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 인권팀)
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그 날을 기념하는 행사로 레드파티가 기획 됐고 나는 그 기획단에 들어갔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기획단에서 여러 사람들을 짧게나마 만났고 파티 기획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12월 1일은 디셈버 퍼스트라는 행사가 진행된 날이기도 했다.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어쩌다보니 나는 그 행사장에까지 가게되었다.
모르고 싶었다. 처음부터 가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거기서 보았다. 휠체어 탄 장애인이 든 피켓을 힘 써 뺏고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의 박수를 받던 검은 가죽바지 입은 여자의 굳게 다문 빨간 입술을. 우리가 시위를 시작하자 드디어 나왔다는 듯이 신나서 야호 하고 행사장을 뛰어다니던 어떤 양복 차려 입은 아저씨를. 엄마를 따라서 '동성애자는 나가라!' 하고 외치는 일곱살 쯤 되어보이는 아이를. 보지 않을 수 있던 것을 나는 보았다.
레드파티에 왔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모를 것이었다. 나 역시 온실 속의 화초였다. 커뮤니티라는 온실, 성소수자 친구들이라는 온실, 게이바라는 온실 속에서 나는 시스젠더 비감염인이라는 비소수자로 살았다. 그런데 국회 안은 아니었다. 어디에서 왔고 무얼 보고 왔냐는 주최자의 질문에 그냥 집에서 혼자 인터넷 보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남들이 모두 동성애자는 물러가라고 외칠 때 따라 외치지 않고서는 나를 지킬 수가 없었다.
온실이 절실했다. 나는 뛰쳐나왔고 레드파티라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온실로 도망왔다. 내 PL 친구, 또다른 내 PL 친구, 좋아하는 PL형 모두 춤추고 놀 수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왔다는 게 놀라웠다. 누구에게는 그저 하나의 발걸음이었고 하나의 춤 스텝이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 오백명이라는 사람이 감염 여부에 상관 없이 추는 춤은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언젠가는 열렬히 몸도 부대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물론 온실 속의 화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화초에게는 온실이 필요하다. 다만 나는, 화초가 그것이 온실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결국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은 온실 자체가 아니라 화초들에게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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