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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가족/비범한가족이야기

혈연가족, 시작과 새로운 시작: 친족 모임이라는 불안공동체, 그 안의 변화

by 행성인 2012. 4. 28.

<비범한 가족이야기>는 언니네트워크, 가족구성권연구모임, 언니네트워크 사진창작기록집단 어떤사진관이 함께 만드는 프로젝트인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http://family-b.tistory.com/)의 일환으로 연재되고 있는 칼럼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와 인터뷰로 꾸며지는 칼럼으로 프로젝트 기획단의 동의를 얻어 웹진 랑에서도 공동 연재합니다. 개제를 허락해주신 비범한 기획단에 감사드립니다. 



김원정(가족구성권연구모임)



‘집안사람들’

 

 나는 유난히 뼈대 있는 가문을 강조하는 집안에서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기 때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절실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하나도 없는 집은 우리 집뿐인지라 엄마가 자주 할머니 눈치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비록 딸내미지만 아버지는 늘 ‘의성김씨 문충공파 16대 후손’임을 잊지 않게 하셨고 우리 가문의 ‘양반됨’을 강조하셨다. 4대를 모시는 제사와 명절 차례를 지내느라 1년에 최소 10번은 큰집에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조카들을 불러 모아 조상의 업적을 설명하시던 큰아버지 말씀은 보충수업이었다. 그렇게 가문의 일원으로 성장하던 나는 초등학교에서 김씨인 급우들의 본을 묻고, 의성김씨를 찾으면 아버지에게 ‘집안사람’인 친구가 있노라 신고까지 했다.


얼마 전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나는 잊었던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 범죄조직 보스까지 경주최씨 충렬공파라는 ‘집안사람’으로 묶어 서로 봐주고 밀어주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최익현(최민식).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을 장면들에 일가 사람을 늘 강조하며 살아온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져 놀라고 또 놀랐다. 1960년대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나온 아버지. 이렇다 할 재산도 없는 아버지에게 ‘집안사람’은 아버지가 닿을 수 없는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루트였다. 자원이라고 해봐야 그리 큰 것도 아니다. 가족이 아플 때 조속히 입원을 알선해 주는 정도의 도움? 그러나 사회안전망이 전무했던 70-80년대 ‘빽’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 아버지에게 가문 네트워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일종의 보험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보다 가까운 친족을 서로 거두며 사는 건 일상이었다. 나름 자가 아파트였던 어릴 적 우리 집엔 여러 사촌 언니 오빠, 이모 삼촌들이 거쳐 갔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지방서 살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사촌들은 아마도 월세 방이라도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던 것 같다. 우리 자매들은 밤새 놀아주는 사촌들과의 동거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지만, 엄마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족공동체 구성원들을 거두는 건 상호적이었다. 엄마는 막내 동생을 낳아 힘들 때 언니를 고모 집에 몇 달 간 맡겨두기도 했고, 방학 때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세 딸을 몽땅 작은 집에 보내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었다.



30년 만의 친족 모임 부활


내가 양반 가문의 일원을 자처했던 어릴 적 에피소드는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럽다. 이 집안에서 각종 의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른 집 새끼들까지 돌보며 살아야했던 엄마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그러나 70년대 고향을 떠나와 핵가족을 꾸린 엄마와 아버지에게 친족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였다. 지금 나와 그 친족들 사이의 거리는 한참 멀지만, 사별한 아버지가 때론 딸들보다 당신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더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걸 보면 아버지에게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변함없는 것 같다.

 

8년 전 결혼을 하면서 나는 더더욱 친척들과 멀어졌다. 그러다 몇 년에 한번 어른들을 뵐 땐 출가한 딸이라는 나의 위치가 새삼 확인되곤 한다. 정씨 집안에 시집갔다 하여 큰아버지는 나를 “정실이”라 부른다. 나는 할머니가 시집간 고모들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고 자란 터라 알지만, 생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을 것 같아 네이버 오픈사전을 인용하여 ‘실이’의 뜻을 풀어보면 “여성이 시집을 가면 시가의 성을 따라 부르는 호칭”으로 “주로 친정에서 사용되는 호칭인데 ‘김실이’ ‘이실이’ ‘강실이’ 이렇게 부른다.”

 

그런 내가 얼마 전 친족 모임에 호출되었다. 아버지 8남매와 그 자식들이 모두 모이니 필히 참석하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럴 때 얼굴 비치는 것 말고 딱히 효도 실천이 없기에 군말 없이 나가기로 했다. 사실 나의 임무는 아버지가 내 조카들을 친척들에게 선보이는 일을 돕는 것, 두 새끼를 이고 지고 온 동생을 보조하는 역할이 요구된 것이다. 30명이 넘는 친척들이 모였고, 그날 모임은 정식으로 발족(?)하여 연중행사로 자리 잡았다. 오는 5월 대규모 친족 모임이 기획되었는데, 이건 내가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왜 이 친족들은 ‘가족’으로 다시 서로를 묶으려는 걸까.



아마도 큰아버지의 병환이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머지않아 형제자매들이 한분 두 분 돌아가시게 되면 이 혈연공동체가 사라질까봐 두려운 게 그 세대 심정이다. 그런데 이 모임이 계속 유지된다면 아버지 세대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그날 남자 사촌들끼리는 평소 연락을 하며 만나고 지내왔다는 걸 알고 놀랬는데, 이 모임은 자연스럽게 중년 남자 사촌 중심의 네트워크가 될 것 같다. 특히 모임의 결성과 기획을 주도하고 비용을 부담한 사촌들은 누가 봐도 사회적 지위가 탄탄한 오빠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남자 사촌들은 거의 참석도 하지 않았다. 우리 세대에 친족공동체는 이렇게 다른 의미로 전환되어야 유지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되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도 잘 기억 못하는데 핏줄이 무슨 소용인가. 그 빈자리를 채워 줄 명분은 아마도 힘과 자원을 가진 사람에 의해 세워질 것이다. 어찌 보면 혈연가족을 유지해 온 실제의 메커니즘도 사실 이것이다.



친족에서 핵가족으로, 다시 새로운 가족으로


며칠 후 연락 담당을 맡은 사촌 오빠에게서 메일이 왔다. 8남매와 자녀, 그 배우자, 손주와 증손까지 무려 130명의 이름과 주소, 연락처가 적힌 주소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름조차 낯선 사촌과 조카들이 수두룩했지만, 이 엑셀 파일에 담긴 흥미로운 정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소만으로도 노년의 고모들을 누가(아들 혹은 딸) 부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집안의 형제자매들이 이룬 각각의 가족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사는 경향도 발견되었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자매들이 어머니와 함께 한 아파트에 살고 있기도 했다. 오늘날 핵가족들이 어떻게 돌봄의 부담을 나누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지도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34명의 사촌들이 엑셀의 <배우자>와 <자녀 1>, <자녀 2> 항목을 대부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빈 칸은 주로 우리 집에 몰려 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나의 언니뿐이고,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는 사람은 나와 최근 결혼한 사촌 둘 뿐이다. 이혼한 사촌은 단 한명도 없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한결같이 ‘정상가족’을 꾸려 사는 집안이라니! 이 가운데 비혼을 선언한 우리 언니는 가히 ‘미친 존재감’이다. 물론 여기 적힌 친척들은 언젠가 언니는 결혼을 하고 나는 아이를 낳으리라 기대하겠지만 말이다.

 


이 친족공동체에서 탄생한 ‘정상가족’들의 분포가 유독 강한 혈통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이성애 핵가족의 규모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내 친족공동체의 강력한 가족 규범 속에서도 ‘다른’ 가족은 싹텄다. 적어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의 조카들에겐 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혈연과 친족관계에 기반을 둔 가족은 멀어지겠지만,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생활공동체가 엑셀에 질서정연하게 담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롭게 구성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