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편집자 주: 행성인 초창기부터 행성인의 반석을 갈고 닦은,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은 현재 동성 배우자와 함께 필리핀에서 이민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행성인의 20주년을 축하하며,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은 자수와 손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사진 1> 여기동님이 보내온 손편지
안녕하세요. 여기동입니다. 이제 이번 달이면 이민 생활 11개월 차이니 곧 1년이 되어갑니다. 지난주에 유튜브로 혼자 공부하는 따갈로그어 69강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한국인에게 (반대로 필리핀 사람에게도) 따갈어는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어순이 우리 말과 완전 반대이고 문장이 동사나 형용사부터 시작합니다. 새로 이사가는 고향 마을은 세부를 중심으로 하는 비사야어입니다 ㅠㅠ
올해가 행성인 20주년, 강산이 두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 행성인을 만난 건 한겨레 광고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동성애』란 세미나를 보고 참여했던 때였습니다. (아마도 1998년?)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런 세미나나 활동이 없었던지라 목말라 있었나 봅니다.
이후 이라크 전쟁 반대, FTA 투쟁 등을 통해 레인보우 깃발을 들고 함께하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간호사로서 관심 있던 성소수자 건강증진 프로젝트는 비록 작지만,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후 전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동성결혼과 배우자 권리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더 빡세게 투쟁하게 된 듯합니다.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상담, 인권 캠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렜던 여름 캠프들에서 회원들을 만나는 건 기쁜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행성인과 함께한 시간은 이렇듯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벗이 선물해준 자수세트로 행성인 20주년 기념 축하 수를 놓았습니다. 왕초보라 기초 자수법을 연습하고 디자인해서 어제 드디어 완성하였습니다. 밤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행성인을 기억하며 한 땀, 한 땀 놓았는데, 예뻐요.
<사진 2> 여기동님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수놓은 행성인 20주년 축하 자수
이 편지를 쓰며 다시 한번 행성인을 정의해봅니다.
행성인은 나에게 은혜의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듯 저도 그랬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친정 식구가 짱입니다.
행성인은 나에게 학교였습니다.
함께 토론, 학습하며 Rainbow-Braining 화 되었지요. 이는 저의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에서 분노하고 투쟁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으며 실천을 가르쳐 준 좋은 학교였습니다.
행성인을 통해 이주민 노동자들을 만났고, HIV/AIDS 투쟁, 장기파업 노조 동지들, 그리고 장애인과 같은 다른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만날 수 있게 소개해주었지요. 행성인은 나에게 연대체(Solidarity)였습니다.
행성인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런 행성인과 함께한 저는 행운입니다. 그리고 저의 결혼식을 준비해주고 참여해줘서 저희 부부에겐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왕언니의 결혼을 축하하며 http://lgbtpride.tistory.com/1005 ) 정말로 고마워요!
<사진3> - 여기동 & 찰스 까야사 부부 - 필리핀 마닐라에서
최근 행성인의 투쟁을 보면서 대선후보들의 만행(?)을 보며 차별금지법과 동성결혼(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내일보다 오늘이 더 중요하고, 나의 존재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은 사회적 범죄입니다. 성소수자 역사가 가르쳐주었듯이, 행동하는 성소수자가 자유와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너무 멀어서 자주 못가는 게 아쉽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저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행성인을 응원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고 또 만나요.
필리핀 사는 여기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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