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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겨울의 파란만장한 겨울

by 행성인 2015. 12. 10.

겨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얘 남자랑 섹스도 해 봤어. 바이섹슈얼이라고 했고, 여자랑 섹스도 했고." 내 삶이 무너지는 순간은 짧았다. 저 문장이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타고 지나갔다. 아빠와 동생(동생에게는 커밍아웃 했지만)앞에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힘들게 말한 것을 단순한 문장 하나로 파괴해버리다니, 내가 아빠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전에 투신자살 해야지, 그러면 얼마나 걸리려나, 자살 직전에 잡혀서 더 맞진 않을까, 집에서 쫓겨나진 않을까, 생존을 위해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우리 부모님은 좋은 사람들이다. 엄마는 내가 집에 있을 때면 삼시세끼 밥을 꼬박꼬박 해주시고, 방 청소도 해주시고, 나갔다 온 사이에 옷장을 정리해놓으시기도 한다. 아빠도 좋은 사람이다. 밖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 오면서도 우리하고 잘 놀아주시고 같이 토론도 하시고. 하지만 아웃팅을 당했을 때 부모님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마에게 커밍아웃한 건 내가 굉장히 힘들었을 때, 엄마에게 지금 너의 상황을 좀 털어놓는 게 좋지 않냐는 지인의 제안에서였다. 나는 두려움에 울면서 말을 했고, 엄마는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왜 너는 안좋은 말밖에 하는 게 없냐"라고 말하셨다. 다음날 엄마는 "이건 그저 하나의 과정이 아니겠니, 더 깊게 생각해봐라"라고 쓴 편지를 줬고, 난 그걸 읽은 후 엄마에게 굉장히 화를 냈다. 나도, 엄마도 잘못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곤조곤 얘기하고 설득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언젠가 엄마도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나오지 않았을까 이런 기쁜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게 말 한방에 부서져버렸다.
 
엄마를 설득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분명 노력하면 엄마도 변화할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날 때 부모를 신뢰하면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기에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런데 나는 성장과정에서 점점 더 엄마를 불신하게 되었고, 이번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엄마가 건넌 셈이다.
 
다행히도 내가 걱정한 일련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를 보고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 당시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그 직후의 기억이 흐릿한데, 대화의 결은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빠 역시 "네가 성소수자인 건 확실하지 않아"라고 하셨지만, 그 후에 아빠는 나에게 훨씬 더 용기가 되는 말을 하셨다. 그건 바로 "네가 성소수자라면 그것은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서도 물론 "그러니까 아니길 바란다"는 저의를 읽을 수 있고, 내 정체성을 부정하는 의미도 갖고있기에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은, 적어도 나에겐 아빠와 대화의 여지가 있는 것, 그리고 어쩌면 아빠도 언젠가 성소수자 부모모임에 나와 함께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나마 행복한 결말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 아웃팅, 그것도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명인 부모의 아웃팅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엄마와 나는 서로 끊어진 신뢰의 고리를 주섬주섬 챙기고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날 배척하지 않은 동생과 우리 아빠한테 다시 한 번 더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