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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이야기마당] 동성애도 배달이 되는 세상, 근데 왜 동성애자인 전 혼자인가요?

by 행성인 2024. 10. 22.
10월호 이야기마당은 HIV/AIDS 인권팀에서 진행한 토크쇼 <나의 불안전한 섹스 2부: 문란하고 싶지만 성병은 무서워>에 참여한 패널들이 자신의 이야기와 현장에서 나눈 토론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한준(행성인 HIV/AIDS인권팀)

 

 

요즘 게이 친구들 사이에서 박상영 작가의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이 영화와 드라마로 연이어 영상화가 되어 화제를 끄는 중이다. 영화 개봉 전까지만 해도 예고편을 보고서, 퀴어를 그린 장면은 사라진 채, 헤태로 여성과 게이 남성의 우정만 강조된 기만적인 작품이 아니냐?라며 논란이 일었다. 또 다른 누구는 아직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이 사회에서 퀴어성을 가지고 상업적으로 흥행하기 힘들기 때문에 당연히 그 정도의 기만은 당연시해야 한다며 논란을 일축했다.

 

결국 우린 이성애가 점령한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파도에 쓸려 사라지는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성애는 살아남는다. 사실 살아남는 걸 넘어서 배달까지 된다.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가 생긴다 말하고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성 동성애에 한정된 글이라는 걸 미리 고지한다.

 

여기 기업 가치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 글이 있다. 해외 커뮤니티 사이트인 레딧의 주식 관련 게시판 이용자가 쓴 글로, ‘그라인더’, 그러니까 한국에서 잭디의 위상을 전 세계적으로 가진 게이 데이팅 어플 기업에 대한 분석이다.[각주:1] 이 글의 주요한 논지는 잠재적 수요자들이 더 많은 이성애자 대상 데이팅 어플들보다 게이 데이팅 어플이 더 성장할 수 있고, 지금의 기업 가치는 저평가 되어 있다는 거다.

 

그라인더 주가 사진

 

아니 왜? 데이팅 어플 업계는 코로나 특수가 끝나 소위 ‘떡락’빔을 맞고 우하향하는 추세인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심지어 이용자수도 더 적을 수 밖에 없는 게이 데이팅 어플 그라인더가(Grindr Inc의 시총은 약 3조원 가량 된다), 업계 선두주자인 틴더(Match Group의 시총은 약 14조 가량이다)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이유는 간단하다. 그라인더는 데이팅 어플이 아니라 배달 어플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라인더의 경쟁자는 데이팅 어플인 틴더가 아니라, 배달 어플인 우버이츠(Uber, 시총 약 240조가량), 도어대시(Doordash, 시총 약 75조가량)이며, 기업 가치 산정 방식도 영업이익보단 플랫폼 기업답게 월간활성사용자수로 매겨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 논지다. 그러면서 그라인더가 배달 어플에 가깝다고 든 근거들이 충격적이다.

 

  •  음식 배달 서비스가 사람들의 보상회로 체계를 망가트려 비싼 가격으로 패스트푸드를 파는 것처럼, 그라인더는 게이들의 이성보다 앞서는 섹슈얼한 욕망을 이용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  이로 인해 그라인더의 평균 체류시간이 타 데이팅 앱보다 4배나 높고, 심지어 미혼 게이 남성들 대상이라 이용자들의 소비능력도 충분하다. 심지어 나날이 늘어나는 전 세계적 게이 인구를 살펴봤을 때, 그 어떤 배달 기업보다 더 성장 속도가 빠를 수 있다.
  •  결정적으로 앱 사용자의 행동 양상을 봤을 때, 맛있는 음식을 고르듯이, 꼴리는 사람을 고르고, 이때 중식과 양식을 구분해서 고르는 것처럼, 트윙크나 베어 필터를 이용해 내 식에 맞게 고른다. 그리고 섹스 주문을 하고, 이에 맞게 문 앞까지 사람이 섹스를 배달해 준다. 이 모든 과정이 쉽고 편리하게 효율적으로 폰 안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그라인더는 배달의민족과 똑같은 어플이다. (원문에선 우버이츠와 도어대시를 사용했지만 의역했다.)

 

그래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금의 저평가된 가치는 게이들의 발정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12달러 근처인 지금 그라인더 주가는 70달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시총으로 평가하자면 약 19조 가량. 그렇다면 그라인더는 틴더보다 더 큰 기업이 된다. 이성애보다 동성애가 돈이 더 된다니, 아이러니 하다.

 

게이클럽 오픈 안내 인스타 이미지(왼쪽부터 그라운드/도파민/프리즘)

 

올해 들어 이태원의 호모힐에 게이클럽이 3개가 더 생겼다. 게이들이 이태원에서 출몰하는 지역은 더이상 호모힐이라는 말처럼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 아닌, 대로변을 끼고 번성하는 호모 스트리트가 되고 말았다. 우리들만의 작은 유토피아가 밀려오는 이성애 쓰나미에 더 이상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이태원과 종로의 불빛을 항상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들만의 유토피아에서 놀고 마시며 커져가는 욕망 에서, 남는 건 게이들의 채워지지 않는 허한 마음이다. 그라인더 주가는 매일매일이 신고가를 경신하고, 게이클럽은 계속 생겨나가지만, 게이인 우리들은 점점 혼자가 되어간다. 동성애는 커져가는데, 동성애자인 우리는 우울하다. 분명히 이태원과 종로에서 ‘게이들’로 살며 행복했는데, 그 밖을 나와 게이로 혼자 살아 가려고 하니 두렵다.

 

 

남자 앞에서 남자를 찾는 게이들

 

게이인 우리들은 더 이상 개인으로 묶이는 게 아니라, ‘게이들’로 묶인다. 우리는 ‘게이들’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게이로서 이태원과 종로를 가고, 게이로서 잭디와 틴더를 켠다. 개인의 사적 이야기가 올라가는 인스타에서조차 친한친구라는 명목으로 게이적 이야기들이 게이로 등록한 친구들에게만 전달된다. 물론 법처럼 명시적이고 강제적인 기준은 없지만, 상류층의 사교클럽이 움직이는 방식처럼 개인들의 자유는 집단인 ‘게이들’의 기준에 의해 지배당한다. 우리의 머리는 아주 특수하고 왜곡된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 게이들만의 기준이 뭘까? 이태원에서 매번 보이는, 청반바지에 검은나시의 근육질 머리짧은 수염기른 외모가 남자답다는거? 끼떠는 건 게이답다는거? 사실 열거하려면 수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게이 커뮤니티 내부에서 단일한 관념적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한 형상이 실존하는 게이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흔히 다양한 가치관들이 넘쳐나고 다원성이 공존하는 공간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라 한다. ‘게이’들도 이 사회에서 포용하자 할 때, 주로 드는 근거들이 게이들이 보여주는 다양성이 우리의 사회를 좀 더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근데 정작 게이들 사이에선 그 어떤 다양성과 다른 형태가 수용되지 않는다. 자기관리를 말한다면 운동을 지칭하고, 몸이 건강하다고 말하면 높은 골격근에 적은 체지방을 가진 몸을 지칭한다. '선호'와 '비선호'의 목적어가 애널섹스를 지칭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아서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 깊숙하고 강력하게 작동하는 게이 커뮤니티 속 ‘당연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 ‘당연함’이 자연스러운가? 그럴리가. 모두가 애널섹스로 절정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남자다운 몸을 갖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공격이 들어온다.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은가. 아네로스 사서 개발을 하던, 비선호 게이들만 만나던, 건강하지 않으면 운동을 하면 그만이라는 반박은, 어디선가 많이 본 주장 아닌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힐난하며, “시험 쳐”를 외치고, 소득격차가 학벌격차로 더 심하게 이어지는 수능을 결사 옹호하며, 아무튼 “똑같은 시험이야”를 외친 이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하지만 수능을 본 전부가 1등급을 맞을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게이들이 남자다운 몸을 가질 수 없다. 시험이 있다는 건 탈락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듯이, 기준이라는 건 분명히 그 기준과 맞지 않는 “여성스러운 분 죄송”에 포함되는 게이 남성과 그런 남자들의 속성이 있음을 함의한다.

 

그런 속성 중 하나인 게이들의 ‘남자다움’을 생각해보자. 사실 많은 게이들이 우러러 보는 ‘남자다운 몸’을 얻기란 쉽지 않다. 일주일에 주40시간을 학교나 직장에서 소모한다고 가정할 때, 운동에만 직간접적으로 최소 주 10시간을 투입해야 하며, 적은 체지방을 위해 식단 관리를 해야한다. 말이 좋아 식단관리지, 먹는 모든 순간에 칼로리를 고려하여 선택하겠다는 의식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쉴 틈이 없다. 다른 인간을 고려할 틈도 없다. 오직 남들이 우러러 보는 비너스 동상이 되고자 자신의 신체를 잘라낸다. 한국 사회에선 노동과 학업으로 충분히 과로한데, 남성성의 비너스가 되고자 과로에 과로를 곱한다. 자연적으로 골격근량의 증대에는 체지방이 따라오지만, 그걸 거스르기 위해, 매일 매일 연어처럼 그 물살을 거부하며, 자신 본연의 인간적 의지를 남자다움에 포획당한다. 

 

게이들의 ‘남자다움’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러한 이미지와 얼마나 똑같은지 눈 앞 남자들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남자들 사이에서 진짜 남자가 생기고, 가짜 남자가 생긴다. 여기서 남자 앞에서 남자를 찾는다는 비극의 신호탄이 울린다. 각자의 고유한 인간다움은 사라진 채, 대신 아주 특별한 남자다움으로 덮어 씌여지는 것. 특별함만이 게이 커뮤니티의 평범함이 된다는 것. 그러한 특별함이 각자가 가진 다른 평범함을 소외시키고, 특별함의 기준으로만 줄 세운다는 것. 자신의 욕망이 사라진 채, 타인들의 욕망만 남아 폭주한다는 것. 공부하고 여자를 만나라던 학창 시절에서 도망쳐 나와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는 줄 알았더니, 행복은 성적순이라는 학창 시절의 비극이 게이들 사이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오늘도 남성 동성애자들의 행복은 이성애자 다움으로, 그리고 남자다운 순으로 결정되고 있다.

 

 

우리를 비극으로 이끄는 ‘남자다움의 야수’에서 탈출할 수 있는가?

 

문란하고 싶지만 성병은 무서워 홍보물

 

이러한 비극이 우릴 덮치고 있다고 글을 끝마치기엔 아직 희망이 있다. 지난 10월 11일 행성인 교육장에서 HIV/AIDS 인권팀이 성교육에 이어 준비한 섹스 토크쇼 <문란하고 싶지만 성병은 무서워>를 진행했다. 토크쇼에 패널로 참가한 나는 예상외로 흘러가 당황함과 초초함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무사히 마쳤다. 토크쇼를 진행하며 내가 가졌던 희망은, 특별한 기준 앞에서 게이들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태도와 인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토크쇼에서의 이야기를 단초 삼아, 게이들을 비극으로 이끄는 그러한 허상에 함부로 넘어가지 않게, 어떤 태도와 생각으로 타인과 섹스를 대해야 하는지를 정리하고자 한다. 물론 주관적인 경험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인지라, 다를 수 있고 어떤 경우엔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까 경고한 ‘우리를 비극으로 이끄는 남자다움의 야수’에서 탈출하는 것임을 알아주셨음 한다. 어떤 방법이든 괜찮으니, 아무리 걸레가 되고 싶다 할지라도, 자신의 몸이 함부로 ‘남자다움’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힘껏 몸부림쳐보자.

 

        

- 주말 쇼핑몰을 가보라, 거기에 진짜 남성이 있나

         

“끼 사절, 남자다운 분만. 마음맞는 분만” 이라는 단어들. 데이팅 어플을 키면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정작 그 표현을 쓴 이들에게 가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정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끼스러운 게 끼스럽고, 남자다운 게 남자다운거고, 마음 가니까 마음 가는 거죠.’ 정도의 동어반복만 있을 뿐이다. 궁금한 건, 끼스러움과 마음 가는 것을 정확히 규정하고, 남자다움의 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을까? 논리적인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보라고만 말하고 싶다. 주말 교외 쇼핑몰에 나가 아내와 함께 걷는 남편들을 보라. 그들이 과연 게이들의 가진 남성다움에 들어맞는 이들인가?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남성으로서 공인받은 그들의 행동거지가, 모두 근육이 빵빵하고, 낮은 목소리에, 진중한가? 끼스러움도 마찬가지다. 모든 끼의 양상이 걸그룹 아이돌의 접신을 받아 춤을 추고, 높은 톤의 기갈 진 목소리로 수렴하는가? 그러한 양상만이 끼스러움의 판단 기준인가? 조금이라도 여성적 측면으로 여겨지는 속성들, 그러니까 계산적인 모습, 특정한 음식과 음악, 향수 취향조차 끼스러움의 속성으로 넣는 걸까? 이러한 행태는 자신만의 경험으로 쌓아 올리고,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준으로, 타인을 규정짓는 것과 같다.

 

정작 게이들 사이에 유통되는 이러한 남자다움은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남자다움과도 다르다. 못생긴 화이트칼라와 잘생긴 블루칼라를 비교할 때, 소위 이 나라의 ‘정상인’들은 고민한다. 그래도 남자라면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화이트칼라라는 속성까지를 남자다움을 판단할 때 고려한다. 소득부터 학벌, 인맥까지 수 많은 축들이 남자다움구축한다. 반면 게이들만의 남자다움은 오직 감각적인 단일한 축에만 의존한다. 주로 수많은 시각과 청각적 이미지로 겹쳐진 형상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이 되었다. 다른 누구도 일그러진 우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지만, 우리들끼리만 공유되는 아름다움은 그런 우상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다른 게이들을 이교도라 여기고 마음껏 힐난하고 차단하는것을 정당화한다.

 

난 이러한 양상이 동성애자를 사랑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혐오 세력의 광신도와 양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감히 주장할 것이다. 내용만 바꿔치기했고 세력이 규합되지 않았을 뿐이지, 동성애가 하고 싶지만 동성애자 앞에서 이성애자적 모습을 찾고, 남자 앞에서 남자다움을 요구한다는 것은 혐오 세력이 우리에게 가한 폭력과 차별이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똑같이 반복된다는 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관계 맺고 환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을 대할 때의 수용과 거절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지 말라는 거다. 그저 끌려서 가까이 했고, 끌리지 않아서 멀어졌을 뿐, 남자다워서 끌렸고, 여자다워서 멀어졌다는 건, 자신만의 왜곡된 우상을 더욱더 일그러지게 만드는 비극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관계를 맺을 때, 우린 인간 한 명, 한 명을 만나는거지, 어떤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와 마주한 이는 남자다움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게이들’이 아니라, 무한한 다름을 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게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당신 내면 속 차별이 돌고 돌아 밖에서 다시 당신을 마주하지 않게 말이다.

 

 

- 사람을 배달시킬 순 없다. 맛집순으로 정렬할 수도 없다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을 때, 특히나 섹스를 할 때, 지금 행복하려고 하는 거지, 주식투자처럼 고난 끝에 희망이 오는 것을 고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돈’을 빌려주거나 갚는 것처럼, 내가 무엇을 했으니, 상대방에게 어떤 걸 받는다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를 수용할 뿐이다. 돈을 못 갚을까봐 무서워 보험에 들고, 보증을 요구하는 것처럼, 데이팅 어플에선 전략적 우위를 위해 자신을 밝히지 않은 채, “무슨 관계 찾으시나요?”, “무슨 성향이세요?”를 타인에게 면접관처럼 질문하고, 어떻게든 앞 순번을 쟁취하고자 눈물 흘리는 게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성공적인 섹스를 배달하려고 욕망의 틀에 맞춰 연기하는 게이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때부터 섹스는 쾌락적 행위가 아니라 보상을 기대하는 노동이 된다. 과거의 나의 행동으로 지배당하고, 미래의 내가 누릴 보상으로 착취당할 때, 지금의 내가 누릴 쾌락은 사라진다. 배달음식처럼 인간과 쾌락을 기다리다 결국엔 다 못 먹고 버리는 음식처럼, 영영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타인은 원래 알수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덕분에 꼴린다. 타인의 위험함이 나의 몸으로 넘어와,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를 이어주는 생각을 꺼버리고 감각을 한계로 몰아세울 때, 그래서 지금의 나만 존재하기 시작할 때, 쾌락은 그때부터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계산적인 태도보단 수용의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의 나는 타협할 여지가 없다. 이미 존재해서 뭘 바꿔 넣고 뺄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업들처럼 마구잡이로 구조조정을 하고, 정부처럼 적자 극복을 위해 긴축재정을 하듯이, 스스로가 그런 회계적 태도를 자신의 몸에게 가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몸조차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항상 당신의 고추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였는가?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없듯, 타인도 바꿀 수 없다. 어떤 댓가 없이 온전히 지금의 나를 위해 요구하던가, 그 어떤 기대 없이 타인에 대한 순전한 호감을 갖던가. 남은 방법은 그 둘 중 하나다. 거절이 나온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거절보다 우리가 만날정도로 가깝지 않았을 뿐이라는 의사표현이라 말하고 싶다. 허리띠 졸라매듯이, 제 살 깎아 먹을 순 없으니까. 이러한 방법이 자신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나의 욕망과 몸을 통제하는 태도라 믿는다.

 

 

마치며

 

마지막으로 토크쇼에서 하고 싶었지만, 시간 부족으로 하지 못한 말들을 올리며 끝맺겠다.

 

“우리에게 섹스는 환상을 이루어주는 수단일 뿐이지, 섹스 자체에 환상을 가지는 순간 비극이 일어나요. 섹스가 무조건 좋을 거라는 허상, 깨끗하고 안전한 섹스가 있을 거란 허상, 섹스가 내 모든 쾌락의 전부일 거라 믿는 허상. 그런 허상들이 만들어낸 환상에서 우린 벗어나야 해요. 왜냐면 섹스는, 나의 통제할 수 없는 욕망, 그러니까 몸에 새겨진 욕망들을 해소하는 수단이기에,. 그래서 섹스에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거에요. 물론 그게 누군가에는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치킨’을 먹을 때 섹스라 하는 것처럼, 미식이 될 수도 있죠.”

 

“결국 섹스가 어떤 목표가 되고,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순간. 섹스의 타락은 시작됩니다. 마치 당근에서 가격 협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품이 되고, 의대 대신 한의대에 진학하는 것처럼 타협할 수 있는 꿈이 되죠. 아예 없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게 소비의 미덕이니까. 그렇게 해서 결국 섹스가 시장에서 가격 흥정하게 되는 상품이 되고, 상대방을 맞춰나가게 되면, 서로 불행해져요. 타인은 바꿀 수 없고, 의 몸도 바꿀 수 없어요. 몸은 거짓말도 못하고, 타협하지도 못해요. 당신을 지배하려는 그라인더의 주가든, 타인의 야수던, 남자다움 등등 모든 것들을 뿌리치고, 그저 당신을 당신답게 하는것에 몰두했으면 하는 바람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