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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

[활동가 연재] 상임활동가의 사정

by 행성인 2024. 6. 25.
기획의 말

2024년 한 해 동안 '상임활동가의 사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행성인 네 명의 상임활동가들은 종횡무진하며 단체 안팎에서 활동을 하는데요, 한 달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 함께 만나봅시다.

 

 

지오

 

뒤늦게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았습니다. 영화는 유대인 학살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있습니다. 감독의 오스카 수상소감은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학살을 일깨우고 이는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일 수만은 없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무심한 듯 흘러가는 일상의 현장들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자본의 윤택함이 쌓아올린 장벽 너머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합니다. 

 

얼마 전 화성 리튬전지 회사 아리셀에서 2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코로나 19 희생자들과 오송참사, 그리고 아리셀 참사까지. 참사 위에 참사, 비명 위에 비명, 고통 위에 고통이 장벽보다 높아갑니다. 저 멀리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학살과 여기 한국에서 반복되는 참사는 어디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거대한 자본의 시스템 속에 일개 개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해 보이나, 우리는 ‘사과 한 알’을 심는 시민일 수 있습니다. 사회가 이 비명들에 등돌리지 않도록 하는 일, 저 장벽에 저항하는 일은 너머가 아닌 장벽 이쪽의 몫임은 분명합니다. 지금 일어난 이 참사에 기업과 정부의 제대로 된 애도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시작일 수 있겠지요.  

 

일터에서 희생당한 아리셀 노동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오소리

 

‘언젠간 해야지’ 하던 혼인신고를 다가오는 6월 28일에 하러 갑니다. 뭔가 특별한 날에 혼인신고를 하고 싶었는데 맞아 떨어지지가 않더라구요. 만난 지 10주년은 한참 지났는데 5,000일은 또 한참 멀었고, 결혼기념일로 하자니 5주년은 하필 주말이었고… 그래서 스톤월 항쟁일에 맞춰 하기로 했습니다. 🤣 동성 간 혼인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혼인신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다! ✊  라는 의미를 담아 보았습니다. 😏 

 

파워 J 답게 혼인신고는 어떻게 하는건지 꼼꼼하게 찾아보았습니다. 혼인신고서 작성 후 둘이 함께 신분증 지참하여 구청에 방문하면 되는데요. (혼자 갈 경우 위임장 등 추가서류 필요) 혼인신고서에서 부모 정보를 과하게 요구하긴 하지만 본인 명의로 발급받을 수 있는 가족관계증명서에 다 나오는 내용이라 어렵지 않게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증인 두 명의 개인정보와 서명이 필요한데, 옆자리에 있던 웅과 호림에게 부탁해서 바로 받아 15분만에 작성을 마쳤습니다. 이제 구청에 가서 제출하면 끝! 참 쉽죠~? 🤷‍♂️

 

물론 저희 부부는 혼인신고서 제출 후 불수리 통지를 받게 되겠죠. 참 간단한 혼인신고 절차에 새삼 부아가 치밉니다. 🤬 이 간단한 신고가 접수에서 끝나지 않고 수리되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까요? 얼마나 더 많은 싸움을 해야 할까요? 가끔 너무나 요원해보여 지치기도 하지만,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 항소심에서 승리한 것처럼 계속 부딪히다 보면 언젠간 승리의 날이 오지 않겠어요? 그래서 좌절하지 않고 계속 싸워보려 합니다. 혼인신고도 그 일환입니다. 불수리 통지가 쌓이고 쌓여서 수리가 되기까지의 밑거름이 될테니까요. 승리의 그날까지 우리 함께 힘내서 싸워봅시다! 🔥 

 

#혼인신고도투쟁이다   

 

 

남웅

 

마포퀴어위크를 준비하면서 행성인은 활동 사진전과 깃발 그리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사무국 활동가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했고, 나는 인화된 사진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행성인엔 97년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으로 설립할 당시부터 사진들이 있다. 지금은 기라성 같은 학자와 연예인, 예술가와 활동가들의 앳된 모습도 소소하게 볼 수 있다. (2000년 동인련 인권캠프에는 갓 커밍아웃한 홍석천과 아티스트 모어(는 그냥 참가자로)가 왔다) 그리고 당시에는 라브리스와 지퍼 등 레즈/게이 클럽에서도 후원파티를 했다. 지금도 한 줌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씬’이 손안에 들어올만큼 작은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의 인권운동은 성소수자가 그렇게 가시화되지 않던 시절 두각을 보인 집단이었을 거고, 지금과는 다른 커뮤니티의 무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몇 안 되는 인권운동단체는 미디어와 거버넌스 뿐 아니라 업소와 클럽까지도 한데 잇는 네트워크가 이뤄지던 공간이기도 했다. 지금 얘기하면 대단해 보이지만 유튜브도 인스타그램도 X(트위터)도 잭디도 그라인더도 스마트폰도 뭣도 없던 당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과는 달라진 풍경 속에서 인권단체의 무게가 가벼워졌다거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성소수자 인식이 달라졌고, 퀴어 커뮤니티도 각기 활동하는 분야가 다양하고 인구도 많아진 상황에서 정상참작은 필요할 거니까. 누군가에게 성소수자인권운동단체는 성소수자가 잘 살다가 위기를 맞이하거나 공익적인 도움을 요청할 때 찾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나 기억하는 건, 20년 코로나 이태원사태 당시 본부처럼 오갔던 친구사이 사무실에 여느때처럼 후줄근하게 나와서 언론모니터링을 하고 성명을 쓰는데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태 좋은 남자분이 자기가 그날 클럽을 갔었다며 고맙다고 간식과 음료수를 사들고 잠깐 방문하고 갔을 때의 모습이다.) 어렵고 취약한 이들을 찾는 것이 인권운동의 주요한 활동이지만, 그것만 하는 건 아니다.

 

누가 봐도 취약해서 인권부터 챙겨야 할 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당신의 삶도 얼마든 아프고 쇠하고 취약할 때가 있음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인권운동이기도 하니까. 활동 신조 중에 우선순위에 항상 올려두는 건 재밌게 활동하고 재미없는 활동에도 재미를 좀 찾아보자는 것이다. 취약함과 재미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정상성에 잘 들어맞지 않는 애들이 자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서 인권운동을 같이해왔고 해나갈 것이다...!

 

 

호림

 

 

 

존경하는 리 배짓 교수님의 단행본 <차별비용 - LGBT 경제학, The Economic Case for LGBT Equality> 한국어 번역서의 감수를 맡았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세계 여러 국가에서 진행된 실증 연구들을 기반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큰 "차별 비용"을 만들어 내는지, 차별을 시정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변화가 어떻게 경제에도 이득이 되는지를 다루는 책입니다. 경제학이라는 주류 학문의 언어로 성소수자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해 말하는 책입니다.

 

성소수자 인권 의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책이 다루는 주제들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시에 다수의 통계 기반 연구들을 인용했기 때문에 밀도가 높은 책이기도 합니다.

 

성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한 설득의 언어를 다각화 한다는 측면에서 이 책과 참고문헌들은 여러모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널리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