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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퀴어퍼레이드

뜨거운 정열과 열정의 나라, 스페인-토레몰리노스의 온 도시가 하나 되어 즐긴 프라이드 퍼레이드!

by 행성인 2019. 7. 4.

오소리(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가자, 떠나자, 토레몰리노스로!

 

소소한 결혼식 -<너무나도 그저 그런, 그래서 더욱 특별한 '소소한 결혼식' 후일담> 보러가기- 을 마친 두 신랑은 스페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축구도 좋아하지 않는 우리가 굳이 스페인을 택한 이유는, 전 세계에서 가장 게이 프렌들리한 도시로 –믿거나 말거나, 사이트마다 순위가 다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가 당당히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 숙소 예약까지 마치고 며칠 후, 이게 웬걸? 우리가 가는 기간에 스페인에서도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하지만 마드리드-그라나다-바르셀로나로 짜진 우리의 여행 동선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프라이드는 우리의 여행 기간과 겹치지 않았고, 나머지 한 군데, 스페인의 소도시 토레몰리노스(Torremolinos)에서 열리는 프라이드만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초특가로 예매했던 호텔은 일정 변경이나 취소가 안됐기에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렇지만 고민은 아주 잠깐. 전 세계에서 가장 게이 프렌들리한 도시가 있는 나라의 프라이드인데 놓칠 수는 없다! 우리는 호텔 1박 금액을 생으로 날리고 여행 일정 하루치를 싹 바꾸며 토레몰리노스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다. 활동가 기질이 신혼여행 간다고 사라지랴.

 

스페인의 남쪽 도시 말라가에 위치한 토레몰리노스는 면적 20km², 인구 6만 여명의 매우 작은 소도시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시 마포구 정도의 크기. 다른 점이 있다면 마포구의 인구는 40만 명가량 이라는 것. 그래서 비교했을 때, 적은 인구 때문인지 매우 쾌적했고,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라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그런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프라이드라니! 부산퀴어문화축제가 처음 열렸던 해에 품었던 설레던 그 마음을 안고 우리는 토레몰리노스로 향했다.

 

아름답고 영롱했던 토레몰리노스 해변

 

압도적인 정열과 열정의 퍼레이드!

 

토레몰리노스 프라이드는 2015년 처음 개최되어 스페인 다른 도시의 프라이드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소도시인 만큼 큐모는 매우 작은 편이었다. (마드리드 프라이드는 무려 200만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의 전 세계적 프라이드라고 한다. 다음부터 해외여행을 갈 때는 그 나라의 프라이드 기간을 미리 알아보고 가는 것으로...) 한국으로 치면 광주나 전주퀴어문화축제 정도의 규모였던 것 같다.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와 비교했을 때 가장 이색적이었던 부분은 부스 행사가 별로 없고, 퍼레이드 이후 무대 행사에 집중하는 형식이었다. 부스는 10개 정도밖에 없었고 그 중 절반이 맥주를 파는 부스였다. (한국에 있는 광장에서도 맥주 판매를 허용하라!) 광장이 있고 광장 주변으로 상가들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의 지형이었는데, 참가자들은 무대 앞 광장을 빼곡하게 채워서 춤추며 흥겹게 무대를 즐기거나, 상가에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형태였다. 스페인의 대부분의 식당들은 야외테이블이 있어 식사나 술과 동시에 무대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도 야외테이블에 앉아 식사에 술을 곁들이며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우리는 중간쯤 광장을 빠져나왔는데, 오후 6시쯤부터 시작된 무대행사는 무려 자정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정열과 열정의 나라 스페인답다고 할까.

 

무대 행사가 진행됐던 광장
광장에 설치된 부스. 절반이 맥주 부스였다.

 

무엇보다 색다르고 재미있었던 건 퍼레이드였는데, 한국과는 다르게 단체 참가자를 제외한 일반 참가자들이 퍼레이드를 따라 같이 행진하는 형태가 아니라, 퍼레이드 경로를 따라 양쪽 인도로 쭉 늘어서서 가는 곳마다 퍼레이드 행렬을 반겨주었다. 차별/혐오선동세력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물론 이런 분위기에서 혐오 발언 따위 할 수가 없었을 테니 안보였겠지만!), 그렇다보니 퍼레이드 구간이나 무대 행사가 열린 광장에는 경찰의 바리게이트가 없었고 (심지어 경찰관도 별로 없었다.) 덕분에 도시와 함께 어울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랐던 건 압도적인 규모의 퍼레이드 차량들! 참가자들의 규모는 소규모였지만, 퍼레이드 차량만큼은 그 위용이 어마어마했다. 차량 자체가 10대가 넘었던 것 같고, 크기 또한 덤프트럭 같은 차량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깃발을 흔들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비눗방울이나 꽃가루, 물총 등을 뿌려대며 길 위의 사람들과 함께 흥겹게 퍼레이드를 즐겼다. 물총 싸움할 때도 물에 맞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나인데, 그날만큼은 차량 위 사람들이 쏘아대는 물총에 흠뻑 젖으면서도 정말 신나했던 것 같다. (물로부터 카메라를 지켜내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정말 신났던 퍼레이드!

영상으로 퍼레이드 맛보기!

 

 

온 도시가 하나 되어 즐긴 토레몰리노스 프라이드!

 

토레몰리노스의 프라이드는 온 도시가 하나 되어 참여하고 즐기는 분위기였는데, 그런 감상은 몇 가지 포인트가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무대 행사가 열린 광장 주변은 물론, 도시 전체에 걸린 무지개였다. 토레몰리노스 뿐만 아니라 스페인은 어느 도시이던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무지개깃발을 볼 수 있었는데, 토레몰리노스에서는 가게이든 일반 가정집이든 걸려 있는 무지개가 워낙 많다보니, 처음에는 신나서 사진을 찍어대다가 나중에는 별 감흥을 못 느낄 정도였다. 심지어 식당 종업원들이 프라이드 그림이 들어간 단체티를 입고 영업하는 곳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응원하는 내용이 담긴 기업 ‘이브콘돔’의 지하철 광고가 서울교통공사 측 심의에서 ‘청소년 보호 선도 방해’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못 했다고 하는데, 토레몰리노스 버스 정류장에는 프라이드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기도 했다.

 

도시 전체 곳곳에 걸려있던 무지개
(좌) 지하철에 게재되지 못한 이브콘돔의 광고 (우) 토레몰리노스 버스 정류장에 게시된 프라이드 광고

그리고 퍼레이드 행진 도중 만난 소방관들! 행진 경로 중 한 곳에 미리 소방차를 끌고 대기하고 있던 소방관들은 퍼레이드 차량 위 사람들이 쏘는 물총에 물대포로 응대해주며 (웃음) 퍼레이드 행렬을 반겨주었다. 퍼레이드 차량이 지나간 후에는 곧 바로 청소차가 따라가며 차량 위에서 뿌린 꽃가루나 전단지 등을 바로바로 청소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도시의 필수적인 요소인 소방관과 청소용역노동자들이 마치 행진의 일부 같은 모습을 보여주니, 도시가 하나 되어 즐겼다는 감상은 어찌 보면 감상이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다. 일정을 변경하면서 날린 호텔 1박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경험이었다. 

 

진압하는 것 아님. 물대포 사용의 올바른 예.jpg
집회하면 길거리 더럽혀진다고 뭐라고 할 게 아니라, 바로 청소차를 동원하자!

 

한국에서도 변화는 시작됐다!

 

매번 차별/혐오선동세력에 둘러싸이거나 행진이 가로막히는 경험만 하다가 토레몰리노스 프라이드를 경험하니,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언제쯤 한국에서는 경찰의 바리게이트 없이, 혐오와 폭력에 노출되지 않고 퀴어문화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언제쯤 온 도시가 하나 되어 퀴어문화축제를 오롯이 즐길 수 있을까.

 

넋두리를 늘어놓았지만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이미 전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고,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차별/혐오선동세력이 자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미 한국에서도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얼마 전 열린 제11회 대구퀴어문화축제 행사장 주변 가게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를 환영하며 자발적으로 걸었다고 하는 무지개깃발부터 대구퀴어문화축제 전에 진행된 대구 경찰들을 대상으로 한 성소수자 인권 강의까지.

 

제11회 대구퀴어문화축제 행사장 근처 가게에 걸려있던 무지개깃발 (사진 출처: 김민수 님)

 

그리고 무엇보다 매년 늘어나고 있는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의 규모는, 그만큼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성소수자들과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하는 앨라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회의 변화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들의 외침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성소수자 이슈가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이 증명한다.

 

이제는 쫌! 축제를 오롯이 축제로 즐길 수 있도록, 더 가열 차고 끈질기게 우리들의 인권을 외치며 우리들의 권리를 쟁취해내자!  

 

토레몰리노스 프라이드 현장에서 - 평등한 권리, 우리 손으로 쟁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