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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

[회원 캠페인] ‘퀴어가학교다닌썰푼다’(퀴학썰) 에세이 모음_ 8월 편

by 행성인 2023. 8. 22.

행성인 아카데미 1조

 

아카데미 1조에서 만든 행성인 휘장 이미지 (디자인: 이안)

‘퀴어가학교다닌썰푼다’(퀴학썰) 캠페인을 소개합니다. 


퀴학썰은 2023년 봄 행성인 아카데미에서 만난 일군의 회원들이 기획한 온라인 캠페인으로 7월 18일부터 8월 25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퀴학썰은 한국에서 나거나 자란 대다수 성원들이라면 경험했을 제도권 교육 속에서 퀴어로 살아낸 이야기를 모으고 나눕니다. 

초중고의 동일한 절차를 밟았지만 경험한 지역과 시기가 다르고, 맺고 끊었던 관계와 감정도 다를 것입니다. 이미 어디에나 있었던 학교 안팎의 청소년 퀴어의 이야기를 모으는 자리를 통해 비슷한 환경을 살아온 청소년 퀴어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무엇이 변화했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더 바뀌어야 하는지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기획: 감자, 슈미, 오동지, 웅, 이안, 제니, 평과 
디자인: 이안


* 게시한 사연은 계정이 살아있는 동안 쭉 전시할 예정입니다. 
* 게시한 사연은 행성인 웹진이나 인스타그램 외 SNS 등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추후 오프라인 전시나 출판 등 외부적으로 활용할 경우, 저자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거치도록 합니다. 
* 게시한 사연의 출처를 밝힌 인용은 가능하지만, 기타 상업적 활용과 도용은 금지합니다.


퀴학썰 인스타그램 @_qhss.2023

 

👉 ‘퀴어가학교다닌썰푼다’(퀴학썰) 에세이 모음_ 7월 편 보러가기

 

 

ep.9 비밀번호 517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2015년에 선생님 반이었던 학생이에요. 선생님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저는 사범대로 진학했죠. 저는… 복수전공을 해서 지금 윤리교사가 되었어요. 항상 하이힐에 청바지, 폴로 셔츠를 입고 수업하셨던 모습이 생각나요.

저는,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윤리교육과를 복수전공했고요.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ep.10 기끼깡

 

내가 다닌 학교는 여학교다. 그런데 학교 이름에는 "여자"가 없다. 그래서 이 학교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거였다. 여자 화장실이 아닌 학생 화장실, 여자 탈의실이 아닌 학생 탈의실. 나를 여학생이라고 호명하지 않는 선생들.

학생용 화장실엔 여자 화장실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고, 학생용 탈의실엔 여자 탈의실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고, 수업시간에 선생들은 나를 여자로 호명했다.

 

 

 

ep.11 슈키

 

A는 예뻤고 공부도 잘했다. 집도 잘 살았다. 내 성적은 A와 한참 떨어져 있었고 굳이 어떤 종목도 그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평소 반에서 끼리끼리 노는 문화가 있어 친해질 계기랄 것도 없었다.

그러다 A를 학교 바깥에서 만난 건 카페에서 열린 모임에서였다. 청소년 퀴어 모임에 나갔는데 그가 앉아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기려던 찰나, A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쭈뼛거리며 A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로 묶인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설레었다.

하지만 그 자리까지만이었다.

학교에서 A는 나와 다른 위치에 있었고, 선생님에게 관심 받을 만큼 학교에서도 촉망 받는 친구였다. 정체성 말고는 비슷한 게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용기 내서 다가가자니 그의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선생님의 부름에 문제를 풀지만 다 틀려서 핀잔 받는 애, 문제를 맞추지 못했을 뿐인데 외모를 지적당하기 십상인 애였다.

다른 것보다도 A 앞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불편했다. 그게 수치심이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그와 친해지고 싶지만 다가가지 않은 건 전적으로 내 자격지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도 A와 친하게 지내지 못한 게 내가 잘난 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좀 아릿하다.


 

ep.12 무조건

 

친구야, 너는 모르겠지. 나는 네가 참 부러웠어.

지금 생각하면 참 부당한 일이었는데도 수련회 교관님이 저녁 식사 줄을 선 너한테

"남자는 저쪽 줄로 가라니까!" 하고 소리 지른 게 말야. 너는 그때 열심히 소리지르며 "여자는 이쪽 줄이라면서요!" 했지.

나도 그러고 싶었어.

 

 

 

ep.13 오율

 

나는 어려서부터 큰병치레를 종종했다. 어떤 것이 더 큰 고통이었는지는 고를 수 없지만, 병원에서 가장 길게 생활했던 때는 중학교를 입학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다. 나는 중학생 때 소아암을 앓았다. 초반에는 지역에서 가끔 서울로 병원을 가긴 했으나, 갈수록 상태가 좋지 않아 아예 옮기게 되었다.

학업을 지속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부모님은 내가 학교를 빠지는 것을 매우 우려했으나, 다행이도 나는 병원 내 ‘병원학교’라고 불리는 곳에서 수업일수를 채울 수 있었다.

이제는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가끔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떠오른다. 난 그 당시 이미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름 모를 성별’로 정체화를 끝냈던 시기였던 지라, 환자 팔찌에 선명히 적힌 ‘F‘(여성)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또 어느 친절하섰던 간호사 선생님도 생각이 난다. 소아 환자였으나 집이 청주여서 보호자 자리가 종종 빌 수 밖에 없었던 나를 한 번이라도 더 봐주신 것 같다고, 어른이 되어 깨달았다. 그렇게 법적으로 마련된 제도나, 친절한 사람들 덕에 나는 살았으리라.

그 후 살지 않고 싶을 때도 종종 있으나 살아 있으니 도움이 된 곳에 후원도 하고 이렇게 글도 쓰는 것 같다.

 

 

 

ep.14 보리차

 

안녕하세요, 저는 청소년 때 미션스쿨 여중, 여고를 다녔습니다. 특히 중학생 시기에는 인권 감수성이 0인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반에 정말 조용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다른 반의 친구랑만 친하게 지냈었습니다. 그 친구 둘을 보며 다른 친구들이 "야 쟤네 사귄대" 라고 수군거렸고 전 그것을 들으며 '어머 둘이 사귄다고?' 겉으로 반응하면서도 속으로는 '여자끼리도 사귀는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화장실 밖에서 양치하고 있었고(원래 양치하면서 돌아다니는 애들이 많았음) 같은 반의 어떤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크릿 가든'드라마가 유행했던 거 같은데 거기에 거품 키스가 있잖습니까? 제가 그 때 양치 거품을 입에 묻히고 친구랑 대화하다가 갑자기 그 친구가 '어 거품이네'하고 제 입에 뽀뽀를 하더군요.

근데 하필이면 그 장면을 선생님이 보시고 "어 너네 뭐 하는 거야" 이러시더라구요. 저는 당황해서 '아 장난친거예요'했는데 조금 부끄럽지만 좋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저는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게 부끄러웠는데 그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막 이야기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당시 약간 알 만한 애들은 다 아는 그런 이야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제 친구 한 명이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넌지시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되어서 그 친구를 가끔 봤는데 관련된 이야기는 안하더라구요…

그 친구에게는 진짜 장난이었지만 저에게는 혼란과 설렘을 남겨준 기억이었습니다. 학교에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중고등학생 시절의 제가 더 당당해졌을 것 같아요.

 

 

 

ep.15 림군

 

중학교 때 여자아이돌을 배경화면으로 해놨다고 같은 반 여자아이한테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근데 그 아이도 에프엑스 크리스탈을 배경화면으로 해뒀거든요. 그래서 그걸 지적했어요. 그랬더니 '크리스탈이랑 니가 좋아하는 아이돌은 다르잖아'라는 말을 들었어요.

당시 또래 여자애들의 동경의 대상, 다이어트 자극 사진으로 유명했던 크리스탈이랑 주로 남자애들이 좋아하던 걸스데이 민아는 다르다는 소리였습니다.

자기는 동경의 의미지만 너는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이상하다는 소리였죠. 참나. 민아언니도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근데 저는 동경의 의미로 배경화면을 해둔 게 아니라, 아무말 못하고 넘어갔어요.

 

 

 

ep.16 레몬트리

 

나는 23살, 남들보다는 조금 늦게, 시스젠더 남성 양성애자로 정체화를 했다.

지금에와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에도 좋아하던 남학우들이 있었는데, 그 때 당시에는 '동경'하는 걸로 착각했었다. '나는 왜 그 시절 정체화를 하지 못했을까?'하고 생각해보면, 나를 정체화할 언어를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당시만 해도 게이, 트랜스젠더 정도까지만 알았지, '양성애자'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보지를 못했다. 흔한 다른 게이들처럼 나 역시 학창시절 홍석천, 하리수라고 놀림받는 게 일상다반사였지만, 그렇다고 내가 게이인 것 같지도, 트랜스젠더인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고, 여자도 좋아하는데….'

나를 정체화할 언어를 찾지 못했던 것, 이건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혐오선동세력에서는 "학교에서 성소수자 가르치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성소수자가 된다"고들 말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성소수자에 대해 가르치지 않음으로 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할 기회를 빼앗아가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할 권리가 있고, 학교에서는 이를 존중하고 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반이,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을 명시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지금 학생인권조례가 있는 지자체에서조차도 성소수자 교육을 하기 어려운 시절인데 조례마저 폐지된다면 참 암담할 것 같다.

학생인권조례가 지켜질 수 있도록 다같이 관심 갖고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

 

 

 

ep.17 줄리앙버터

 

고등학교 3년 내내 짝사랑한 친구가 있어.

항상 그림을 좋아하고 열심히 잘 그리는 그 친구를 진심으로 동경하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헷갈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림 실력이 부러워서 때로는 질투했지만 그럴 자격이 없을 만큼 그 그림까지도 저항없이 너무 좋아했어….

그만큼 그 친구가 많이 노력했고, 그림도 진짜 귀여워. 더 높은 대학 진학이 목표인 인문계고에서 만화 좋아하는 애들이 미대가겠다고 하니까 학교에선 별로 안 좋은 취급을 했지만, 그걸 나쁘게만은 보시지 않은 미술선생님께서 미술부를 열어주고 미술실을 자유롭게 쓰도록 지원해주셔서 미술부장을 자처했어.

미술실은 학생출입금지구역이던 옥상으로 가는 길에 이어진 부실이었고, 난 그 열쇠를 얻었지. 미술부장이란 핑계로 특활과 청소시간 모두 미술실로 배정됐는데, 다른 아이들 문제 풀 시간에 그림 그리는 것도 솔직히 좀 좋았고…ㅎㅎ 무엇보다 종종 옥상을 몰래 드나들었거든.

그 친구와 함께 옥상 밖을 내다보고 수다 떨 때, 아무도 오지 않는, 심지어는 금지된 곳에서의 해방감에 취하기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쌤들 다 알고 계셨을 듯)

예쁘게 잘 꾸며진 운치있는 공간은 아니었고 오래돼 벗겨진 흰 벽에 녹색 방수페인트 딱 그런 공간이었는데, 그 친구랑 있어서 좋았지.

교복을 입고 설레던 순간은 참 많지만, 바람에 날리던 그 친구의 교복치마라던가 머리카락 끝이 손에 닿던 촉감이 기억나. 그 친구에게도 그 때를 괜찮게 추억할까?

가끔 궁금한데, 아직 내 곁에 좋은 친구로 남아있어줘서 앞으로도 물어보진 못할 것 같아.

 

 

 

ep.18 조나단

 

대학교에 와서 정체화 했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정체성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 정체화 할 때 정체성에 대한 고민, 자기혐오나 디나이얼이 없던 걸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때 아무런 편견이 없고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성별이 전혀 문제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작은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때 옆자리 친구에게 샤프심을 빌렸다. 나는 너무 진한색 B 샤프심은 잘 번져서 H심을 보통 사용하는데 그 친구가 준 샤프심은 B심이었다. 쓰다보니 불편해서 "나 사실 H야."라고 이야기했다.

자기가 빌려줬는데 또 딴사람에게 빌리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른 친구에게 H심을 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짝꿍 친구가 당황하더니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친구에게 H심을 빌리자 그 친구가 또 다시 당황하면서 미안해 하는 것이었다.

호모라고 고백을 하는 것인줄 알았던 것.

그 이야기를 듣고 웃겨서 한참을 웃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체화를 안했어도 그때부터 뭔가 남다른게 있었나 싶다.

 

 

 

ep.19 정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건 2000년대 후반. 경기도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학생인권조례가 생긴 건 내가 대학 진학하고 나서의 일이었다. 다른 학교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기준으로 여학생이 바지교복을 입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덕분에 지정성별 여성이었던 나는 교문 앞에서 잡히지 않기 위해 억지로 치마교복을 입고 등교해서 교실에 가자마자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곤 했다.

1학년, 2학년 때는 그런 내 옷차림에 교사들의 태클이 많았어서 3학년 때는 아예 학급 체육부장을 맡아 만약 태클이 걸려오면 "다음 시간 체육이라서 미리 갈아입었어요^^" 라며 대응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3학년 때 일화가 생각났는데, 자세한 사정?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담임(영어) 시간에 동성애자 얘기가 나왔었는데 담임이 그 얘기를 하면서 날 빤히 쳐다봤었다. 머리가 짧은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가끔 들려오는 얘기로는 아직도 학교 분위기는 크게 바뀐 건 없는 듯 하다.

 

 

 

ep.20 지오

 

학교에서 보이시한 점 때문에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좀 부끄러웠다. 간혹 '네가 남자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런 말들에 종종 할말을 잃곤했다.

같은 여자면 왜 안 되지? 싶으면서도 나도 내가 남자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고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조금 수줍었다.

먼 훗날에야 당시의 감정이 수치였음을 인정하게 됐다. 지정성별로 스스로를 받아들이는데 긴 시간이 들었고 혼자만의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학교에서부터 자신을 찾아갈 수 있다면 조금 더 스스로를 이해하고 또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게 모두에게 헌법으로 보장된 행복 추구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ep.21 슈가애플

 

지정성별남성인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스럽지 못했습니다.

여리고 수줍음 많고 잘 울었던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애 같다고 놀림과 괴롭힘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남중남고를 거치며 남자들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남자답게 행동하려고 애썼습니다.

성인인 지금은 여성으로 정체화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여자애같다고 놀림받던 모습이 진정한 제 모습 같습니다.

학교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참 멀리 돌아와 자신을 찾았네요.

 

 

 

ep.22 소유

 

중학교 자퇴 후 대안학교에 다녔어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나 정체화는 늦었지만, 동성의 이미지를 곧잘 PC 배경화면으로 하거나 동성애를 다룬 글을 쓰거나 해서 눈에 띄었을 것 같은데요.

성소수자와 페미니즘을 인지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많아서인지 이야깃거리가 되거나 문제가 된 적은 없었고, 동성애 혐오 표현을 공론화하는 것도 본 적이 있어서 성적 지향에 편견을 갖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일 없이 성장할 수 있었어요.

성교육도 없었고 남학생들끼리 성적 농담을 곧잘 하던 이전 학교였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학생인권조례가 유지되고 그 취지가 학교에 잘 반영되어 몇몇 학교만이 아닌 모든 곳의 학생들이 편견이나 그에 대한 내적 낙인을 갖는 일 없이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p.23 히로인

 

초등학교 6학년. 우리 반에 히어로가 있었다. '반장'을 자처하던 히어로는 항상 친구들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내게 퍽 다정했다.

청소하기 싫어서 큰 캐비닛 안에 몸을 숨긴 뒤 친구들에게 부탁해 '캐비닛 문 좀 걸어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내 부탁을 들어줬고 나는 그 안에서 핸드폰 게임을 했는데, 나중에 이를 본 히어로가 "누가 얘 가뒀어?"라고 말하며 내게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그 애가 걱정해주는 게 좋아서 차마 스스로 가뒀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후에도 히어로는 제 본분에 맞게 내가 울거나 다칠 때면 어디서든 척척 나타나줬다.

내가 히어로를 "엄마"라고 부르며 졸졸 따르던 그 시절을 지나 우리가 크게 다툰 중학생 시절까지. 성인이 된 이후 동네 PC방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으나 너무 부끄러워서 인사도 걸지 못했고, 그렇게 벌써 30살이 다 되어간다.

아직도 히어로는 여전히 히어로인지.
언젠간 다시 마난 가벼운 인사라도 나누고 싶다.

 

 

 

ep.24 하영

 

과거, 우리 중학교에 24살 수학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선생님은 박보영을 닮은 외모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으며 나 역시 선생님을 좋아했기에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질문을 던지곤 했다. 방과 후 활동에서도 '수학문제풀이반'에 들어갔으니 이 역시 모두 수학 선생님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에서 큰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영어 듣기 평가 시험에서 반 아이들이 단체로 잘하는 친구의 것을 커닝하고자 한 것이다. 거기에 가담하지 않은 건 나를 포함하여 2~3명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하필 당시 시험 감독이 수학 선생님이었다.

커닝 작전은 착실히 진행됐으나 몇 달 뒤 이 사실이 모두 발각되어 수학 선생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반에 들어와 전부 눈 감으라고 한 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그게 너무 마음 아팠던 난 편지를 적어드렸다.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서, 반 아이들을 말리지 않아서 죄송하다는 편지였는데 분명히 익명으로 보낸 건데도 선생님은 내 글씨체를 알아보시더라니 결국 나중에 조용히 불러서 '넌 잘못한 게 없으니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말을 읊으시던 선생님의 눈가가 너무 붉어서 나는 오히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 이후, 선생님은 우리 학년을 아예 맡지 않기로 하며 다른 학년 담당으로 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24살은 정말 어린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그 슬픔을 감당하셨을지 마음이 아려온다.

 

 

 

ep.25 대추나무 우정 걸렸네

 

친구야, 너는 내게 고백했지. 나는 기억하고 있어. 원래 나랑 이성으로 여겨지는 친구들은 좀 많이 친해지면 항상 그런 과정을 거쳤어.

그럴 때마다 나는 참 당황스러웠어. 나는 네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네 고백에도 당황스러웠어. 그래서 칼같이 거절했지. 말한 적은 없지만 지금은 좀 미안해. 그때 그렇게 칼같이 거절하지 않고 에둘러 거절할걸 하고 말야.

너는 정말 대단한 친구였어. 내가 그렇게 칼같이 거절하고 피하면 보통은 저쪽에서도 피했는데 너는 그러지 않았거든. 오히려 내가 불편할까 걱정했지.

바로 얼마 전 나는 10년 전의 너를 보며 커밍아웃했고, 아마 10년 후 나는 올해의 너를 보며 또 존경스럽다 생각하겠지.

 

 

 

ep.26 해랑

 

중학교 때 절절한 첫사랑을 겪으며 내가 시스젠더 레즈비언인 줄 알았던 나는, 열일곱이 되어서야 논바이너리 무성애자라는 제대로 된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나는, 기숙사형 여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어쩌다 수업시간에 성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너희는 둘 중에 헷갈리고 막, 그러지 않제?'라는 선생님의 농담과 깔깔 웃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 말고도 불온한 존재가 되어 따로 불려가 혼이 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이기적인 애 취급 받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불온하며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로 기억을 이고, 지며 살아간다.

대학에 와서 시도한 커밍아웃은 모두 실패했고, 나의 상담사는 내 정체성이 트라우마에 의한 일시적인 혼란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이 바뀔까. 학교가 바뀔까.

나는 여전히 어두운 방에서 혐오를 가득 담은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조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자긍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해랑海浪으로 사라지지 않고, 두 다리로 바로 설 수 있을까.

 

 

 

ep.27 코카콜라

 

미션스쿨이던 우리 학교에는 위클래스라는 학생상담교실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나? 학교 밖이든, 안이든, 모든 청소년에게 심리상담은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본인이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을 조용히 불러 면담하기도 했어. 그리고 나도… 불려간 입장이었지.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관한 문제였어. 아마 학생이든 선생님이든 날 알면 다 들었을 정도로 아웃팅을 제대로 당한 상태였기 때문인 거 같어. 솔직히 누가 얼마나 알고 있는 지 ㄹㅇ 알 바 아니지만… 나는 선생님들을 곧잘 믿고 따랐기 때문에 너무나 상냥했던 선생님께 내 모든 걸 말했어. 그 때까진 말야….

나 진짜 아무 생각없이 여자도 남자도 좋다, 남자로 바뀌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함…ㅎ 정색하며 듣던 선생님이 ‘네 친구인 ○○이도 양성애자가 맞는 거니?’라고 물어보셨는데…ㅋㅋ 그 땐 거기서 ‘네 맞아요’라고 말하는 게 아웃팅이란 생각을 못했던 때라 그렇다고 했던 것 같아…. 뒤늦게 그 ○○한테 미안해했는데, 자기도 비슷한 말 들었다더라… 아웃팅대환장파티….

그게 뭐 감수성이고 뭐고 없이 완전히 잘못된 거란걸 나중에 어른되고서야 깨닫고 나서 수치스럽고 분했어…. 상담도 날 위한 게 아니라 학교에서 나같은 학생을 불쾌한 골칫거리로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 상담내용이 부모님께도 갔었단 말을 최근 듣고 청소년성소수자지원센터에 후원하기 시작했어…. 나처럼 질나쁜 상담에 상처받지 않았음 해서…ㅠㅠ

청소년들이 자기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대해 고민할 기회는커녕 죄처럼 추궁하던 게 끔찍했지만(말해 뭐해 기독교 학교인데 ㅋㅋ) 그럼에도 내가 지금 어렵지 않게 나를 긍정하고 살 수 있는 건 믿음직한 내 주변 사람들 덕이야. 모두에게 아무 이유없이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길 바라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좋다는 맘으로 살아주라💚

 

 

 

ep.외전 퀴엇말싸미

 

퀴엇말싸미 비퀴어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나할쌔
이런 전차로 귀한 퀴어가
니트고져 홀베이셔도
마참네 수행평가에 시러
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
나래 이랄 위하야
새로 교육과정을 맹글어야 하노니
사람마다 하여 수비니겨 날로 배우메
뻔한긔 해야 하니라

<해석>

퀴어들의 말이 비퀴어와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이유로 귀한 퀴어가
할 말이 있어도
수행평가에 다 적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나라가 이를 위해
교육과정을 개정해야 하나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편히 배우게 해야 하느니라

 

 

 

마감공지

 

많은 분들의 참여 덕분에 퀴학썰(퀴어가 학교다닌 썰푼다)은 지난 7월 17일부터 8월 18일까지 32일동안 29개의 썰을 수집 및 게시하였습니다. 

 

그 동안 퀴학썰에 소중한 이야기를 보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정통신문

 

여름 성소수자 자긍심 행사 종료 안내

 

 

안녕하십니까? 성소수자 당사자의 일상에 평등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성소수자 학생의 존재감을 고취시키고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학교에서 성소수자 당사자가 경험하는 일을 공유하는 프로젝트 퀴어가학교다닌썰푼다(이하 '퀴학썰')의 사연 모집이 8월 18일 자로 종료됩니다. 성소수자 당사자의 경험을 기반으로 성소수자 친화적인 학교 문화 만들기에 관심을 두고 사연 공유 및 열람과 반응을 통해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2023년 8월 18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