료를 등록할 양식이 없어서 수집만 하고 있는데, 웹에서 생산한 자료가 놓칠 수 없는 기록이잖아요. 웹자보의 경우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웹자보만 축적되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연대기를 구성할 수 있을 테고요. 웹 아카이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는 올해부터 운영위원회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어요. 올해 형태가 만들어질지 내년에 완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논의를 시작하고 있어요.
웹아카이브와 관련해서 홈페이지를 기증 받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어요. 실제 'tqueer.com'이라고 2012년 즈음 활동했던 퀴어 웹진이 있는데요. 그 홈페이지 전체를 기증 받아서 '퀴어락'에서 관리하고 있어요(queerarchive.org/tqueer). 홈페이지 기증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많은 퀴어 활동이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진행되는데 만약 어떤 모임이 해소되어 없어지만 홈페이지나 블로그도 사라지더라고요. 그게 너무 아까운 거예요. 정말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고, 하나하나가 다 역사적 자료인데 사라지니까요. 예를 들어 '넷포'라는 트랜스젠더 관련 카페가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있었는데요. 지금은 archive.org를 통해서 약간의 흔적만 가늠할 수 있죠. 그런데 그 계정이 잘 유지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면 당시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공유했고 어떤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했는가라는 정말 소중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럴 수 없으니 무척 아쉬운 거죠. 그래서 단체나 모임을 해소하거나 없애려고 할 때 그냥 없애지 말고 '퀴어락'에 기증해주시면 좋겠어요. 혹시 이 인터뷰를 읽으시는 분 중에서 이런 종류의 블로그나 홈페이지 등을 관리하고 계시거나 알고 계신다면… 기증해주십사 부탁드립니다!
다른 하나는 음원 아카이브인데요. 음원 아키이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고민 자체는 2009년부터 했었어요. 당시엔 감당할 여력이 없었기에 차후로 연기했고요. 계속 연기한 기획이긴 하지만, 음원은 결코 놓치면 안 되는 소중한 기록이에요. 간지도 나고요. 예를 들어, 외국 LGBT/퀴어 관련 역사 다큐를 보면 1960년대나 1970년대 누가 연설했거나 말했던 음원을 들려주곤 하거든요. 그걸 보면 진짜 폼난다, 우리도 저런 기록이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라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간지만으로 자료를 수집하진 않지만요. 그래서 제가 어디 행사를 참가할 때 녹음이 가능하다면 하고 있고요.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몇 년 전부터 팟캐스트가 유행하면서 많은 퀴어 관련 팟캐스트가 등장했는데요. 그 중엔 사라지기도 하고 어떤 팟캐스트는 서버 문제가 과거 방송이 모두 사라져서 더 이상 구할 수 없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팟캐스트 방송은 진행자 개개인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LGBT/퀴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무엇보다 논문이나 연구 자료집에선 담지 못하거나 누락되기도 하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고요. 이런 자료가 '퀴어 아카이브'에서 보관되고 오래 관리된다면 이것보다 좋은 역사 자료가 없죠.
음원 아카이브를 만들겠다고 결정한 직접적 계기는 '레주파'에서 2010년부터 보이스커밍아웃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지금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들을 수 있는데, “나는 어디 사는 누구고 나는 무엇이다”란 내용의 음원이 300개 넘게 있어요. 이 소중한 음원을 '퀴어락'에 기증해주셨죠. 그러면서 이제는 미루지 말고 음원 아카이브를 준비해야겠다는 고민을 했고 그래서 2020년 개설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혹시나 팟캐스트나 다른 음원을 소장하고 계신다면 '퀴어락'에 기증 부탁드립니다. 하하.
<커튼 뒤에는 또 진열공간이 있다>
아, 갑자기 떠올랐는데 수집할 때 가장 어려운 건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유통되는 자료 같아요. 특히 트위터의 경우엔 아카이브가 매우 힘든 방식이더라고요. 퀴어 관련 자료를 수집하겠다고 할 때 매일 수천 수만 건의 퀴어 관련 트윗이 생산될 텐데 그것을 다 수집할 것인가, 혹은 특정 논쟁만 수집한다면 관련 모든 트윗을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그런데 트위터에서 많은 논의가 진행되다 보니 고민이에요.
재연: 그때 서강대 교수가 현수막을 찢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 페이스북에 글이 많이 올라왔거든요. 그런데 페이스북은 이제 공개 설정이 있으니까 친구공개, 잘해봤자 친구의 친구공개인데 이런 게 몹시 중요해 보이고 헛소리가 많았는데 이 안에서도 논의가 많고, 덧글도 많고, 엄청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루인: 정말 중요한 자료고 아마 등록된다면 웹아카이브 항목으로 등록될 것 같아요. 그런데 페이스북의 비공개나 제한 공개 기능과 트위터의 산발성을 어떻게 추적할 것인가를 아직은 가늠하기 힘들달까요.
퀴어문화의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루인: 퀴어 문화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것을 말하시는 거죠?
겨울: 성소수자들이 만들어낸 문화? 예로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부치/전천/팸으로 나누던지 이런거요.
루인: 태동을 언제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단제 언제라고 특정하고 싶은 순간이 있고요. 이를테면 현재 시점에서 어쨌거나 어던 모임이 있었다고 알려진 시기는 1960~70년대인데, 이 분들을 레즈비언이라고 해야 할지 바이섹슈얼 여성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트랜스라고 할지 알 수 없지만 명동 지역에서 여성 전용바를 중심으로 모였던 문화가 있었죠. 앞서 말한 '여운회'도 있고요. 그런 모임에서 바지씨, 치마씨라고 서로를 부르면서 어떤 커뮤니티를 만들었는데 그 시점이 현재로선 그나마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때를 퀴어 문화의 태동으로 부를 수도 있겠죠. 혹은 1960년대 여장남자나 남장여자로, 풍기문란으로 경찰에 붙잡혔던 사람들의 삶을 퀴어 문화의 태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1920~30년대 여자학교 기숙사에서 형성된 어떤 관계를 선택할 수도 있겠고요. 어떤 순간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으로 잡을지는 개인마다 다를 테니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 국면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변태들을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가라는 지점과 연결할 수도 있을 테고요.
예를 들어 1960년대 신문기사를 보면 여장남자나 남장여자가 풍기문란과 같은 죄목으로 경찰에 잡히는 사건이 여러 번 나와요. 이걸 그 개개인의 단발적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떤 문화를 형성하는 순간이었다고 읽을 수도 있을까 않을까요? 그 당시 풍기문란으로 붙잡혔던 사람 중 일부는 이태원 등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거나 그 부근에서 성판매와 관련한 일을 했던 사람들인데요. 기사만 보면 그저 단편적 해프닝일 수도 있지만 1960년대엔 미8군이 용산의 이태원 부근으로 주둔기지를 이전하면서 성판매업소도 같이 이전했고 유흥업소가 생겼죠. 그러면서 트랜스젠더퀴어가 그곳에서 일을 했는데 그 시기와 남장여자, 여장남자가 체포되는 시기가 어느 정도 겹치거든요. 그래서 과도한 추정이긴 하지만, 이태원 지역에서 어떤 퀴어 문화가 형성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 같은 단면이 아닐까 싶은 거죠.
다른 한편으로는 1970년대 여성전용 다방에서 여성들이 모였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에 출연하는 70대 바지씨 이묵님은 당시의 문화를 설명하며 바지씨와 치마씨도 있고 반바지도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서로를 분류했던 범주를 설명하는 거죠. 그런 이야기 중 무척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 당시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랐다는 느낌이에요. 아마도 그것은 낭만적으로 회고된 측면이 분명 있겠지만요. 그 당시 치마씨나 때때로 바지씨가 남성과 결혼을 하고자 했다면 슬프지만 축하를 해주고 축복을 빌면서 보내줬다고 해요. 그리고 이혼하고 커뮤니티에 다시 돌아오면 또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았다고 하고요. 지금이라면 분위기가 다르겠죠. 펨을 의심하고 바이섹슈얼에게 결국 남자와 결혼할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그리하여 커뮤니티에서 배제해야 할 존재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현재의 분위기와는 무척 다르죠. 저의 이런 말은, 좋았던 옛시절이 있었다며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범주를 이해하고 삶을 살아가는 양식을 구성하고 타인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랐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요. 물론 그 당시에도 결혼하는 치마씨나 바지씨를 비난했을 테고 다시 돌아오면 마뜩찮게 여겼을 수도 있죠. 그럼에도 마냥 배척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지금과는 다른 문화가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그 당시엔 정말로 공동체가 있었구나를 가늠할 수도 있고요. 물론 이런 식의 평가가 그 시대를 낭만적으로 그리면서 냉정하게 판단할 수 없도록 할 위험이 있지만요.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아울러 1970~80년대 초반 정도까지의 관련 기록을 보면, 물론 기록을 일반화할 수는 없는데 동네마다 이른바 동성으로 인지되는 사람들이 동거하는 집은 꼭 있구나 싶은 기록이 있어요. 어떤 기록 중엔 반미운동하는 사람이 쓴 글이고, 그래서 이들을 쌍욕을 하며 비난하고 있긴 한데요. 쌍욕 부분을 빼고 살펴보면 그 마을에 어쨌거나 동성으로 인지되는 두 사람이 동거를 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걸 예삿일로 여겼다는 거죠. 이를 통해 비이성애 관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지금과는 어떤 형태로건 달랐음을 유추할 수 있고, 지금의 하위 문화를 구축하는 방식과는 달랐겠지만 그 시대 나름의 어떤 공동체를 꾸려갔음을 가정할 수 있죠.
그래서 지금 현재의 퀴어 문화가 과거에 비해 풍성해졌는가, 이른바 진보란 표현이나 평가가 가능하다면 지금 진보한 것인가란 질문을 할 수 있죠. 이런 측면에서 LGBT/퀴어 커뮤니티에서 발생하는 배제하는 문화가 정말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들어, 어떤 흐름에서 새롭게 구성된 문화가 아닐까란 고민이 들기도 해요.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바이포비아 논쟁이 일어났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혐오는 정말로 역사에 대한 이해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유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적다는 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요. 한국의 퀴어 역사에서, 혹은 공동체 구성에서 무엇을, 누구를 삭제하고 있는가에 대한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고민하고요.
아카이브에서 일하며 과거 자료를 살피다보면 안 좋은 일에 대한 기록이 태반이에요. 사실 사건사고가 있어야 미디어에 기록이 되죠. 예를 들어 1980년대 트랜스젠더, 당시엔 성전환자나 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집에서 탈출해서 힘들게 살다가 성전환수술을 하고 나서 집에 몰래 돌아갔는데 부모님이 못 알아보더라는 그런 인터뷰 기사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식의 서사, 혹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대한 서사는 지금도 엄청 많잖아요. 특히 10대라면 더 많죠. 보통 이런 부정적 감정을 표출하면 프라이드를 못 가져서 그렇다고 간단하게 폄하하기도 하는데요. 그런 감정을 역사적 감정으로 다시 이해하고, 아카이브에 축적된 감정으로 퀴어 역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 필요해요. 이런 힘든 일이 힘든 일이 퀴어 역사의 소중한 일부분이고 아카이브에 축적된 감정인데, 부정적이거나 힘든 내용이니 말하지 않아야 하거나, 지우는 것이 옳은가? 혹은 동성애규범성에 부합하지 않고, 이성애중심 사회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어떤 행동이나 실천을 삭제하는 것이 옳은가? 프라이드라는 말은 힘들거나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있고 그 부정적 감정을 부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인하지 않고 충분히 사유할 때 가능하다고 믿어요. 그랬을 때 역사를 이해하고 부정적 감정을 이해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다른 상상력이 발생하고, 퀴어 역사를 더욱 조밀하고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고요.
퀴어 커뮤니티가 점점 더 어떤 식으로 변화해 왔다고 생각하세요?
아카이브에서 일을 하다보면 ‘아, 내가 요즘 분위기를 잘 모르나' 이런 고민을 할 때도 있어요. 뭔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한데요. 근래 들어 퀴어 정치학과 이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그 동안 분명하게 존재했고 LGBT/퀴어 운동으로 함께 했음에도 부재했다고 여겨진 집단의 목소리가 증가하고 있죠. 바이섹슈얼이 그렇고, 젠더퀴어가 그렇고, 무성애가 그렇죠. 사람들의 목소리가 증가함에도 다른 한 편에선 이런 목소리, 인식론을 부정하고 외면한다는 점이 고민이고요. 그럼에도 좋은 거 같아요.
삶의 다른 양식은 지속적으로 존재했지만 그것이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고민해요. 예를 들어 미국의 'AVEN'이 2000년대 들어 형성되고 무성애자의 목소리가 근래 들어서야 활발하다보니 무성애자 운동이나 무성애자 존재 자체가 굉장히 최근에야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고민해요. 과거의 자료를 살피면서 지금까지는 그것이 퀴어라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료와 그 자료가 말하는 내용이 누락되는 거죠. 새로운 범주가 등장한다면 과거의 자료는 전면 재발굴 작업이 필요하고요. 그런 것처럼 ‘없었던’ 존재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건 삶의 다른 양식을 주장했음에도 이것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기에, 기록의 편집 과정에서 지워졌겠죠. 언제나 말이란 당대 사람들이 혹할 법한 말이 주로 유통되잖아요. 혹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발언만 기록되고요. 나머지는 누락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 누락된 사람들이 더 이상 그렇게 둬선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과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용어가 등장하면서, 커뮤니티의 양상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고, 동성애자만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커뮤니티를 기획하고 역사와 현재를 상상할 수 있는 인식론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LGBT/퀴어 커뮤니티 혹은 성적소수자 커뮤니티를 동성애자 커뮤니티로 치환하지 못 하도록 하는 발언과 존재가 더 많이 등장하면 좋겠어요.
<AVEN 홈페이지에 있는 배너>
이것은… 아직은 그저 복잡한 감정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따르면 커뮤니티에 공헌하는 방법 중 1위가 개인적 성공이라고 답하더라고요. 개인의 성공이 커뮤니티의 성공인가? 개인의 성공을 커뮤니티의 성공으로 인식해도 괜찮은가? 그냥 고민을 하고 있어요. 동성결혼 같은 경우도 이 의제에 그렇게 많은 커뮤니티가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쏟고 있는데, 아울러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당에서도 이번 총선에서 동성결혼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데, 동성결혼을 그렇게 앞세우고 진보의 척도처럼 내세워도 괜찮은가? 그런데 왜 개인의 성공이나 동성결혼에 그렇게 사람들이 끌리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기도 해요.
퀴어문화/커뮤니티 안에서는 미국과 비교하면 역사성의 단절이 많이 느껴지는데 이 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현재 미국의 연구자가 퀴어 역사를 정리하고 어떤 사건에 연결점과 역사성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카이브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미국에선 1960년대부터 자료를 수집했고 규모가 있는 퀴어 아카이브는 1970~80년대부터 아카이브 작업을 했더라고요.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마치 주마다, 도시마다 퀴어 아카이브가 있을 정도고요. 그렇게 자료를 수집해서 기록물을 축적하다보니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거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점검할 수 있고 누가 헛소리를 하면 해당 사건과 관련한 당시의 문건을 확인해서 반박할 수 있는 거죠. 아카이브 작업 자체를 무척 중요하고 인식하기에 퀴어 아카이브 관련 국제 학술대회가 여럿 존재하고, 트랜스 아카이브 학술대회가 따로 존재하죠. 그리고 이런 흐름을 접하며 저는 한국이란 지역의 퀴어 역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아카이브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요.
반면 한국은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일을 잘 안 하는 편이죠. 1990년대 강준만 선생이 이와 관련해서 강하게 비판했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았죠. 대통령 관련 기록만 해도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기록물 건수가 천차만별이잖아요.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은 기록은 아예 흔적 조차 남기지 않거나 거침없이 삭제해버리고요. 미국이 짱짱이야, 역시 미국은 문명국이야 따위의 헛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기록이란 측면에서 보면 한국이 기록 자체를 하지 않는 문화는 아니었죠. 조선시대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이란 엄청난 기록이 있으니까요. 저는 그저 최소한 퀴어 커뮤니티에서만이라도 기록을 쌓고 정리하는 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직접 하기 힘들면 '퀴어락'에 부담감을 덜고 기증해주셨으면 좋겠다 싶은 거죠.
1980년대 자료를 찾다 보면 이태원에서 트랜스젠더 업소의 마담과 인터뷰를 한 기록, 한국에서 에이즈가 발병했을 때 한 게이가 게이는 그렇게 문란한 존재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반론기사 등이 남아 있어요. 이런 자료는 모두 당시엔 수집하기 매우 쉬웠지만 지금은 찾기가 어렵고 때론 단 한 부도 남김없이 폐기되었을 수도 있어요. 당시에 이런 자료를 모두 수집해서 관리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상상도 하고요. 만약 이런 기록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면 ‘단절'이 지금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하고요. 물론 아카이브가 활발한 미국에서도 트랜스젠더 운동이 1990년대에야 시작했다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여전하지만요.
그런데 한국에선 정말 역사가 단절된 것 같기도 해요.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가 모르는 내용이 너무 많잖아요. 1990년대도 잘 모르지만 어쩐지 알고 있다는 착각이 들긴 하지만요. 그런데 2000년대도 벌써 많이 잊히고 있죠. 트랜스젠더인권활동단체 '지렁이'의 경우 2006년에 발족해서 실질적으론 2010년, 공식적으론 2012년에 해소했는데요. 재작년에 어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 운동은 2013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 있어요. 당장 몇 년전의 일도 망각되는 거죠. 역사성이란 측면에선 확실히 1990년대 이후와 이전으로 나뉘는 측면이 존재하긴 해요. 그런데 그런 단절을 단절로 두지 않고 복원하는 것이 아카이브의 역할 중 하나라고 고민해요. 무엇보다 미국엔 스톤월 항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와는 별개로, 스톤월 항쟁이라는 신화적, 망상적 기원이라도 있지만 한국엔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고 서사가 없으니까 더욱 단절이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단절이 5년이건 10년이건, 혹은 더 짧은 기간이간 어쨌거나 끊임없이 생긴다면 이것을 어떻게 엮어가며 역사성을 구축할 것인가가 아카이브의 중요한 고민이죠. 그러니 자료를 계속해서 발굴하고, 존재의 기록은 남아 있으나 그 기록이 모여 있지 않아 잊히거나 단편적 사건으로만 취급되지 않도록 기록물을 서로 엮어내는 작업을 계속해야겠죠. 그래서 올해 '퀴어락'의 목표 중 하나가 1990년대 이전 자료를 찾는 거예요.
<트랜스젠더인권연대 '지렁이'에서 만든 활동포스터>
현재 퀴어커뮤니티/문화가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방향성에 대해 비판하고 싶으시거나 걱정되는 지점은?
좋은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있어 꺼리는 점이 있지만, 커뮤니티의 어떤 분위기가 보수화되는 측면이 있는 거 같아요. 한편에선 새로운 목소리가 계속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더욱 공공연히 배제하고 혐오하는 것 같고요. 새로운 목소리가 보수화되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필요도 있다 싶고요. 개인의 성공을 커뮤니티에 기여라고 답한 부분도 관련이 있는데요. 어느 LGBT 개인이 성공하거나, 유명인이 커밍아웃한다고 해서 커뮤니티나 각 개인의 삶이 바뀌진 않거든요. 미국에서 그렇게 많은 연예인이 커밍아웃하고 정치인도 커밍아웃을 하지만 아직도 학교에선 LGBT/퀴어가 왕따를 당하거나 살해되고, 경찰이 트랜스젠더퀴어를 공공연히 폭행하고 괴롭히고 있잖아요. 물론 제가 커뮤니티의 분위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고 저 자신은 잘하고 있나 싶지만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규범성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삶의 다른 양식,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거나 배척하는 분위기를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퀴어커뮤니티/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동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논쟁하는 경우를 많이 못 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의제가 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LGBT/퀴어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등을 논함에 있어, 척을 질 때 지더라도 열렬하게 혹은 살벌하게 논쟁하는 자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은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이야기만 따로 하는 느낌이고요. 그러다보니 논의가 축적이 안 되고요. 이런 게 좀 아쉬워요. 각자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논쟁하는 자리가 있어야 커뮤니티건, 퀴어 문화건, 퀴어 정치학이건, 퀴어 이론이건 이런 것들이 정체되지 않고 계속 흐를 텐데요. 그런 면에서 좀 많이 아쉬워요.
또한 ‘이런다고 바뀌는 게 없다'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고민해요. 과거 자료를 살펴보면 지금에 비해 크게 바뀐 건 또 없거든요. 좋아졌다는 기준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요. 종종 옛날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이 있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라는 질문을 하고 싶어요. 아까 [불온한 당신]에서 이묵 님이 회고했다는 이야기, 치마씨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뭐라도 결혼 선물을 하며 보냈다가 돌아오면 받아주는 분위기를 떠올려볼 때요. 이묵 님의 회고가 과거를 미화하는 것일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시점에서 현재를 그렇게 회고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렇다면 그 당시에 비해 지금은 무엇이 좋아진 거죠? 다른 한편 미래가 좋아져야만 운동을 할 수 있나?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운동만 해야 하는가? 미래는 희망적이어야 하는가? 과거 자료를 살피다보면 제도는 분명 변하는데 정말 좋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도가 바뀐다고 개인의 삶이 바뀌진 않잖아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엔 헌법에 성적지향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경찰이 교정강간에 공모하고 있죠. 제도의 변화가 더 좋아진 삶은 아닌 것 같아요. 무엇보다 희망 없이도 살 수 있고, 뭔가 좋아져야만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아카이브를 하면서 배운 건 이것이에요. 미래엔 더 좋아질 것이란 희망이 없어도, 혹은 지금보다 더 나빠져도 내가 하고 싶고 주장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재연: 운동이 나빠진다고 할 때 이게 운동만 나빠지는 건지 아니면 사회가 나빠지는 건지 이런걸 분리해야 하는 측면이 있는 거 같아요. 만약 모든 운동이 더 안 먹히는 지점이 있다면 이게 왜 그런 건지 분석해봐야 하고요.
연구자들이 많이 오신다고 했는데 주로 어느 쪽에서 많이 오나요?
주로 사회학, 여성학, 문화학 이런 분야에서 오는 것 같아요. 퀴어이론을 공부하고 싶어서 찾는 분도 많고요. 하지만 그냥 퀴어 관련 자료가 많다고 해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저는 한편으론 '퀴어락'이 퀴어 연구자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만요. 다른 한편으론 연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냥 퀴어와 관련한 자료가 있음을 확인하고 싶거나, 퀴어 관련 자료를 단지 구경하고 싶어서 방문하는 사람도 많아졌으면 해요. 만화책 보러 오셔도 되고요. 퀴어 자료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근래 들어 기록관리학 분야에서 찾아오기도 해요. 작년에만 네 팀이 '퀴어락'을 주제로 연구하겠다고 찾아왔고요. 그 중 한 분은 석사학위논문을 '퀴어락'으로 쓰시는 분이었고, 다른 세 팀은 기록관리학 수업 시간에 발표하겠다고 '퀴어락'을 찾으셨죠. 올 초에 한 편의 석사학위 논문이 나와서, 지금까지 '퀴어락'을 연구한 기록관리학 논문은 총 두 편이고요.
'퀴어아카이브'가 생각하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몇가지만 말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카이브 입장에서 말하자면요. 시급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개개인이나 단체가 자료를 모으거나 관리하는데 좀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고, 가능하다면 기증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랄까요? 기증이 어렵다면, 단체의 경우엔 단체 차원에서 아카이브 작업을 진행하면 좋겠다 싶고요.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듯하거나 흔한 듯해도 10년 20년이 지나면 정말 귀하고 중요한 자료일 때가 많아요. 옛날 자료는 찾기 힘든데 반해 현재 자료는 찾기 쉽다고 생각하다 보니 관리 소홀이 발생하고 때때로 그 모든 자료가 삭제되는 일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퀴어락'에 기증을 해주시면 가장 고맙고요. 공개가 애매하면 '퀴어락'에서 비공개나 제한공개를 걸 수도 있고, 다른 방법도 협의할 수 있으니까요.
시급한 이슈를 질문하셨는데 이런 답을 하는 이유는요… 소중한 많은 자료가 잊히는 게 아쉬운 거죠. 안타깝고요. 자료가 좀 더 풍부하다면 시간이 지났을 때 지금을 그만큼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퀴어 개개인들이 현재의 퀴어 역사를 만들고 있고 정말 다양한 입장과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목소리들이 충분히 기록되거나 수집되지 않는다면 결국 기록물의 형태로 남아 있는 목소리만 현재의 역사로 구성되는 거죠. 그리고 전혀 다른 목소리나 입장은 없는 역사가 되겠죠. 만약 젠더퀴어 관련 현재의 여러 활동이 충분히 기록되지 않는다면 미래 시점에서 그것은 사실상 부재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죠. 바이섹슈얼 역시 마찬가지고요. 제일 억울하고 화가 나는 지점이에요. 역사가 구성되는 방식, 기억되는 방식에 화가 날 때가 많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기록을 해주셨으면 해요. 메모나 낙서라도 그런 게 아카이브에 남아 있을 때 헛소리를 막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요. 내가 냈던 나의 목소리와 입장이 잊히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이 기록하고 아카이브에 기증해주시면 좋겠어요. 보수화되는 경향에 맞서 다른 흐름을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역사는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아카이브, 기록물이라고 얘기할 때 퀴퀴할 수 있는 공간이란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퀴어 역사와 이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면서 논의를 확장시키고, 자칫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토론의 결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언젠가 또 방문해서, 시간이 되신다면 루인님과 더 오랫동안 아카이브와 퀴어 역사, 그리고 한국 퀴어 문화의 방향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얘기하고 싶었다. 여러 면에서 뜻깊은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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