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한 달이 훌쩍 지난 지금 돌아보면 지나치게 긴장을 많이 했던 하루였다. 당일만이 아니라 퀴퍼 준비과정에 있던 한 달 내내 긴장과 막막함 사이를 오르내렸었다. 거의 모든 실무를 총괄해야 하는 위치인데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랐고, 어떤 과정들이 펼쳐져야 하는지 감이 없었고, 사람들 사이에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 안에서 내 역할은 정확히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았다.
예전 회의록, 실무분담 내용 등 자료를 찾아보면 시간표, 역할 분담, 필요한 물건, 계획 등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참으로 매끄럽다. 준비과정에서 나에게 주어진 첫 일은 그 정갈한 언어들 사이의 행간을 상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정리된 말들의 행간에는 얼마나 많은 과정들이 생략되어 있단 말인가.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고, 회의를 진행하고, 주문을 하고, 연락을 하고, 배치를 하고. 그러자면 홍보 내용을 준비하고, 회의 내용을 준비하고, 물건들을 체크하고, 주문처를 찾고, 그 사이에 조금씩 틀어지고 누락되거나 예상치 못한 변수들까지, 빈 곳은 수두룩하다. 더군다나 올해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꼴라보로 진행하게 되었으니, 두 단체의 역사적(?)인 만남과 주제에 대한 두둑한 의미는 차치하고, 퀴퍼는 신나는 것! 따위 아랑곳 없이 그저 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온걸까... 걱정과 원망이 앞서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축제를 즐길 때는 몰랐던 실무 초보자의 좌충우돌 첫 퀴퍼 준비기. 사실상 준비의 절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지난한 회의 과정은 이 글에선 생략하기로 한다. 행간을 상상하시라.
축제 하루 전, 날 새는 줄 모르는 차량 설치 뚝딱뚝딱
퀴어문화축제의 백미는 단연 퍼레이드일 것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차량에 빵빵한 음향, 한껏 멋부린 퍼포머들이 재능을 발휘하고 세상에 우리를 내보이는 시간. 두근두근 출정을 기다리는 카퍼레이드가 화려한 외관을 보이기까지 설치, 해체, 기획, 무대 준비까지 정말 많은 회원들의 땀이 있었지만 단연코 전 날 차량을 설치했던 회원들의 노고를 우선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퀴퍼 행사 전 날 3시에 모여 설치준비를 시작하는데 맨 트럭에 기사님들이 음향장비를 설치하고 나면 안전바부터는 담당자들의 몫이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안전바를 설치하고 장식을 하자면 트럭에 올라가야하는데 생각보다 트럭이 높아 실로 고소공포 극기체험을 방불케했다. 어찌저찌 경험있는 회원들의 지휘 아래, 쇠파이프를 들고 맞추고 조이기를 여러 차례, 이때부터 땀범벅이 되기 시작하는데 장식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기획 당시 피켓카로 정할 때만 해도 작업이 쉽게 끝날 줄 알았다. 피켓만 붙이면 되니까. 그런데 왜 피켓을 어떻게 붙일지는 논의하지 않았던가. 막상 하려고 보니 피켓을 붙일 방도가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의 온갖 잔소리에도 꿋꿋이 리본이며 막대기며 온갖 자잘한 물건들을 챙겨온 동료 덕분으로 피켓에 구멍을 뚫어 (피켓이 예뻐서 손이 바들바들) 리본으로 연결하여 매달 수 있었다. 심지어 리본을 안전바 사이사이에 세로로 내려 장식의 효과까지 줬다. 이렇게 꾸미기 까지 모인 이들의 재치와 여유, 의견 조율 과정이 있던 건 당연했다. 함께 했던 동료 중 한 명은 이런 의외의 난관과 조율과정이 차량 설치의 재미라 하였는데, 하고 보니 진짜 그렇다.
7시쯤이면 설치를 끝내고 핑크닷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차량 설치가 끝난 시점이 이미 8시를 넘었고 체력은 만신창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꾸며놓고 나니 우리 차, 참 예쁘다. 해냈다는 뿌듯함에 더해 저마다의 주제로 장식을 마친 11대의 차량이 일렬로 쭉 늘어선 모습을 보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모두가 그런 듯 차량 앞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찰칵, 인증샷을 남기는 데 여념이 없다.
Tip : 1) 설치 시 준비물을 챙길 때 ‘혹시 모르니 가져가보자’는 절대적으로 옳다. 2) 조직위에서 준비물로 써놓았던 케이블타이는 내가 살면서 본 적 없는 크기의 대형 타이였다. ‘다00’에서 넉넉하게 사간 타이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설치시 필요한 모든 공구와 재료는 진짜 공구상점에서 사야된다. 3) 당일 아침에 차량을 행사장소로 이동하면서 달리는 속도에 장식물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단단히 붙이기에 힘쓰자. 4) 어떤 재료를 쓸지에 따른 계획이 잘 서있어야 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여유를 가지려는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5) 설치가 끝나면 꼬옥 땀흘린 동료들과 함께 밥이든 술이든 차든 뭐든 같이 먹자.
축제 당일, 축제는 정신없고 실무자는 예민하다
운영위원 2명과 사무실에 들러 전날 챙겨놓은 짐을 콜밴에 실어 나르는 것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 10시쯤 광장에 도착하니 심장이 살짝살짝 떨린다. 준비가 한창인, 아직은 여유가 있는 이 광장에 몇 시간 후면 사람이 꽉 들어찰 것이다. 부스지킴이를 할 회원들을 미리 모집하여 교대시간을 짜두었어서 시간에 맞춰 나온 회원들과 후원 굿즈를 진열하고 프로그램에 쓸 판넬들을 배치하고 잔짐들을 정리했다. 척척 알아서 잘하는 회원들인데 괜한 노파심에 참견쟁이처럼 오지랖을 떨다가 차량이 잘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행진 때 쓸 클래퍼가 도착했다 하여 받아놓고 기자회견에 잠시 참석했다가 미리 주문한 도시락을 찾으러 갔다. 그런동안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을 뱅뱅 돌아가야 하니 이동거리가 만만찮다. 광장을 둘러싼 저 벽을 부숴버리고 싶다.
어느덧 12시가 넘었다. 그새 사람들은 몇 배가 불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점심식사를 위해 부스 앞쪽 부근에 돗자리를 폈다. 부스를 담당한 회원들이 교대로 밥을 먹고 오며가며 회원들이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부스에는 이미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회원들과 인사 나누거나 행성인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단체를 소개하는 만남의 장은 되기 어려웠다. 다음엔 부스를 벗어나서 회원들과 만나고 좀 더 머물다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행진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조직위에서 올해 행진 코스가 변경되면서 변수가 있을 거라는 공지를 받았지만, 단체에 안내를 하는 입장에서는 최대한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차례 조직위와 소통했고 그럴 때마다 안도와 긴장을 동반했던 것 같다. 게다가 행진 대오정비를 불과 몇 분 앞두고 차량에 앰프가 안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가 다시 고쳤다는 소식을 들었다가 (차량이 도착한 후에 장식만 확인을 했는데 이또한 미리 담당자와 시간을 정해 전반적으로 체크를 하면 좋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엔 경험이 있던 회원이 미리 체크를 해줘서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피켓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가 찾았다는 전달을 받았다가, 누구를 찾는데 없다더라, 어디로 가는 게 맞느냐 등등 온갖 연락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내년에는 실무진들이 좀 더 세부적으로 역할분담을 할 필요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조배터리를 챙기지 않은 나 자신을 엄청 원망했다. 행진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배터리 10% 남았다.
드디어 행진 시간. 긴 기다림 끝에 차량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올해는 1~4번 차량이 먼저 출발하고 이후에 행진 대오가 따라붙는 방식이었는데 차량이 생각보다 너무 앞으로 빠져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이 광장에서부터 뛰어오고 있었고, 나 역시 이게 출발인지 대기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무전기가 어찌나 간절하던지. 상황을 잘 몰라 우왕좌왕 뛰기 바빴는데 차제연 활동가들이 도움을 많이 줬다. 앞쪽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도 해주고 대오가 출발하면서는 뒤처진 대오가 있는지 봐주면서 행진 내내 중간 소통을 해줬었다.
시작은 불안했지만 행진은 시작되었고, 행진에는 힘이 있다. 출발하기까지 잔뜩 좁혀있던 미간이 펴지고 웃음기가 돌더니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선전물을 나눠주며 어느순간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게 되는 것이 아닌가. 흥을 주체하지 못해 자꾸만 차량을 앞질러 가려는 앞쪽 대오를 막는 게 미안할 만큼 나도 흥겹다. 어디 흥겹기만 했던가. 청계천 다리 위에서 공동행진단으로 함께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번쩍 치켜 들고 있던 차별금지법제정 피켓을 보았을 때, 퀴어퍼레이드 행렬이 광화문광장을 에워쌀 때, 광장에 진입한 후 퍼포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뒤쪽 행렬을 잠시 지켜볼 때는 뭉클하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열망이 언젠간 닿겠지. 저 광장의 벽을 허물겠지.
Tip 1) 해체 시 대형 쓰레기봉투를 준비하면 좋다. 2) 이왕이면 설치했던 사람들이 해체까지 맡으면 좀 더 수월할 것 같다. 3) 각자의 경험을 잘 나누자. 그래야 역할분담이 잘 된다. 4) 평가회의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행진 시에 대오가 집약적이라 휠체어 이용자들이 갇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행렬의 배치와 간격에 신경을 써야한다. 5) 보조배터리 꼭 챙기자
축제를 마친 후, 고생이 보람이 되는 순간
부스정리를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으니 이제 정말 무사히 잘 마쳤다 싶지만 뒤풀이가 남았다. 상근자에게는 뒤풀이도 일정 중 하나. 부스 짐을 다 챙겨서 다른 운영진에 부탁하고 인솔을 위해 나는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뒤풀이 따위 다음에 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막상 자리를 잡고 건배를 하고 맥주를 한 모금 실컷 들이키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다들 고생했다, 긴장했었다, 사람들 붙잡고 이런 저런 고생담과 푸념을 한바탕 늘어놓고 나니 마음이 탁 놓이는 것이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피곤하지만 신나는 하루를 보낸 각자의 사연을 듣고 말하고 떠들다보니 날카롭게 모나 있던 마음도 좀 둥글둥글해지고 내 고생을 사람들이 모르지 않는다는 위안도 받으며 다들 어딘가에서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었구나 깨닫는다. 신경질적이지 않았나, 실수하지 않았나, 좀 더 챙겼어야 하지 않았나 밀려오는 자책들도 파도 밀리듯 조금씩 가라앉았다. 머리로는 모두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중임을 이해하면서도 왠지 나만 고생하는 것같았던 옹졸했던 마음도 비로소 조금씩 누그러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와 그래도 오늘은 우리들의 날이 아니냐는 자긍심과 무탈하게 행사 잘 치렀다는 안도감이 뒤풀이 내내 밀려왔다 밀려갔다. 이래서 다들 뒤풀이를 하는구나!
축제는 끝났다. 첫 경험을 마치고 나니 다음엔 좀 더 잘 할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붙는다. 내년에는 이 전 과정을 좀 더 여유있게 즐길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때는 또 그때의 후회와 아쉬움이 진하겠지. 그렇게 한발씩 성장해가는 것이라 믿는다. 후회하면서 다독이면서 그것을 발판으로 한 발 더 내딛으면서. 참가자로만 있었을 때는 몰랐던 뒷일들을 온몸으로 체득하고나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한땀한땀 보태어 일군 20년의 축제인지 실감이 된다. 부스에서, 차량 위에서, 행진하면서, 광장의 여기 저기에서 함께 땀흘렸던 모든 동료들을 마음으로 꼭 끌어안아 본다. 더해, 점점 더 뜨거운 열망으로 광장을, 거리를 채우며 축제를 만끽하는 모든 당신들께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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