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소수자 차별 혐오/서울시민 인권헌장

오랜 투쟁의 서막: 서울시민인권헌장이 우리에게 각인시킨 것들

by 행성인 2014. 12. 8.

 

웅(동성애자인권연대)


 

 

 

 

11월 28일 최종 결정된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제정과정부터 서울시의 수용 거부와 무산이라는 최악의 수가 나오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겪었다. 하지만 합의 없이 제정되었다는 이유로 헌장이 무용함을 아무렇지 않게 선언하고, 시장이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뒤통수 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사안이 헌장의 존폐여부를 넘어서게 되었다. 아니, 이제 험난한 길이 예고된 건 시민들이다. 시민이 만든 인권헌장을 서울시가 폐기하는 작태는 시민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심의민주주의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심의민주주의 절차를 통해 제정되었다.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숙의민주주의라고도 부른다)는 특정 사안에 대해 개별적인 숙고를 거쳐 구성원의 의견을 조율하여 결과물을 남기는 과정을 수반한다. 스스로 학습하고 대화함으로써 시민주체 자신의 규범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미루어보더라도 숙의는 투표를 통해 시민권을 행사하는 대의제보다 직접적이다. 물론 여기에는 방향타 역할을 하는 전문가그룹도 있다. 허나 이들은 주변에서 기록하고 논의과정을 담당하거나 일반론 수준의 교육을 진행하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숙의는 시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동시에 시민 스스로 주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주인의식만큼 높아지는 것은 책임의 무게이다. 구성원들은 모임 취지를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논의 범주를 정한다. 방향이 제시되지 않은 가운데 방향 자체를 스스로 잡아가고 방향을 잡아갈 방식 자체를 논의해야 한다. 논의가 수렴되지 않을 경우 합의를 할 건지, 표결을 할 건지 아니면 결론을 유보하고 의견대립 자체를 기록하여 추후의 과제로 남겨놓을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저마다 다른 욕구는 결과물을 새기는 과정 자체에 체화된다. 불화와 충돌 속에서는 단어 하나도 허투로 넘길 수 없다. 충돌과 갈등, 검열과 합의과정을 거친 문장은 공동의 목소리, 시민의 목소리가 된다. 서로의 가치와 경험, 욕구와 욕망을 조율하여 문장을 만들고 조율하는 방식 자체를 문장으로 만드는 숙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과정과 형식 자체를 공동의 목적에 합치시키는 일종의 기예이자 집단예술이다.

 

하지만 논의형식으로서 숙의는 정치적 논점이 극렬하게 편을 나누고 집단적인 대립양상을 보일 경우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제정주체인 시민위원을 뽑을 때부터 말이 많았다. 150명의 시민위원을 추첨하는데 1570명이 신청하는 과열의 이면에는 동성애 반대 구호를 내건 단체의 구성원들이 대거 지원할 거라는 예고가, 이에 맞서 성소수자 운동진영에서도 급하게 지원자를 조직해야 했던 내막이 있었다. 시작도 전에 머리수싸움을 치른 셈이다.

 

 

비틀거렸지만 빛나는 결과, 이를 무색케 하는 서울시의 악의적 태도

 

2년의 시간표로 제안되었던 시민인권헌장은 재정 문제를 이유로 올 한 해로 맞춰졌고,  4개월의 시간만 주어진 시민회의는 6차례의 전체회의로 압축되었다. 강남·북에서 이뤄진 두 차례 공청회는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집단적인 훼방과 방해로 파행되었고 '도둑맞았다'. 삐걱대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시민인권헌장의 50개 항은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을 만큼 완성도 있게 제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동성애.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은 헌장이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동성애를 전파하는 것이라는 식의 의도적인 오독을 수행한다.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법조항에 기재되는 건 반대한다', ‘보편적 인권은 중요하지만 동성애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교적 ‘온건한’ 주장부터 '동성애하면 지옥간다'는 종교적 입장, '동성애는 불우한 가정 환경에 기인하고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성병, 우울증과 자살의 원인이지만 치유하고 전환될 수 있다'는 의사-의학적 시나리오에서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범이어서 세금이 들고 군기를 저하시켜 국력을 약화한다'는 거대서사에 이르기까지, 소위 ‘반대논리’의 프리즘은 역설적이게도 왜 성소수자가 차별받아선 안되는지의 당위를 몸소 보여준다. 이미 예정된 충돌의 지리한 공방 끝에 성소수자의 인권은 '안건'으로 치부되었고 결국 표결로 끝을 보자고 합의되었다.

 

인권헌장준비가 파행국면에 접어들 즈음, 사회운동진영 내부에서는 헌장제정을 표결에 부치는데 이견을 품으며 인권에 대한 서울시의 의지가 필요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숙의는 과정 안에서 어떤 의견이 나오더라도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 시민이 주체로 정치에 참여한다는 강점을 갖는 숙의는, 동시에 다수 논리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그대로 노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숙의는 결과의 의의와 한계를 명시하여 추후 지속적인 다시 읽기와 재논의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수정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민주주의의 약점을 결과물 자체에 기입하는 작업은 ‘인권’으로 부르지 못했던 것들을 호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두고,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에 정치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앞에 논한 숙의의 취약함과 정치적 가능성을 타진할 필요도 없이,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명기해야 하는 필요성을 설득하고 공감하며 손을 들어준 시민위원들의 자세는 기대 이상으로 성숙했고 훌륭했다.

 

그렇다면 서울시는? 인권헌장 제정을 주관하는 입장으로선 개입이 불가하다는 자세를 고수하며 이해를 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 세력들이 인권을 부정하고 헌장을 매도하며 공청회를 망치고 시민들을 모독하는 작태에 어떤 대응도 하지 말라는 지침이어서는 안되었다. 서울시는 제 무능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인권에 대한 의지를 의심케 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일, 서울시는 시민위원 부위원장의 의사진행 마이크를 빼앗으며 진행을 방해하고 만장일치의 합의를 요구하며 판을 엎으려 했다. 그리고 그 주 일요일에는 헌장이 무산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뿌려 전술적으로 무력화하기에 이른다. 서울시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다수의 언론에서는 ‘동성애 찬반논란’으로 헌장이 합의되지 않아 무산되었다는 식의 기사를  쏟아내며 사실을 호도했다.

 

'시민이 시장'이라는 박원순 시장의 기치 아래 만들어진 시민회의는 그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채널이자 이상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과를 단칼에 무시해버렸다. 이는 ‘인권변호사 출신 시장’이라는 정치적 기반마저 반하는 행위였다. 헌장이 무산되었다고 공표한 이후 시민사회는 수차례 그에게 만남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그가 정작 시장 직함을 달고 만난 이들은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들이었고, 기어이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시민들이 공들여 제정한 헌장의 향방이 특정 정치인의 판단에 대한 분석과 정치인에 대한 비판으로만 논의되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가슴 아픈 현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는 ‘시민특별시’라는 자신의 비전을 져버렸지만, 헌장의 주체인 시민은 자신의 존엄을 박탈당했다.  그의 언급이 결과적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소고: 오래된 투쟁의 서막


 

12월 6일 박원순시장의 면담과 인권헌장 선포를 요구하는 농성을 시작하면서 무지개농성단이 서울시 신청사에 내건 플랭카드.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

 

 

말 그대로 ‘민관 합작'의 혐오 속에서 시민헌장은 제정과 동시에 폐기처분당했다. 하지만 선전포고는 계속되고 계속될 것이다. 퀴어퍼레이드부터 인권헌장 제정과정까지 이웃집 권사님, 옆집 아저씨같은 이들의 집단적인 욕지거리를 마주하고 치러낸 백병전은 충격과 두려움을 남겼다. 한동안 입안에 ‘혐오’가 걸리며 그들의 얼굴이 스칠 것이다. 우리는 저들의 '종속변수'이고, '구원'을 위한 제물이자, ‘도덕’을 입증하기 위한 방패막이였기에. 하지만 저들이 비난하는 동성애 뒤에는 비정규직과 이주민이,  세월호와 용산참사가 있음을, 경비노동자와 청소노동자가,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와 숨결이 은폐 되어 있음을 모르는 이는 별로 없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분석을 찾고 답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황 속 불평등한 제도가 개개인으로 하여금 불안을 증오로 만들고, 나의 빈곤을 타인에 대한 혐오로 투사시킨다는 논평들은 이제 분석의 틀거리를 거치지 않고도 외울 수 있는 익숙한 문장이 되었다. 동성애혐오세력의 믿음은 동성애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나 증거자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의심쩍고 거짓된 자료일지라도 믿음으로써 ‘진실’을 만들어내는 ‘믿음의 의지’는 불안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지, 이데올로기가 불안을 어떻게 활용하고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넘치는 분석만큼 저들은 우리에게 가까워졌지만 너무도 먼 적이자, ‘이웃’(...)이다.

 

헌장은 저들과 함께 살아나가고 살아내는데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헌장을 만들어내기까지 나는 저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야할까. 아니, 이야기하는 데 있어 헌장은 어떤 역할을 하고 무엇을 보장할 것인가. 조례 만큼도 구속력이 없다는 일개 헌장이 뭐기에 이렇게 목을 맬까 싶다가도, 일견 하찮아보이는 문서가 불완전하게나마 나를 공적 언어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장치라는, 공적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빵이라는 생각을 하면 태도를 고치게 된다. 무엇보다 인권헌장은 성소수자의 존재를 반대하고 낯설어했던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설득해가며 함께 만들어낸 소중한 경험이자 그 결과였다.

 

보편이 '선택'이 되고 인권이 '안건'으로 전락했던 표결방식의 선택은 결론적으로 서울시의 일방적인 개입에 '항의하는' 주체적 행위이자 차선책이 되었다. 헌장을 볼모 삼아 불안과 혐오를 저울질하고, 정치적 판단에 자신의 기치를 폐기처분하는 일개 행정관료수장의, 일개 정치인의 주도면밀한 무책임과 악의적인 한 방이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무언가’를 밟았다는 생각에 사무치는 요즘은 분노 너머 슬픔이 일상의 대기를 누른다. 다만 그에 대한 ‘정치적 희망’이라는 일말의 미련과 묵은 때를 눈물로 벗기고 나니 시야가 명석해진 기분이 든다.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말이 단지 성소수자들에게만 각인된다 할 수 있을까. 인권헌장을 폐기한다는 것은 그가 쌓아온 인권변호사로서의 축적된 시간을, 그가 누차 이야기해온 정치적 가치들을, 무엇보다 서울시민을 삭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가 바라 마지 않았지만 용도폐기된 심의민주주의는, 시민의 눈은 이제 다시금 숙의를 통해 그를 겨누고 삭제된 존재를 부르짖는 행동이 될 것이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이든, ‘큰 정치를 위한 타협’이든 간에 동성애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굳이 이해하면서까지 나와 당신, 시민주체를 소위 거시적인 ‘진보정치’의 한 수와 타협하여 맞바꾸고 싶지 않다. 아니, 사람의 존재를 수놀림으로 치환하여 탈락시키는 데 망설임이 없는 정치는 진보라고 칭할 가치가 없으며 정치라고 부를 필요조차 없다. 슬픔은 이제 체념과 냉소 기저에 있는 또 다른 슬픔에 손을 내민다. 맞잡은 손이 혐오를 이겨낼 수 있기를, 우리의 연대가 슬픔으로만 남지 않고 헌장 위에서, 헌장 너머 새로운 목소리들을 직조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