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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성소수자 인권포럼

[제 9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페미니스트 인더 미러, 혐오를 허하라? :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by 행성인 2017. 3. 16.

조나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페미니스트 인더 미러, 혐오를 허하라? :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사회 더지 (언니네트워크)
발제1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 더지 (언니네트워크)
발제2 페미니스트 역사/철학에서의 ‘트랜스’ 쟁점 – 수엉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발제3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퀴어페미니즘 – 나기 (언니네트워크)

 

지난 달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던 성소수자 인권포럼 토요일 1-1 섹션은 <페미니스트 인 더 미러, 혐오를 허하라? :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였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토론회는 2016년 인권포럼에서 다루었던, 메갈리아 사이트 내의 ‘게이논쟁’에 대한 토론 섹션인 <게이 인 더 미러, 우리 안의 여성 혐오>의 연장선상에 있다. 메갈리아에 이어 워마드 카페에서 이루어진 ‘게이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일련의 태도 (‘게이아웃팅 프로젝트’나 가입 시 ‘크로스드레서는 정신병’을 입력해야 하는 것 등)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입장을 취하면 좋을지를 고민한 발제자들의 발제를 참고로 함께 토론하는 자리였다.

 

작년 인권 포럼 <게이 인더 미러, 우리 안의 여성 혐오>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2016 LGBTI 인권포럼] 메갈리아와 게이 안의 여성 혐오를 보면 좋을 것이다.
http://lgbtpride.tistory.com/1169

 

 

첫 번째 발제는 언니 네트워크 더지 님의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과 트랜스포비아> 였다. 이 발제에서는 워마드 내에서의 ‘게이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분석했다. 이러한 ‘워마드’ 식 페미니즘을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나 ‘혐오’라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더지님은 이 발제에서 워마드의 일련의 태도가 극소수 페미니스트 그룹의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면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과의 동학이 있다는 전제 아래 워마드 입장과 태도를 조망했다.

 

‘차이’를 강조하며 민감성을 가지는 것은 여성주의에서 중요한 과제여 왔다. 한국 내 2000년대 여성운동을 ‘차이의 여성주의’라고 부를 만큼 말이다. 급진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남성의 크로스드레싱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1990년대를 시작으로 활성화된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의 흐름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새터나 엠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남성의 여장(여자인 척을 하다가 다리 털을 밀거나 고추를 만지는 등의 행동을 했었다) 을 문제시 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을 가짜 여성이라 비꼬는 여장의 내용과 여성을 손쉽게 희롱하고자 여성 대역을 등장시키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워마드식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범주 이외의 억압적 맥락들을 의도적으로/전략적으로 삭제한다. 첫째로 여성으로서의 단일한 입장성을 만들기 위함이며 둘째로 게이, 비수술 트렌스젠더 여성, 크로스드레서가 수행하는 여성성이 남성의 시선에서 대상화된 여성을 재현하고 강화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워마드 내, 외부적으로 다양하게 기능한다. 내부적으로는 ‘게이,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에 대한 비하적 농담을 통해 공동체성을 확인하는데 기능하며, 외부적으로는 ‘남자라고 다 같지는 않다’는 입장의 많은 남성들을 페미니즘으로 끌어들이는데 (규범화 되어 신경써야 할 것으로 페미니즘을 여기도록) 기능한다.

 

이 중 워마드 식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여성 범주 이외의 억압적 맥락을 삭제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두 번째 이유이자, 워마드의 태도를 단순히 ‘혐오’라고만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인, 여성성/남성성을 둘러싼 젠더-위반 vs 여성-대상화 관점간의 경합에 대해 더지님은 돌파하기 쉽지 않은 부분임을 고백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오로지 젠더트러블은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인가? 여성의 여성성과 남성의 여성성, 반대로 여성의 남성성과 남성의 남성성이라는 것이 위험한 상관관계가 있는가? (예컨대, 게이의 여성성과 여성의 여성성이 관계가 있는가, 레즈비언 섹스에서의 ‘딜도’사용이 남성성의 재현이자 이성애 관계의 모방이기 때문에 문제인가, 부치나 트랜스젠더 남성이 남성성을 ‘택했다’는 것이 여성을 배반하는 증거로 읽혀야 하는가) 이 쟁점을 돌파하기 위해, 이어지는 발제를 통해 토론회에 모인 사람들이 그 돌파를 위한 자원을 획득하길 바라며 마무리 했다.

 

 

 

두번째 발제는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에서 활동하는 ‘수엉’님의 <페미니스트 역사/철학에서의 ‘트랜스’ 쟁점> 이었다. 수엉님은 벳쳐의 주장을 인용함으로서 먼저 일련의 워마드 태도를 단순히 트랜스포비아적이라고 감별하며 대응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수엉님이 인용한 ‘벳쳐’는 트랜스포비아에 대해, 트랜스포비아가 트랜스라는 이유로 트랜스에게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모든 것이라고 우선적으로 정의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트랜스’라는 단어가 해석에 열려 있는 만큼 트랜스포비아라는 말 역시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음에 주목한 사람이다. 이 열려있음이란, 트랜스포비아에게 있는 합리성의 토대 (시스젠더주의 등)를 이해하거나 다른 권력의 작동 (성차별주의, 계급 등)과 교차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페미니즘에서 트랜스포비아라 불릴만한 현상이 나타났다면, 그것이 어떠한 맥락에서 그러한 형식을 띄게 되었는지, 어떠한 논리와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논리와 합리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엉님은 역사 속에서 ‘트랜스’가 어떻게 쟁점화 되었는지 예시를 든다. 70년대 트랜스섹슈얼 레즈비언인 베스 엘리엇이 레즈비언 단체인 빌리티스의 딸들에서 축출된 사건과 레즈비언 레코드회사인 올리비아 레코드 집단에서 음향기사로 일하던 샌디 스톤이 반트랜스섹슈얼 캠페인의 타겟이 되어 자진해서 회사를 떠나게 된 사건을 예로 들었다. 이 때 이들을 공격한 페미니즘 집단의 논리는 ‘여성 경험’의 부재였다.

 

페미니즘의 트랜스젠더 공격은 한국에서 하리수씨가 데뷔했을 때도 이루어졌다. 소수의 페미니스트들이 하리수씨에 대해 소수자인 그녀 자신이 소수자의 억압자로 기능함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여자보다 더 여자같은’ 이란 수식어로 활동한 하리수씨의 여성성이 특정 종류의 여성성에 대한 일종의 명령어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통해 살펴본 페미니즘 내에서 트랜스 포비아가 발현되는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 논리는 이런 것이다.

 

1. 여성경험의 부재, 여성으로서의 공통경험인 젠더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이
2. 젠더 역할 강화,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
3. 여성만의 공간에 침입한 남성 강간범, 여성 커뮤니티의 파괴자
4. 여성에게는 원본이라는 자부심을 줌

 

즉, 다른 집단이나 대중적인 트랜스포비아와 구별되게 페미니즘에서 나타나는 트랜스포비아의 기저에는 ‘여성운동의 주체, 의제, 전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범주 만들기와 경계 분쟁이 작동하고 있음을 우엉님은 말한다. 이는 무엇이 여성 경험이고, 누가 여성이며, 누가 페미니즘의 주체이고, 무엇이 페미니즘 운동인가를 둘러싼 경합이라는 것이다. 이는 워마드처럼 노골적인 언어화 된 흐름 외에도 <내 자궁은 나의 것>, <자궁이 없는 자 말하지 말라> 와 같은 트랜스포빅한지 애매한 구호에서도 나타난다. 페미니즘에서 여성 주체를 단일한 주체로 상상하고 단일한 주체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상상되는 단일한 ‘여성 경험’에 기반하여 젠더 지형을 파악하고 운동하는 것은 대개 트랜스 배제적인 효과를 지니는데 이에 대해 트랜스 포비아냐 아니냐라는 프레임으로는 충분히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때문에 중요한 것은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복합적인 젠더 작동과 젠더 폭력을 분류, 단순화하거나 분리된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교차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수엉님은 말한다. 서로의 영토를 설정하고 경계 짓고, 의제와 주체를 나누는 일은 상호 연대와 상호 이해를 막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이어받아 다음 발제자인 언니네트워크 나기님은 트랜스페미니스트 혹은 퀴어 페미니스트의 입장에서 어떻게 다른 언어 체계와 움직임을 만들어낼 것인지 고민하여 그 과정이 상호

이해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퀴어페미니즘> 발제문

을 발표했다.

 

경계를 세우지 않는 페미니즘은 없고, 나기님이 활동하는 언니네트워크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

여성됨의 경험을 드러내는 목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하기 위해 생물학적 남성에게 경계 세우기 전략을 구사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경계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기 님은 워마드식 분리주의를 구사하는 페미니즘은 이원-젠더, 이원-섹스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오히려 공고히 하기에 여성혐오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화장실 문제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이 ‘자궁’이 있기에 동질적으로 여기는 시스젠더 사이에서도 이미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판섹슈얼’ 등으로 인해 동질적이지 않다고 밝힌다. 부치가 들어왔을 때, ‘어머 잘못들어오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말하며 시스젠더 여성들이 동질적이지 않는 경험을 하는 공간인 여성 화장실만 보아도, 트랜스젠더가 들어오는 그 순간만 동질성이 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성이라는 것을 단일한 주체로 상상하지 않게끔 하는 하는 것이 퀴어 페미니즘이며 이를 통해 경계를 세우고 싸우며 서로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발제를 마치고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질문은 어떤 사람을 트랜스포비아라고 정의 하는 것과 트랜스포비아냐 아니냐라는 구분이 이 논의에 생산적이지 않다고 수엉님이 주장하셨는데, 그렇다면 트랜스포빅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그것과 별개의 문제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수엉님은 당연히 별개의 문제는 아닌데, 의도적으로 분리한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누군가가 트랜스포비아다 라는 것과 그 행동이 트랜스포빅하다는 것이 굉장히 분리가 안된 채 이야기 되고 있고 그런 성급한 판단이 이루어지면 판’단 정지’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서 일부러 분리시킨 측면이 있다고 말이다. 사실 다를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고, 분리가 안될 수도 있으나 판단 정지하는 습관만큼은 다시 생각해보자고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거듭 밝혔다. 

 

또 다른 인상적인 이야기는 이번 워마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기존 있던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여성들을 모두 강등시킨 사건을 통해, TG 카페 내에서 여성들에 대해 맺어왔던 관계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커뮤니티 지형을 어떻게 달라지게 할지에 대해 계속 트래킹 할 필요가 있겠다는 제안을 토론 참가자가 하기도 했다.

 

뜨거운 감자의 이슈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의 언어로 선고민한 좋은 발제를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판단 정지의 우를 범하지 말자는 수엉님의 제안에 깊은 공감을 했고, 그러한 태도는 다른 모든 운동에 있어서도 더 입체적인 고민을 할 수 있어서 보다 세심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