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하(전남대 성소수자모임 라잇온미 / 전국퀴어모여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낸 경험이 얼마 없어서 떨립니다. 제가 말을 꺼내기로 약속한 이곳이 광주고, 퀴어라이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데다, 당사자로서 나서게 되니 더 무서운 걸지도 모르겠어요. 공개된 행사이니만큼 발언자가 맞닥뜨릴 부침이 저절로 연상돼서요. 메릴 스트립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올해 성소수자 인권단체 HRC에서 메릴 스트립은 수상 소감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퀴어 이슈를 연단에 서서 말하는 건 내 삶과 신념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너무나 힘든 일이다. 맞서 싸우기가 힘들고 겁난다. 나는 그냥 집에나 있고 싶다.” 최근에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 영상을 다시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메릴 스트립도 두려움을 말하는데, 내가 부담을 안는 건 당연한 것이겠지요.
최근 들어 비수도권지역에서 퀴어 행사가 많이 보여서 기쁩니다. 오늘 행사에 참여하신 비수도권 분들은 이 기분에 공감하실 거예요. 지방이 갖고 있는 애환을 아실 거고요. SNS를 통해서 퀴어 행사나 세미나가 있단 정보를 습득했는데 장소를 보니까 다 서울인 경험, 한 번쯤은 있으실 걸 압니다.
인프라 탓만을 할 수는 없어 보여요. 광주의 경우에는 한 다리 건너면 지인인 경우가 많잖아요? 시내도 충장로 하나라 주말에 걷다 보면 아는 얼굴과 마주치기 십상이고, 너 어디 있는 거 봤다는 메시지까지 받게 되죠. 커밍아웃을 하면 곧바로 생활에 타격을 받을 것 같은 사회에서, ‘내가 퀴어 당사자다’ 또는 ‘퀴어 인권 증진을 위해 힘쓰겠다’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울 거예요. 함부로 밝혔다가는 위협의 대상이 될 거라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죠.
그래서인지 제가 만났던 퀴어 분들 중에선 자기가 퀴어란 걸 굳이 떠벌리고 싶지 않고, 위험을 감수해서 굳이 밝힐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숨어 살겠다는 그분들은 ‘이대로도 좋다’고 말씀하세요. 한편으로는 파트너와의 미래를 그리면서도요. 그분들 나름의 생존 전략이겠죠. 작전이고요. 혐오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에 계신 퀴어 분들이나, 저희와 연대하는 비퀴어 분들도 그런 작전 하나씩은 가지셨을 거예요.
제게도 작전이 있었습니다. 전 혐오를 모른 척하는 수법을 썼어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그들이 내 삶의 형태나 미래를 제제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상태로 누가 물어보면 농담처럼 받아쳤어요. ‘저 여자 좋아하잖아요~’ 하고요. 그랬더니 역시나 아무도 모르더라구요. 아무 것도 바뀌지가 않았어요. 귓등으로 흘려야 하는 무지한 발언도 여전했고, 사랑하는 사람의 혐오 발언을 목도하고 상처 받는 것도 그대로였죠.
근래 세상을 바꿔 나가는 단체와 개개인이 노출되는 걸 보면서 저는 ‘나도 움직일 수 있겠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인권 단체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사회를 보며 긍정적인 자극을 얻게 된 거예요. 더는 제 안의 낙차를 견딜 수도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슬퍼하기만 해선 나만 힘들 뿐이고, 내가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거란 것도 느꼈어요. 더는 우리의 삶이 비극적으로 전시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작전을 수정해야 할 때가 온 거죠. 그래서 지금 선택한 방법이 이것입니다. ‘퀴어라이브 IN 광주’에 나와서 당사자로 발언 하는 것.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상대에게 알려주는 거죠. 내가, 그리고 우리가 광주에도 있다고요.
내가 나로 온전하게 살아남으려면 ‘굳이’ 퀴어임을 밝혀야만 하는 사회에서, 저처럼 작전을 수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합니다.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고 혐오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드디어 이곳에서도 진행되는 퀴어라이브가, 광주에 또 다른 떠들썩한 행사를 가져올 자연스러운 촉매제가 되길 바랍니다. 광주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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