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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향 · 성별정체성/트랜스젠더

[TDOR 특집] 1년 뒤 나에게 보내는 편지

by 행성인 2023. 11. 19.

 

소하(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

 

 

새 출근길에서

 

 

잘 지내고 계시나요? 저는 1년 전의 나입니다. 불안과 우울의 시절을 겪고 있지만,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습니다. 1년 후에 나는 안녕한가요? 부디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요.

 

먼저,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를 간단히 전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TDOR을 맞아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어떤 글을 쓸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즐겁고 유쾌한 글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어둡고 우울한 글을 보이게 될까, 걱정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재작년에 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우 낯설었습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지금의 나와는 영 다른 사람 같아!” 그래서 떠올랐습니다. 1년 뒤에 나에게 근황과 감정을 전달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트랜스젠더로서 살아낸 1년 뒤의 나는 지금과 또 다른 내가 되어있겠죠?

 

그럼, 이제 근황을 전해볼게요.

 

최근에 친구에게 일일 알바를 요청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사무실이나 건물을 청소하는 사업을 하는데 시흥시의 한 복지관을 청소하는 데 도와달라며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요즘 일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내 페이스북 게시글을 보고는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듯합니다. 나는 기꺼이 수락하여 시간에 맞춰 청소하러 갔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고된 노동을 하니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문득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었습니다. 나에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당장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대답 못하다가 “이미 그른 것 같다.”라는 대답했습니다. 우울증에 찌든 나머지 짜낸 대답이었고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이미 실패해 버린 인생 같은데도 계속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잘 살아가기 위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루 내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어느덧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기로 한 지 4년 차 입니다. 트랜스젠더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은 후회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삶의 질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직장을 새로 구할 때마다 법적 성별이 남성인 것 때문에 애를 먹어야 합니다. 직장을 구하기 힘든 만큼 트랜지션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족을 꾸리는 일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가족과는 어딘지 모르게 소원해졌고 나는 의지할 곳을 잃은 기분입니다. 이 기분을 메꾸기 위해 많은 인간관계를 쌓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외로움에 벌벌 떨며 울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이래저래 원하는 삶을 잃어버렸지만, 희망을 아주 잃지도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원하는 바를 이루리라는 희망이요. 언젠가는 원하는 바 하나라도 얻을 수 있겠냐는 희망은 아직 버리지 않았습니다. 부디 1년 뒤의 나는 무엇이 되었든 인생에서 하나라도 만족하는 것을 가질 수 있기를.

 

그저께는 새로운 직장에 첫 출근을 했습니다. 게임업계에서 10여 년을 일해오다가 업계에 염증을 느끼고 이번에는 다른 일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오토바이 정비업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게임업계와는 다른 분위기에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나와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이번에 일하게 된 업장의 동료들은 걱정보다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친절하진 않았지만, 배려심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나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관해 얘기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추진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겠다.”, “남에게 강요는 할 수는 없다.”라는 씁쓸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지요. 남에게 강요할 순 없죠. 그냥 존재할 뿐인걸요. 다행인 건 그런 말을 했음에도 나를 어색하게 대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를 가진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성소수자의 개념과 성소수자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인 것이겠지요.

 

1년 뒤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오토바이 정비업에 익숙해져서 일을 잘하고 있나요? 아니면, 다시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되었나요? 희망대로 인생에서 원하는 것 한가지쯤을 얻었나요? 우울증은 많이 완화되었나요? 외롭지 않게 잘 지내고 있나요? 잘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나요?

 

부디, 이 질문 중에 한가지쯤은 좋은 소식을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보시는 모든 트랜스젠더분들도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2023년 11월 15일 밤의 소하가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