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2024년 한 해 동안 '상임활동가의 사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행성인 네 명의 상임활동가들은 종횡무진하며 단체 안팎에서 활동을 하는데요, 한 달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 함께 만나봅시다. |
지오
영화를 만드는 역할에 흔히들 감독을 떠올립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프로듀서라고 하면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알쏭달쏭하지요. ‘오퍼: ‘대부’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드라마가 이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해줍니다. ‘오퍼’는 느와르 장르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영화 ‘대부’의 탄생 비화를 다룬 작품이에요. 이 10부작 드라마를 7월 주말동안 한 편씩 보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2편을 보면 끝이 나요.
‘오퍼’는 ‘대부’라는 영화를 만드는 데 사활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이 영화의 흥행과 가치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반대와 역경이 있었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마피아라는 소재, 영화사의 위기, 한정된 제작비 등의 문제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수없는 고비를 불러옵니다. 이를 조율하고 해결하면서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끌어가는 이가 바로 프로듀서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명, 사운드, 캐스팅, 소품, 배우들까지 각 영역의 담당자들은 감독이나 프로듀서의 지시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매 장면마다 자신의 식견과 경험을 바탕으로 장면을 짜기 위해 고심하고 이는 감독의 의도나 제작비, 혹은 서로 다른 영역들 사이에 마찰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를 조율하고 해결하는 역할도 프로듀서이지요.
그러나 영화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점, 프로듀서가 전체를 조율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인들의 개입과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이, 기회를 잡고 싶은 이,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이, 매 순간의 고비에 해결사로 등장하는 이들은 목적과 의도는 달라도 이 영화에 연루된 서로 다른 주변인들입니다. 그들의 역할에 크고 작음은 없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삐끗했다면 우리가 아는 그 ‘대부’는 없었을 테니까요.
드라마에는 매 순간순간 갈등과 위기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갈등과 위기는 조화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그 짧은 컷들은 모두 협상과 조율의 결과임을 상기시키지요. 이 전 과정에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영화에 연루된 안팎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무척 중요해 보였고 활동과도 제법 닮아있다고 느꼈어요. 드라마를 끝내면 영화 대부를 다시 보려 합니다. 그러면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있겠지요.
오소리
한국에서 동성 부부의 법적 권리 첫 인정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고 뿌듯합니다.
지난 4년 간 많이 지치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제가 행성인의 활동가로서, 행성인 동료들과 회원분들의 지지와 응원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이제 우연하게도 7월 23일부터 한 달 간 안식월을 갖습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떠날 수 있어 마음이 편안합니다. 다음 여정으로 향할 에너지 충전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혼인평등입니다. 앞으로도 행성인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갑시다!
웅
애인의 생전 작업을 모아서 아카이빙하고, 본가에 남겨둔 작업들도 모으고 정리하기 위해 애인의 가족들과 소통하고, 그러면서 이전과 다른 관계를 만드는 일.
앞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걸음이 있다면, 과거를 향해 걸으며 닿지 않은 영토를 발견하는 일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항상 과거를 향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의 걸음이 미래를 향한 보폭과 리듬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일전에 초대받아 방문한 그의 집에 마련한 나환 작가의 작품창고와 얼마 전 오픈한 아카이브 페이지를 보면서 실체는 없지만 데이터베이스로 가득한, 혹은 데이터들로 실체의 빈자리를 가득 채운 외장하드를 떠올렸다. 애지중지 아카이브를 만드는 그를 보면서 정원을 가꾸는 일에 비교해보기도 했다.
1층 관객없는 전시장 통유리 뒤에서 파리채를 들고 띄엄띄엄 붙은 벌레들을 떼어내는 그의 모습은 정원의 비유를 더 가깝게 떠올리게 했다. 얼마 전 그는 누구도 보지 못했던 애인의 작업들을 꺼내 앞을 향해 가는 이들에게 잠깐 봐달라고 손짓하는 전시를 열었다. 《Present》, 작가의 파트너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작업을 아카이빙하고 전시를 기획한다. 피그말리온이 조각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다면, 보통의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떠난 자리에 생전에 남긴 손짓을 더듬는다. 그리고 더듬어낸 결과를 나누는 전시.
떠난 이를 그리며 계속 기억하는 전시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살고 있는 당신을 위해 기획한 전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진으로만 보고 작은 드로잉인줄 알았던 그림은 시야를 가득 채운 제법 큰 그림이었다는 전언. 그림엔 색색이 비가 내리고 소년은 눈을 감는다. 그와 소소한 안부를 나누면서 멍하니 그림을 보고 나왔다. 누구라도 지나가다 멈칫하며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틈 같은 시간을 내어준 지금의 전시였다.
호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아침 심란한 마음을 안고 서초역으로 향하던 일, 카페에 앉아 미리 써두었어야 할 보도자료 초안을 쓰다가 커피를 엎었던 일, 대법원 정문 처마에 서서 반대집회 소리를 들으며 기자회견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시간, 생중계 내내 대법원 유튜브 채팅창에 흐르던 무지개, 결국 비 때문에 실내로 장소를 옮기던 차 안에서 선고를 듣고 함께 소리를 질렀던 순간, 이런 일은 매일 있다는 듯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일사분란하게 기자회견 셋팅에 나서던 민변 사무처 활동가들(🙇♀️🙇♀️), 방청 후 기자회견장에 도착한 비 맞은 사람들의 밝은 얼굴, 활동가들은 보도자료와 성명을 쓰느라 기자들은 송고를 하느라 키보드 소리만 들리던 늦은 오후, 몸살 기운에 혼자 시켜 먹은 순대국밥, 누워 쉬고 싶은 마음과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 갈등하다가 파티 장소로 뛰쳐나가던 마음, 저녁 축하파티에 모인 반가운 얼굴들…
시간은 평생 잊지못할 것 같은 중요한 순간의 기억도 퇴색시켜 버리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중요한 날을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동성배우자 건강보험 사건 대법원 선고날의 소소한 기억 조각을 적어보았다.
쭉 적어놓고 보니 “일” 하던 순간의 기억은 없고, 그 사이사이의 기억만 있다. 이래서, 여유를 가지고 쉬엄쉬엄 일 해야 하는 걸까. 휴가 첫 날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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