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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먹고 사는 게 혁명이다!" - 퀴어반찬모임의 조용한 혁명

by 행성인 2015. 5. 10.


수환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원래는 잘 먹고 살았다. 고등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대가족 속에서 살았다. 엄마는 음식을 잘 했고, 육류, 채소, 해산물이 다양하게 들어간 밥상이 매일 차려졌다. 우리 집에서도 김치를 담갔고, 가끔 외할머니가 달래김치와 파김치를 보내주기도 했다. 밥만 먹어도 건강해지는 밥상. 참 좋았다.

대학을 집에서 먼 곳에서 다니게 되면서 혼자 살게 됐다. 학교 밥이 싸고 맛있어서(정말로 맛있는 편이었다) 점심과 저녁은 거의 학교에서 해결했고, 가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집 앞 밥집에서 4천원에서 5천원 정도 내고 사 먹었다. 밥을 직접 해 먹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집에서 밥을 해 먹으려면 이것저것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월세 내고 사는 단칸방이 워낙 좁아서 그것들을 다 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니 일주일에 집에서 밥 먹는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밥도 반찬도 남아서 버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애초에 내 방에는 밥솥도 밥그릇도 없었다. 그게 편했다.

문제는 학교를 그만두면서부터 시작됐다. 집 앞 밥집의 밥값은 가끔 사 먹을 땐 괜찮았지만 매일 먹기는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그 즈음 친한 레즈비언의 집에서 명절을 함께 보내게 되었는데, 혼자 사는데도 집에서 밥을 참 잘 해먹고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 받아 나도 밥솥을 살 결심을 했다. 이제까지 음식을 만들어본 적이 없어서 쉬운 것부터 하기 시작했다. 된장찌개, 어묵 볶음, 시금치 나물, 이것저것 해 먹었는데 혼자 먹는 밥이라 한 번에 많이 만들 수도 없고 여러 종류를 만들 수도 없었다. 만든 반찬이 남아서 버리는 것 뿐 아니라 재료를 다 쓰지 못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채소 한 단은 항상 남았다. 양파나 파 같은 건 작게 잘라서 팔기도 했는데, 무는 1/4정도만 필요한데도 하나를 다 살 수가 없었다. 작은 냉장고에 남은 무를 넣어둘 곳은 없었다.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밥을 해 먹으면서 답답하고 짜증나는 날이 많아졌다. 난 그저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기본적인 일을 하면서조차 내 삶에 대해 생각해야하는 날이 많았다. 
내 밥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내가 엄마가 해주는 밥상을 차릴 순 없겠지만, 노력해도 그런 밥상은 차릴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혼자 살지?’, ‘왜 내 방 냉장고는 이렇게 작지?’ 같은 고민들이 이어졌다. 너무 민감한가? 생각해봤는데 분명 연관이 있었다. 


얼마 전엔 몸이 아파서 일주일 정도 계속 죽을 사 먹었다. 죽집에서 포장해 온 죽을 먹으면서 반찬으로 주는 물김치를 먹다가, 물김치를 정말 오랜만에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을 때는 배추김치 무김치 파김치 깍두기 백김치 물김치 달래김치 종류도 다양하게 많이도 먹었는데 혼자 사니까 마트에서 파는 배추김치 하나밖엔 못 먹고 살고 있었다. 불현듯 나는 분노했다. 먹는 즐거움이 인생에서 참 큰 것인데 나는 그것을 다 놓치고 있구나!

곰곰 생각해보니 내 성소수자 친구 중엔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 많았다. 혼자 살고 돈은 없지만 밥은 사 먹는 사람들. 혼자 먹기엔 재료가 남는 게 너무 많아서 해 먹지 못하는 반찬들을 함께 만들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퀴어반찬모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을 모두 규합하여 한날한시(4월 26일)에 민중의 집에서 첫 모임을 도모했다. 첫 모임이다보니 야심차게 여섯 가지의 반찬을 만들었는데… 힘들었다.



재료들. 사는 것도 힘들었다.



달래김치메추리알 장조림멸치볶음


감자볶음버섯볶음단체샷!



사실은 이 모임이 반찬을 만들어서 가져가는 것 이상의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만드는 반찬을 선정하는 기준부터 많이 고민하고, 음식과 재료에 대한 공부, 더 나아가서는 살림살이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이번 모임에선 음식을 만들고나니 다들 너무 지쳐버려서(가사노동이 힘든 노동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여력이 없었지만, 다음 모임 때는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쉬운 성소수자들이 엄마에게 전화할 수 없어도 음식을 잘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모임이 된다면 좋겠다.



<”반찬 선정 기준”으로 생각했던 것들>
    - 재료가 남는 게 두려워서 잘 만들지 않는 반찬
    - 밑반찬 위주: 다음 반찬 모임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 밑반찬 아닌 반찬도..
    - 맛있는 반찬
    - 제철 재료 (네이버 제철음식 참고)
    - 비싸지 않은 재료
    - 건강한 반찬
    - 심하게 건강하진 않은 반찬
    -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반찬(채식, 알러지 등)
    - 냉동 가능한 반찬?



감자가 남아서 만들어 먹은 수제 감자튀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