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린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

 



나는 소위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난 신실한 개신교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를 삶의 우선순위로 삼도록 양육되었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며 성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자 나의 (신앙)생활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점점 가학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매일의 기도는 탄식과 눈물로 점철되었고, 나의 존재는 끊임없는 회개 속에 뒤덮였습니다. 나는 온 피조물이 누려야 마땅한 하느님의 은혜와 예수의 사랑을 알고 느끼고 있었음에도 나의 자격조건을 항상 의심했습니다.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동성애자 정체성과 그리스도인 정체성 중 하나를 지워버리기 위한 고통의 과정을 뒤로하고 스스로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육우당, 당신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 지 십 년이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시금 아픈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직도 포용과 이해, 반성은커녕 성 소수자를 터부시하고 죄악시 하는 보수 기독교 세력,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평등하다는 선언적 법률안조차 이해집단의 압력 행사 앞에 파기해 버리는 정치권, 무관심한 시민들과 사회적 통념.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의 스러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큰 산처럼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 모두를 한숨짓게 하고 상처받게 합니다. 그런데 잠시,

 

  나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이 나를 전율하게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직도 내 속에는 당신이 십 년 전 느꼈던 기독교를 향한 애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록 몇 군데 되지는 않더라도 도드라져 보이는 혐오적인 성경 구절들을 다른 시각으로 읽으려 노력하고,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기대해 보려 애쓰지만, 아직도 나는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대신 싸워 주고 힘을 내 준 신앙의 형제자매들을 너무 급진적이거나 반 복음적이지 않을까 회피해 왔습니다. 또한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는 나의 고민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져 왔습니다.


나는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내 안의 갈등을 해결했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손바닥의 기운을 나누지 않을 때 나는 여전히 혼자였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당신을 추모하는 노래를 부르고, 기독인의 입장을 대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나는 그 시점에도 육우당 당신의 죽음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 두려움과 고립감은 나 같은 이들을 반대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의 구원, 그리고 성경의 해석을 독점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들은 결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용납할 자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완전한 자아정체성, 이 불안한 자존감이 내 속에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와 당신을 편 가르는 사이에, 나의 자아는 깊이 아팠습니다.

 

나 또한 청소년으로서 신앙과 성 정체성을 놓고 갈등하던 2003년, 당신이 하느님의 품으로 먼저 돌아간 그 때에 우리에게 남겨 준 성모상과 묵주를 기억합니다. 왜 그것들을 남겼을까요? 당신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횡포에 온 몸을 깨뜨려 저항하면서도, 당신이 신뢰했고 당신을 사랑한 하느님을 향한 기도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로소 보입니다. 당신은 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다시 눈을 감고 무엇이 나를 꿈꾸게 하는지 묵상해 봅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위엔 많은 친구들과 동지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나를 알든 알지 못하든, 그들이 성 소수자이든 그렇지 않든, 내가 동성애자 기독교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기도해 주는 이들이 이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많은 시간동안 염려하고 힘들어 했으면 되었다고, 너는 분명히 있는 모습 그대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힘껏 응원해 줍니다. 나는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했던 다음의 성경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11:6-9)

 

당신은 이미 그 거룩한 산 위에 서 있겠지요. 그 곳이 과연 어떻게 이 땅에도 이루어 질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올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믿음에 기반하여 예수님과 당신과 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죽음으로써 우리 속에 영원한 부활을 이루어 낸 것일 테지요. 육우당 님, 나는 이제 두려움과 죄책감이 아니라 희망으로 기도하며 당신의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당신도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계속 빌어 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때가 다하였을 때, 당신이 있는 곳에서 기쁘게 조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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