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지하철 역사 안에서 급하게 합류하기로 한 지인을 만났다. 어색함 속에서 인사를 나누고 역사를 나선다. 조금씩 열이 오르는 아스팔트위에 점점이 붙여진 A4용지 이정표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길을 잃을까 싶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둔 약도가 카메라 앨범 안에서 머쓱해졌다.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짧은 길을 걷는 동안 나무에서는 매미우는 소리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설레임과 긴장으로 얘기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도 같았다.

열여덟, 처음으로 무지개를 보러가는 날이었다.

이 날의 행사는 자기소개, ‘친구사이’ 영화관람, 관람후의 담화, 커밍아웃에 관한 간단한 토의로 이루어졌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 자기소개는 신선했다. 나누어진 종이에 남에게 소개‘받고’싶은 항목을 적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학기 초의 연례행사인 ‘번호순대로 자기소개하기’를 끔찍하게 싫어했었던 나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어떤 질문을 할까 고민한다. 그 와중에 사회를 맡은 평인님은 짖궂은 질문을 해도 좋다며 너스레를 떨어 분위기를 풀어낸다. 다들 열심히 질문을 고민하고 또 적는 동안 몇 분의 간격을 두고 들어오는 사람들 덕에 평인님은 했던 설명을 몇 번이고 하시다 결국 마지막엔 지치셨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다 같이 관람한 영화는 ‘친구사이’였다. 김조광수 감독님과 함께 봐서 그런지 괜히 긴장됐었더랬다. 짤막한 상영을 마치고 본 소감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다. 김조광수 감독님은 청소년의 시각으로 본 ‘친구사이’의 감상평을 듣고자 하셨는데, 어색함이 채 풀어지지 못한 상태여서인지 대다수가 말하기를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점은 쉬는 시간이 끝난 후의 커밍아웃에 관한 토의에서도 이어졌다. 시간이 부족한 탓이 컸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때에는 어색함이 조금씩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그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죄송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이 흥분했었는데, 두서없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신 아량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번 놀토반의 상영작이 상영작인데다가, 감독님이 자리하신 만큼 '친구사이'의 영상등급판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넷에서 관련 글을 읽긴 했지만 감독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생생함에 무서웠다.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일은 어쩐지 거리감이 있었지만 바로 내 눈앞에서, 우리들의 인권을 위해 힘든 싸움을 벌이고 계신 감독님이 직접 입을 떼시니 확 와 닿았다고나 할까. 너무 와 닿아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성소수자인 우리가 받는 차별과 편견을 조금이나마 실감했다. 나는 아직 살면서 한번도 포비즘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감독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번 싸움은 져도 이기는 싸움이지만 그래도 역시 승소하셨으면 좋겠다. 힘내시길.

첫사랑이 열다섯이었으니 스스로에 대한 성정체성을 확립한지도 햇수로는 꼭 삼년이다. 짧은 기간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너무 어렸다. 내 주위, 같은 성향의 친구란 단 둘뿐이었고, 그나마 그 아이들과도 소통의 부재를 느꼈다. 햇살같이 반짝거리고 또 그만큼 위태로웠던 그 모든 날들을 묻어둔 채 대구를 떠나 윗 쪽으로 오면서 나는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수도권의 혜택에 눈이 돌아갔다. 너무나도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크고 작은 공연들도 다녀오고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지인들도 차례차례 만났으며, 그간 탐만 내던 행사에도 하나하나 시간 되는대로 참여했다. 개중 하나가 무지개학교 놀토반이었다.

이번 행사로 내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나와 같은 자존감을 얻은 사람은 분명 한둘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행사를 계속해서 이어주시는 동인련에 감사한 마음이 물씬 든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올바른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동인련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길 잃고 헤매는 어린 양들에게 앞으로도 많은 도움 주시길 바란다.

7월31일 무지개학교 놀토반을 마치고 하교하는 모습


문워커 _ 무지개학교 놀토반에 처음으로 참석한 청소년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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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소류
    2010.09.08 20:06 [Edit/Del] [Reply]
    으앗 언니 잘썼다~
  2. 평인
    2010.09.09 23:34 [Edit/Del] [Reply]
    글 잘 읽고갑니다.
    문워커님 글 정말 잘 써주셨는데요 ^^? 하교할 때의 사진도 인상깊네요ㅋ 정말 학생들같아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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