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대한민국 최고 기본법인 헌법이 30년 만에 다시 개헌될 수 있을 것인지 이야기되고 있다. 현재까지 9차례 개정이 이루어진 헌법이 10번 째로 개정될 수 있을까? 헌법의 개정 내용을 두고 각계 각층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헌법은 지금까지 어떻게 개정되어 왔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제헌헌법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로 구성된 국회(제헌국회)가 헌법기초에 착수하여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다. 대통령, 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재미있는 부분은 임시정부를 계승했던 임시헌장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진 이 헌법에는 민족구성원간의 평등한 생활을 강조하는 전통이 상당부분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정치, 교육의 균등뿐 아니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통해 경제의 균등을 도모하겠다는 나름 급진적인 주장까지 헌법 조문에 실려있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다.
이러한 제헌 국회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5월 30일 두번째 국회의원 선거가 시작되었고 반이승만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된다. 제헌헌법 기준으로 볼 때, 이승만의 재선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1차 개헌(1952년 발췌개헌)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없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장기 집권을 위해 강제력을 동원하여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과 의원내각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의회의 발의안이 충돌하자 정부와 의회가 협정으로 양 개정안에서 발췌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공고절차도 없이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이렇게 야당의 개헌안과 정부의 안을 절충한데서 '발췌개헌'이라고 한다.
2차 개헌(1954년 사사오입)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철폐하는 것이 골자인 헌법으로 개정되었다. 다른 대통령은 최대 두 번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무제한으로 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이다.
당시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를 얻어서 개헌선(재적 2/3인 135.333)에 0.333인이 미달되어 부결되었다. 의장은 부결을 선포했으나 이틀 후 11월 29일 오전 10시에 야당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4사5입' 이론을 내세워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여 개헌을 선포하였다. 한 번 부결된 안건은 회기 내에 재심의 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의의 원칙’을 위반했음은 물론이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세 번째 선거에 나올 수 있었다.
3차 개헌(1960년 6월)
이승만 정권의 네 번째 선거인 3.15부정 선거는 대대적인 국민의 저항을 받아 4.19로 이어지게 되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승만은 하야하였고, 그 후 우리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의원내각제 정부 형태로 3차 개헌을 하게 되었다. 개헌에 따라 의원내각제가 도입 되었다.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를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와 권리를 최대보장하고 공무원의 신분 및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개정된 3차 개헌.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때부터 주민직선제에 의한 지방자치장 선임이 명문화 되었다. 또 헌번재판소 설치를 구체화하기도 하고 법관 선거제 도입이 제시된 시기기도 하였다. 이때의 대통령은 윤보선, 총리는 장면이다.
4차 개헌(1960년 11월)
3.15부정선거 관련 반민주 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적용을 허용하는 헌법부칙만 개정하였다.
5차 개헌(1962년 12월)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하는 5.16쿠데타로 헌정이 중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이승만 시대의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보충하기 위해 세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적극적인 민간인 영입이다. 두번째는 적극적인 군부인사 영입이다. 마지막은 적극적인 제도 개선을 도모한다. 그 결과 헌법이 개정되고 새로운 형태의 대통령 중심제가 시행되었다. 부통령을 없애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국무총리제가 신설된 것이다. 국무회의는 의결 기관이 아니라 심의 기관으로 격하되었기에 대통령의 위상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재임을 2기로 국한하는 5차 헌법 개정안이 국민 투표로 확정되어 제3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5차 개헌은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거친 헌법 개정이었다.
6차 개헌(1969년 3선 개헌)
계속 강한 리더십을 유지하기 위해 연임 금지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하에,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공화당은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긴급 변칙 처리한다. 그리고 국민 투표를 시도하여 65.1%의 찬성을 얻어 개정이 된다. 5차 개헌 때 3선을 금지한 조항을 철폐, 대통령의 재임을 3번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대통령 탄핵 소추 발의 기준이 기존 30명에서 50명 이상으로 높아졌으며 과반수 찬성에서 재적의원 2/3의 찬성으로 높아져 탄핵을 어렵게 하였다.
7차 개헌(1972년 유신헌법)
그럼에도 1971년 4월 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 김대중과 김영삼은 구시대 야당 지도자를 몰아냈으며 신민당은 204석 중 89석을 차지하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다. 더 이상 개헌을 통한 정권 연장이 불가능해지자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국회를 해산시키고 이러한 ‘긴급초치’로 인해 헌정이 중단된다. 그리고 ‘긴급조치’라는 이름의 인권 유린이 자행되기 시작되었다.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정안이 11월 국민투표를 통과한다. 유신헌법의 특징은 기본권의 약화와 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체제의 제도적 확립이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간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6년으로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조항을 두지 않아 1인 장기집권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8차 개헌(1980년)
1979년 10.26사태(박정희 암살)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자, 12.12사태로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가 정권 장악했다.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자의로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헌법을 만들고 국민투표로 확정하였다. 이 헌법은 전면 개헌으로서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고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비상조치를 통해 기존 헌법을 무력화 시킨 뒤 입법부를 와해시키는 형태로 박정희에 의해 감행되었던 방식이 그대로 다시 시작된 것이다. 대통령 임기를 단임으로 한 것은 유신 체제 청산을 집권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정치수에 불과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했으며 집권 말기가 되면 일해재단을 통한 간접 지배방식을 획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9차 개헌(1987년 현행헌법)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이른바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다. 그 결과 최초로 여야 합의를 통해 개헌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야, 학생, 노동자 세력 등 시민세력이 민주화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헌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고 5년 단임으로 하였다. 현행 헌법은 전문(前文)을 비롯하여 총강(總綱),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회,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선거관리, 지방자치, 경제, 헌법개정 등 10장으로 나뉜 본문(本文) 130조 및 부칙(附則) 6조로 구성되게 되었다.
이제 제 10차 개헌이 30년 만에 진행될 것인지, 그리고 진행된다면 어떤 개정안으로 진행될 것인지 관심 가져야 하는 시점이다. 새로운 헌법에 어떠한 가치를 담아 세상을 만들고자 할 것인지,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모처럼의 개헌 논의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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