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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회원 에세이] 편안한 일상이란 어떤 걸까?

by 행성인 2023. 3. 26.

 

종우(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

 

 

성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영화 <3XFTM>(2009)의 한 장면

 

성정체성으로 인해 겪을 수 밖에 없는 반복적인 불편한 일상

나는 50대 비수술 트랜스 남성이다. 아직도 성별을 정정하지 못했다. 호르몬 주사만 23년째 맞고 있다. 외모와 목소리가 주민번호 뒷자리 첫번째 숫자와 달라서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불편한 일을 자주 경험한다.

 

통신, 은행, 보험 등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 사람들은 직접 방문하지 않고 고객센터로 전화해서 처리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 전화를 통해서 처리할 수 있는 일도 직접 가서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때가 많다. 고객센터에서는 목소리와 주민번호상 성별이 일치하지 않아 전화로는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에서 민원처리할 때는 주민번호를 적거나 신분증을 제출할 때가 많은데, 집근처에 있는 공공기관은 이용하기가 더 부담스럽다. 동네주민에게 내가 성소수자인 사실이 원치않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벼운 업무도 일부러 집에서 먼 공공기관에 가서 처리한다. 선거도 일부러 사전투표기간에 집에서 먼 투표소에 가서 투표한다. 


1, 2년의 단기간 경험도 아니고 23년동안 나는 쭉 보통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왔다. 평생 사회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 혹은 죄를 지었다고 낙인 찍힌 사람과 비슷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억울해진다.  
 


직장

나는 자동차 배송 및 납품기사, 오토바이 택배 기사, 택시 기사, 카드배송원, 전단지배포 아르바이트 등등 주로 배달 배송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 지금은 오토바이 배달 대행 기사로 일한다. 돌이켜보면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이거나 적어도 면접관에게만 제시할 수 있는 직업, 취직해도 동료들과 오랜시간 부대끼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업종을 일부러 선택했다.

 

만약 시스젠더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일을 선택해서 일했을까? 나는 성공유무를 떠나 동료들과 부대끼면서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사는 사소한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고 사람 속에서 같이 지내는 걸 좋아한다. 마음이 아프다. 마치 23년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부대낌

 

만약 호르몬주사만 맞아도 성별정정이 가능한 사회에서 살았다면 나는 어떤 일을 했을까? 지금과 같은 배달기사를 하면서 산다고 해도 지금처럼 배달대행업종의 맨 밑바닥인 일반기사로만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상 중간급 직급의 기사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내가 어떤성격이든 간에 성실하게 일하는 편이기 때문에 저절로 중간급으로 승진되어 일하고 있을 것이다.

 

혼자 조용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온 덕분인지 다른 비수술 트랜스남성과 다르게 차별을 받거나 폭행 당하거나 왕따를 당해본 경험은 거의 없다. 직업 특성상 굳이 부대끼지 않아도 일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기에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일했다. 그런 경험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스스로 방어막을 친 것인지도 모른다. 일하는 곳에서 불편한 관계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그만두고 같은 업종의 다른 곳에 가서 일하면 그만이었다. 수입에 큰 차이가 없었다. 사실 4대보험을 거의 적용받지 않고 대부분 법적·사회적 제도에서 밀려난 곳에서 일했다. 국민연금은 고작 13회정도 낸 게 전부다. 

 

 

*

 

작년말에 행성인에 가입하고 트랜스젠더인권팀을 소개받아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수술 트랜스여성의 성별 정정이 가능하다는 판결 소식을 들었다. 팀회원을 통해서 희망법에서 일하는 박한희 변호사님을 소개받았다. 상담을 받았다. 이제 서류만 준비하여 제출하면 성별을 정정할수 있다.

 

지난 2월 15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비수술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허가를 결정한 데 대해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은 3월 15일 환영논평을 냈다.

 

긴 시간동안 정체된 채로 살았다. 포기하고 대충 살았다.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남성으로 살았지만 두꺼운 껍질속에 눈만 빼꼼 내민 모양새로 숨죽여 지냈다. 호르몬 주사만 맞아도 성별을 정정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성별을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크지만, 나는 23년동안 비수술 트랜스남성으로 그래도 잘 살았다고 위안한다. 


성별을 정정하면 그동안 누려보지 못한 편안한 일상을 살게 될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새로운 계획들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작해야 편안한 일상을 보장받는 건데 이렇게 기뻐할 일인가? 억울하고 서럽다.

 

고작 일상때문이라면 성별 정정의 의미가 없지 않냐고 물어볼지 모르겠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법원이 성별 정정을 안 해줘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조차 못하고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