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아가와 책놀이
4월에 3살을 먹는 아이와 책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어요. 지난 2월 한국에 다녀오는 길에 아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 몇 권을 사왔습니다. 그림에 스티커를 붙여 흥미를 돋아주는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예쁜 그림 위에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며 익히는 책과 숫자를 익히며 놀이도 할 수 있는 책도 구매해왔습니다.
명문대학에 세 자녀를 보낸 어머니가 받은 많은 질문에 엄마는 공부하라는 말 보다는 책을 많이 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성공은 자녀가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요. 이 말은 아이의 성공이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가끔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네. 정년이 없는 (제가 해보니 간호사는 너무 힘이 들고, 의사나 약사 같은 보건의료분야의)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면 좋겠어.' 이렇게 아이의 먹고 사는 문제를 미리 앞당겨 걱정을 할 때가 있더라구요.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나 잠재력은 아랑곳하지 않고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여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지혜로운 견해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나와 찰스 아빠의 사랑이 듬뿍 담긴 양육과 지혜로운 교육철학으로 우리 딸내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요즘 녀석은 초저녁에 제 옆에서 놀다가 아빠 곁으로 가서 잠이 듭니다. 아이패드에 있는 앱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조카들이 보내준 책으로 옛날 이야기와 동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이야기가 재미 있는지 귀를 쫑긋거립니다. 앞으로 아이가 거실과 방 그리고 자신의 생활 공간 곳곳에서 책을 갖고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요.
아이는 가끔 페이지의 이야기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손가락을 내밀어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고 야단 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하고싶은 것이 있으면 그야말로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행동을 ‘잠깐만’과 ‘기다려’라는 지시어로 훈련 중입니다.
일하고 와서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정말 힘든 육아노동 입니다. 놀이터에 데리고 가서 운동시키랴 저녁을 먹고 나서 책과 같이 놀아주랴 정말 피곤 합니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아이와 시름했을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이 시간 만큼은 남편을 편하게 쉬게 해주자’라는 마음으로 아이와 운동하러 갑니다. 다녀온 후에는 샤워도 함께 합니다. 물을 만지고 첨벙거리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아빠가 샤워하자고 하면 엄마랑 한다네요.
퀴어커뮤니티가 가족이 되어줄 때
이경-하나의 결혼식과 저희 결혼식에 함께 해준 퀴어 벗들을 보며 가족의 의미를 짚어보게 되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2015년에 결혼했습니다. 인권재단 사람에서 행성인 회원님들 그리고 제가 속한 성공회 성당 공동체를 비롯한 여러 지인들과 조카들이 참석하여 많은 축하를 받았지요.
하지만 저의 누나들은 오지 않아서 무척 서운했고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를 늘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누나들 입니다. ‘나름 사연이 있었겠지’라는 생각으로 위로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가끔 가슴을 저미는 서운함이 문득 밀려오곤 합니다.
이것도 서운하더라고요.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누나들로부터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를 묻는 전화를 단 한 통도 받지 못했어요. 자신들의 자녀들이 결혼을 할 때면 세 자매들은 신바람이 나서 한복도 보러 다니고 즐거워 하였는데 나의 결혼식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셨지요.
그래서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더라고요.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새 아들 찰스에게 양복 한 벌을 사서 입혀 주셨을 것을. 이런 속상한 마음을 아신 순옥 누님(장애인권활동가)께서 양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엄마 같은 누님이시죠.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원가족이 싫어집니다. 아니, 정이 뚝 떨어져요. 원가족이란 생물학적으로 가장 가깝게 태어나 법적으로 엮인 가족 입니다. 그렇지만 원가족이 보이는 반동성애적 사고와 행위는 동성애자에게 큰 상처를 입힙니다. 혐오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관심이나 방임하는 태도에도 저는 속이 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에게 퀴어커뮤니티는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가족이 되어 주었어요. 행성인은 저의 결혼식에서 보여준 원가족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암요, 다르고 말고요. 행성인 안에서 저는 동고동락하며 지냈습니다. 서로가 동병상련의 마음을 헤아려주었지요. 고민과 힘든 마음이 있어 ‘어' 하면 '아' 하고 알아듣습니다. 퀴어 친구 인생 여정에서 희로애락으로 손잡아주고 함께 동행하니 이보다 더 좋은 가족이 어디 있을까요?. 이런 커뮤니티 가족 이야말로 멋지고 사랑스런 가족 이지요.
그래서 저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커뮤니티가 가족으로 느껴집니다. 또한 행성인은 제가 타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늘 그리운 친정 식구처럼 느껴지고 보고싶답니다. 퀴어커뮤니티, 그대는 나를 외롭지 않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러블리 그 자체라오.
최고의 환갑 잔치 찬사: 퀴어로 한평생
올해 모국방문 동안 큰 이벤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행성인 아우님들이 저의 환갑에 잔칫상을 차려주었습니다. 보통은 환갑을 맞은 이가 상을 차려 지인을 초대하지요.
동생들은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라고 쓰여진 족자를 걸어 저를 환영했습니다. 잔칫상에는 예쁜 꽃, 무지개 떡, 그리고 오색 찬란한 과일들이 차려져 있었어요. 무지개와 젠더퀴어 깃발도 빠질 수 없지요.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차려놓았더라구요.
우리는 서로 마주앉아 한사람씩 돌아가며 저에 대한 소회를 들려주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회고담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모아 만든 포토북에 자신들이 기억하는 ‘여기동’과 저에 대한 바램을 고스란히 담아 저에게 선물해주었습니다. 포토북에는 저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동생들에게 평소에 던졌던 말들을 ‘어록’ 이랍시고 다음과 같이 담아놓았더라고요.
◆ “최고의 사랑은 친절이야 (법정 스님의 말씀 가운데 최고의 종교는 친절이라고 말씀하셨어, 내 짝꿍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자꾸나)
◆ 내 떡이 제일 크다 (그러니 애인과 파트너에게 잘하려무나!)
◆ 달달한 사랑이 금슬에 좋다 (달달한 애정표현 많이 해야 오래오래 사랑하게 된단다!)
◆ 이승이 짧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무한하지 않으니, 함께 하는 동안에)”
나에게 그대들은?
부족하기 그지 없는 저에게 과분한 칭찬과 찬사를 날려준 동생들은 어떤 존재일까요?
나와 이들은 띠동갑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를 잊게 만들며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가끔은 제가 아주 철없는 이야기를 해도, 응석을 부려도 다 받아준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상을 입었을 때 동생들은 한걸음에 빈소에 달려와 저를 위로해주었지요. 남편 찰스와 결혼을 할거라고 말하자 ‘왕언니 결혼추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창원에서 살던 터라 동생들이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결혼준비를 해주었습니다. 웨딩 케잌도 주문해서 떡하니 차려 놓았더라고요. 결혼식 배너도 만들어 쉽게 초대할 수 있었고요.
남편의 나라 필리핀으로 이민을 떠날 때도 레인보우 커플 캔버스 운동화를 선물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민 생활 내내 외롭고 힘들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아이를 입양할 때는 제가 나이가 많아 힘겨울까 걱정을 많이 하면서도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주었지요. 인보 첫 돐에 십시일반으로 축의금을 모아 보내주었습니다. 행성인 이모 삼촌들이 보내준 축의금으로 아이 분유, 기저귀, 유모차 등 육아에 필요한 용품을 마음껏 주문했어요. 동생들은 육아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힘내라고 응원해주었습니다. 이런 덕분에 육아일기도 시작할 수 있었지요.
이러니 어찌 동생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대들은 나에게 최고의 찬사와 과분한 칭찬을 아낌없이 날려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런 동생이자 든든한 벗 입니다.
아우님들, 멀리 있으면서도 내 환갑 생일을 기억해주고 축하해주어 고맙다오. 난 그대들이 있어 외롭지 않고,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라오. 많이 많이 고맙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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