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행성인 HIV/AIDS인권팀)
이 글에는 뮤지컬 '렌트'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렌트를 관람할 계획이 있거나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뮤지컬을 볼 때 노래와 연기 등 연출적인 요소에 더 집중하기 위해 스포일러를 미리 보고 가는 편이어서 스포일러에 예민하지 않지만, 모두의 의사는 존중해야 하니까요. 또한 이 글은 '렌트' 덕후의 주접이 들어가 있습니다. 돌아갈 시간을 드릴게요. 셋, 둘, 하나. 아직 남아 계신가요? 감사합니다. 그럼 글 시작하겠습니다.
돈 없는 학생인 나에게 어울리지 않게 좋아하는 돈 많이 드는 취미가 있다면, 뮤지컬을 보러 다니는 거다. 2021년에 '하데스타운'을 보고 김수하와 박강현의 달달함과 최재림의 성량에 취한 것을 계기로 돈이 생길 때마다(사실은 돈이 없어도)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러 다녔으며, 인스타로 팔로우하는 뮤지컬 제작사 계정에 보고 싶은 뮤지컬의 프로덕션 소식이 들려오면 내 본진의 본업 모먼트를 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 난도질당하는 내 통장 잔고의 고통이 동시에 섞인 비명을 질렀다. 올해 상반기에 영국의 왕비 여섯 명이 디바로서의 끼를 발산하며 무대를 누비는 작품인 '식스'를 보고 나서는(참고로 식스는 아직까지 내 최고의 인생작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지키고 있다. 한국에 나중에 프로덕션이 다시 들어온다면 꼭 관극하기를 권한다.) 같은 작품을 다른 캐스팅으로 여러 번 보는 것을 지칭하는 뮤덕의 악습이자 미덕인 회전문의 맛을 알아 버렸고, '식스'를 제목처럼 여섯 번 본 후에는 대학로 소극장의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를 다섯 번 돌았다. 그 이후로는 올해 내가 회전문을 돌 일이 없을 줄 알았지만,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싹싹 비는 내 통장 잔고를 무시하고 다시 무자비한 회전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도대체 어느 작품, 어느 배우 때문에 이렇게 잔인한 짓거리를 시작하게 되었느냐 하면, 올해 한국에서 아홉 번째 프로덕션으로 돌아온 뮤지컬, '렌트'가 그 답이다.
사실 나의 렌트 회전문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 2005년작 영화화된 '렌트'를 보고 나서 이미 뮤지컬의 넘버와 줄거리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심지어 영화 버전이 원작 뮤지컬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평을 들은 후에는 도대체 원작이 얼마나 대단한지 기대하며 한국 프로덕션이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덕션이 발표되고 '엔젤' 역에 김호영과 조권이 더블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캐스팅 담당자의 탁월한 안목에 박수를 치며 일단 소박하게 표 네 장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전 캐스트 도장깨기를 완료한 렌트는 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나의 빈약한 통장은 렌트로 화려하게 불타오르며 연말을 따뜻하게 밝혀 주고 있다.
렌트가 굉장히 퀴어한 작품이기에, 그리고 세상에 불만이 한창 많아지기 시작하던 고등학생이었던 6년 전의 나에게 반항의 메시지를 필터 없는 가사로 노래해 주었기 때문에 출구 없이 빠져들었던 것 같다. 1990년대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렌트는 결코 경박하지 않게, 하지만 너무 무겁지도 않게 그 시대 퀴어들과 HIV 감염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여러 넘버들에 등장하는 멜로디와 가사인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은 당장 언제 결별할 줄 모르는 연인들과 언제 아프거나 죽을 줄 모르는 당시의 HIV 감염인들에게 소중한 가치를 말해 준다. 가장 귀중한 것은 사랑, 그러니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지금 현재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후회 없이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것. 나와 내 주변을 보며 점점 여기에 공감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렌트의 메시지가 마냥 넘버들의 멜로디처럼 감미롭지만은 않게, 오히려 조금 슬프게 다가오는 것 같다. 렌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불확실한 내일을 받아들이며 오늘 여기의 사랑을 노래한다. 만에 하나 내일이 당연하게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니면 수많은 오늘의 사랑을 쌓아 내일을 만들어 갈 사람이라도, 오늘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춤추며 사랑한다. 슬픈 운명을 신나는 노래로,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흥 속에 한을 녹아내는 작품이 렌트이다.
렌트의 빛나고 퀴어한 캐릭터들은 내가 이 작품을 계속 찾는 이유 중 하나이다. 김호영과 조권이 맡은 드랙퀸 엔젤은 눈부신 춤과 옷, 그리고 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김호영이 이 역할을 맡으려고 데뷔했나 싶을 정도로 찰떡인 캐릭터 엔젤. 엔젤은 친구들과 처음 만날 때 화려한 드랙을 한 채로 '오늘은 당신에게, 내일은 나에게(Today For You, Tomorrow For Me)'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오직 오늘뿐. 친구들에게 인생의 빛과 사랑을 가르쳐 준 엔젤은 등장할 때와 같은 '오늘은 당신에게, 내일은 나에게'를 환자복을 입고 처절하게 부르며 에이즈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엔젤이 죽는 장면이 들어간 2막은 1막의 사랑하는 이들이 싸우고 연대가 와해되는 과정을 다룬다. 모린과 조앤은 사고방식 차이와 모린의 바람기 때문에 싸우다 헤어진다. 로저는 본인의 HIV감염사실 때문에 미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다 미미도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지막 남은 용기를 쥐어짜 사랑을 시작했지만, 결국 미미가 죽어가는 것을 볼 자신이 없어 미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리고 엔젤의 죽음을 구슬프게 애도하는 콜린과 친구들의 과거 룸메이트이자 현재 집주인인 베니, 마지막으로 모린의 전 연인이자 이 모든 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카메라에 담는 마크가 있다. 하지만 사랑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것. 엔젤의 장례식을 계기로 해서 조앤과 모린은 재결합하고 베니는 장례식 비용을 내 주며 친구들과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장례식 이후 산타페로 떠난 로저와 마음에 없는 방송국 일을 시작한 마크는 곧 회의를 느끼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병들어 죽어가는 미미는 마지막에 죽다 살아나 로저와 재회해서, 죽었을 때 엔젤을 만났는데 돌아가 로저의 노래를 들으라는 전언을 들었다 말한다. 과거의 상처로 사랑을 애써 부정하는 로저. 반항적이고 자유분방한 모린. 밝고 끼쟁이인 엔젤. 우직한 사랑꾼 콜린. 나이보다 성숙하면서 당돌한 미미. 엄격하지만 화끈한 조앤. 현실에 치여 친구들을 잊은 베니. 그리고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며 소심한(하지만 1막 마지막 넘버에서 19금 가사는 잘만 부르는) 마크. 다들 나와 어딘가 닮았거나, 내 친구들 중에 있을 법한 캐릭터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들의 이야기와 노래에 울고 웃으며 극을 즐긴다.
오래오래 사랑받는 퀴어 작품에는 항상 이유가 있는 법. 렌트가 만들어진 배경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캐릭터들의 대사와 노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렌트는 그저 조금 외설적인 대사가 있는 뉴욕 배경의 크리스마스 사랑 이야기로 끝날 것이다. 지금보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기의 HIV 감염인과 비감염인 퀴어들이 외치는, 지금 여기 오늘만의 사랑이라는 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퀴어에게도, 정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이 말이 와닿지 않을 수 있을까. 렌트는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부터 그 다음 해 크리스마스 전날까지의 1년 동안을 다룬 작품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크리스마스가 1주일도 남지 않은 날이다. 렌트의 넘버 '라 비 보엠'이 생각나는 추운 낮이다. 어제도 내일도 없는 것처럼, 나는 오늘도 신나게 사랑하고 노래하고 연대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첨부하는 사진은 내가 직접 공연을 보러 가서 찍은 렌트의 커튼콜 사진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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