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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 - 영화 <망각의 땅>을 보고

by 행성인 2013. 7. 18.


조나단 (웹진기획팀)



지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망각의 땅>을 보았다. <망각의 땅>은 체르노빌 원전 폭발과 그것을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이다. 1986 4 26일은 체르노빌에 살고 있던 안야와 표트르의 결혼식 날이었다. 체르노빌은 노동절을 맞아 곧 놀이공원이 개장될 예정이었고, 리학자인 알렉세이와 어린 아들 발레로는 사과나무를 심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노란빛이 섞인 따뜻한 화면은 대기가 갑자기 검은 소나기가 내리고 물고기, 벌의 떼죽음과 동물들이 불안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시작으로 점차 무채색으로 변한다. 원전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화재를 진압했던 모든 소방관들은 방사선에 노출되어 가족들과 차단된 채 죽는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나와 출동했던 소방관 표트르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 방사능 물체일 뿐’이라는 간호사의 말에 안야는 좌절한다. 그리고 안야, 발레로를 포함한 체르노빌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대피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나흘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혼식 장면


안야의 결혼식 장면


어린 발레로와 아버지 알렉세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이 이곳에 가득하다며 무장을 하고 나타난 헬기의 사람들


그렇게 10년이 지난다. 안야는 고통의 기억을 방문자들에게 들려주며 체르노빌을 안내하는 관광 가이드가 되었다. 그녀가 젊음을 보냈던 고향은 ‘금지구역’이라고 불린다. 방사능 수치 측정기에서 들려오는 ‘삐--삐삐’ 소리가 그 이유를 증명한다. 사실 안야는 결혼 전에 체르노빌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현재 다른 도시에서 살지만 늘 다시 체르노빌로 돌아오게 된다. 2주는 체르노빌 밖에서, 2주는 다시 체르노빌에서 살아가는 안야, 원전에 대한 책임으로 체르노빌에 남아있다. 뇌에 장애가 생겨 정차하지 않는 체르노빌 기차역에 내리기 위해 계속 기차를 타는 알렉세이, 모두가 죽었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 체르노빌을 휘젓는 발레로. 모두 고향과 사람들을 갑자기 잃어버린 상실감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청년이 된 후 체르노빌에 온 발레로


청년이 된 후 체르노빌에 온 발레로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의 과거는 기억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암기한 공식, 단어, 피아노 치는 법, 여러 습관들은 ‘이미지 기억’이 쌓여진 흔적이다. 그렇게 쌓인 ‘습관 기억’은 휘발되어버리지 않고 현재에 함께하며 영향을 미친다. 모든 의식은 기억이다. 즉 현재 속에서의 과거에 대한 보관과 축적이다. 현재는 과거의 무엇을 거듭하여 기억하는가에 따라 변한다. 반대로 기억되지 않은 것은 점차 의식의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게 된다. 망각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망각의 땅>이다. 베르그손의 논리에 따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영화 속 인물들은 기억함을 택한 셈이다. 그들이 그토록 고통 받으며 부유하게 된 까닭은 바로 ‘기억으로부터 분명해지는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망각을 택했다. 잊어야 현재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얀 필름 같은 점막이 몇 겹씩 벗겨졌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

‘폐와 간의 조각이 목구멍으로 타고 올라와 숨을 못 뒤었다.

‘집으로 돌아왔소. 그곳에서 입고 있던 옷을 다 벗고 쓰레기통에 던졌소. 하지만 막내아들이 졸라서 군모를 줬소. 아들은 절대로 벗지않고 매일 쓰고 다녔소. 2년 후 아들은 뇌종양 진단을 받았소.

4월에 내리는 포근한 비. 빗방울이 마치 수은처럼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방사선에 아무 색도 없다고 하지만, 웅덩이는 초록색이나 노란색, 아니면 형광색을 띄고 있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김은혜 역,

새잎, 2011.



체르노빌에서 오는 전기를 사용했지만 피복되지 않은 사람들도 망각해야 죄책감의 무게를 현실에서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전세계에 걸쳐 원자력 발전소 건립이 멈춰지지 않는 까닭 또한 망각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체르노빌이나 일본의 원전사고를 잊어야 여름마다 찾아오는 ‘블랙 아웃’의 위협으로 정당성을 축적하는 원자력 발전소 건립과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에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하지만 잊어야 되는 것. 잊어야 내가 편안할 수 있는 것. 체르노빌로 비유 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얼굴이 그렇게나 굳어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망각은 선택한 것이다. 방향을 만드는 것이 기억이라면, 뇌가 망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그것이 아무리 생존과 미쳐버리지 않을 자유로 불릴 수 있더라도 어떠한 가치판단을 하느냐가 미래에 대한 현재 삶의 방향성과 망각을 좌우한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어떤 역사를 기억하도록 조장하는가의 문제가 되면 더 그러하다.



사고 이후의 체르노빌의 풍경을 그린 『체르노빌의 목소리』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날 감동시킨 건 바로 삶이었다’고 기술한다. 체르노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말이다. 끝까지 체르노빌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 체르노빌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다. 체르노빌에서 사는 삶에 직접적인 가치우위를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체르노빌에 대한 망각이 어떤 미래로를 의미하는지를 짐작해보자는 것이다. 애써 잊지 않는 사람, 아니 기억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지속적으로 관심 갖고 들으며 기억하려는 데에서 나오는 방향성이 이러한 과오를 덜 반복하는 미래로 향하게 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이 무엇을 기억하는가 무엇을 잊는가에 대한 문제는 공동체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어떤 역사를 기억하도록 조장하느냐의 문제로 가면 더더욱 그러하다. 각 개인들이 어떤 기억으로 삶을 채우느냐는 각자의 내적 규범에 따른 문제이지만, 그러한 규범들은 뻗어나가면 그 개인 한 사람에게만 결부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떤 세상이 되길 바라는가에 대한 질문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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