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성(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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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3일 0시 / 노량진, 서울

“편의점 알바가 이제야 끝났다. 내 나이는 서른 셋, 졸업하고 난 뒤 다섯 번째 알바를 하며 최저 임금을 받고 있다. 하지만 노량진은 고시촌이라 강남에서 일할 때보단 확실히 돈이 굳는다. 역시 알바는 물가 싼 동네가 갑이다. 주변에서 가끔 언제 취직하냐고 하지만, 난 이제 그런 소리엔 무덤덤하다. 그냥 편의점 알바도 괜찮은 것 같다. 친구들도 다 알바생인데 뭐.

일하는 사이 친구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다음주 토요일에 H2O 엔터테인먼트에서 하는 큰 파티가 있는데, 같이 가자는 연락이었다. 이번에 H2O에서 작정하고 준비해서 섹시 고고보이들도 역대급으로 나올 거라나 뭐라나. 그냥 너나 가라고 했다. 난 토요일에도 편의점에서 12시간을 일하고 나면 파티 같은 거 갈 힘 없다. 노량진에 겨우 마련한 고시원에서 꿀잠 자야지. 거기 티켓 살 돈도 없고”

2024년 6월 23일 0시 / H2O 엔터테인먼트, 서울

“많은 생각에 잠긴다. 드디어 다음 주면 내가 H2O 엔터테인먼트를 세운 뒤에 첫 자체 기획 파티를 연다. 특히 이번엔 우리 H2O가 직접 키운 고고보이들이 무대를 장식하게 된다. 혐오 세력들이 '호모 포주'라고 그렇게 욕해대도 오로지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손으로 커뮤니티 스타를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태산이다. 최근래에 들어 퍼레이드 참가 인원이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이 조직위에 있는 친구로부터 들려왔다. 지금 우리 파티의 예매 현황도 내 기대보다는 그닥이다. 학창 시절 같이 인권 운동을 하다 종로에 바를 개업한 친구 역시 최근 들어 매출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늘었다. 젊은 친구들의 티켓 예매가 부진하다. 옛날에 같이 이태원을 빛냈던 내 나이 또래들은 테이블 예약도 많은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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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상한 세월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일간지에서 '달관 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조어, 곱씹어 보면 좀 이상합니다.

그 일간지에서는 몇 년째 알바를 전전해도, 심지어 일을 안 해도 행복한 젊은층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소위 '금수저'라 불리는 거액 자산가들의 자녀들도 아니라는 겁니다. 대단합니다. 숨만 쉬어도 돈 들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것 같은 한국에서 돈 한 푼 없이도 행복하다니요.

인터뷰 속 그들은 한 달에 60만원, 한 달에 100만원만 가지고도 무려 그 물가 비싼 한국의 대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속세를 떠나 자연과 함께하니 부는 무엇이며 명예는 또 무엇인고' 하는 도인의 기운마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인터뷰에서는 그들 개개인의 이야기들만 존재할 뿐, 그들이 왜 일을 하는데도 한 달에 60만원, 100만원 밖에 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성찰은 없습니다.

'달관 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든 이 일간지, 한국 보수의 정론지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간지는 이 인터뷰들을 통해 무언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적게 받고도 행복한 청년들이 이렇게 많은데, 최저 임금 인상이다 고용 안정이다 주장하는 일부 청년들, 이 얼마나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인가!”라고.

많은 성소수자 청년들에게도 취업난은 냉혹합니다. 파티에서 보는 섹시 고고보이들의 몸매는 냉혹하진 않지만, 문제는 그들의 현실은 섹시 고고보이들의 몸매가 아니라는 것이죠. 설사 어렵게 취업한다고 해도, 취업한 곳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회사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이 아닌 한 그들은 용머리만한 야근에 시달리던지, 아니면 쥐꼬리만한 월급에 시달립니다. 그나마 용머리 야근이나 쥐꼬리 월급만 해도 다행이죠. 어찌됐든 최소한 법적인 보호는 받을 수 있는 ‘정규직’으로 취업했으니 말입니다.

스스로를 ‘보수 정론지’라고 자처하는, ‘달관 세대'라는 말을 만든 그들은 바로 이 '용머리 야근과 쥐꼬리 월급'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해도 행복한 사람이 많으니, 근무 시간과 급여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라는 은근한 메시지와 함께 말이죠. 더 나아가 그들은 취업에 성공한 이들이 ‘정규직’이라는 것에 ‘달관 세대’라는 말로 꼬투리를 잡으며 “최저 임금 알바생도 행복한 사람이 많은데, 이기적인 정규직들 월급과 복지가 너무 과도하지 않은가!”라는 신호도 사회에 퍼뜨려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최저 임금이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면, 그리고 최저 임금을 받아도 고용 안정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정규직이라면, 월급이 조금 적다고 해도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최저 임금은 충분할까요? 한국의 최저 임금은 여전히 5달러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5,580원. 올해처럼 매년 7.2%씩 인상된다고 해도 2020년에 일본의 최저 임금을 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면, 한국의 1인당 실질 GDP는 큰 변고가 없는 한 2020년에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죠.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 역시 최근에 들어서는 그 증가세가 주춤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웃소싱 정규직’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불안정 노동 하에 처한 노동자들의 숫자는 여전히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종로와 이태원에서, 아니면 화려한 퍼레이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는 감추어진 성소수자 청년들이 있습니다. 최저 임금을 받는, 그리고 대부분 장시간, 또는 격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나 알바, 아웃소싱 정규직 노동자인 이들에게 ‘정체성’은 어쩌면 너무도 사치스러운 고민일지도 모르죠. 당장 알바비가 급한데, 정체성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닐테니 말입니다.

'달관 세대'라는 말의 무시무시한 파괴력, 바로 이겁니다. 저임금, 장시간의 불안정 노동(비정규직, 알바, 아웃소싱 정규직 등)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일에 치여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손을 놓고 체념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죠. 성 소수자에게 중요한 ‘정체성’도 '달관 세대'라는 말의 힘 앞에서는 그저 체념해버릴 수 있는 사소한 것들 중 하나로 전락해버리는 겁니다.

성소수자의 권리 증진에 있어서 '가시화'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한 일간지의 '달관 세대' 신조어와 함께 '정체성이 자신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성소수자 청년들이, '당장 내일 알바비가 급한데 내 정체성 따위'를 말하는 성소수자 청년들이 늘어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요? '달관 세대'라는 말이 장악한 2024년의 노량진 편의점 알바생 게이는 과연 H2O 엔터테인먼트의 서킷 파티에, 그리고 2025년의 게이 퍼레이드에 나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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