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2024년 한 해 동안 '상임활동가의 사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행성인 네 명의 상임활동가들은 종횡무진하며 단체 안팎에서 활동을 하는데요, 한 달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 함께 만나봅시다. |
지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가 영화화되어 곧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흥동에 사무실이 있을 때 피디에게 조언을 구하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어요.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낼지 고민하고 계셨어요. 사실 이미 방향은 거의 정해놓은 상태였고 확신 한 스푼이 필요했던 것이었죠.
그때의 작은 인연으로 시사회 초대를 받았어요. 영화는 돌봄에 대하여 라고 제목을 바꿔도 될 만큼 돌볼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돌봄이 주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지금 보기에 아주 좋은 영화에요. 여러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저의 경우에는 관계에 따른 자격의 문제보다 돌봄이 자본화되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이 더 진하게 맴돌았어요.
오소리
안식월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벌써 세 번째 안식월임에도 기나긴 쉼 이후의 복귀는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네요. 어쩌다보니 건보공단 소송 대법원 판결 이후 바로 며칠 있다가 안식월을 보내게 돼서 약간은 도피성(?) 휴가가 되었네요. 그래도 승소한 덕에 기쁜 마음으로 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안식월 기간에는 3주동안을 독일에서 보냈는데요. 한국의 여름보다 쾌적한 날씨에, 어딜가도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해서 쉼을 갖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어요. 아직도 푸릇푸릇한 숲과 하늘을 배경으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던 순간이 눈 앞에 아른거리네요. 당분간은 그때의 기분들을 양분 삼아 살아갈 것 같아요. 어디서든 만나면 독일에서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드릴게요. 조만간 만나요~!
웅
글을 그렇게 써도 여전히 청산유수처럼 술술 나오지 못한다. 빈 화면을 보면 깊이도 모를 벽을 보는 기분이다. 어쨌든 자리에 앉았으니 쓰긴 해야지.
개요를 최소화하는 편이다. 일단 빈 화면에 생각나는 단어와 문장을 마구 적는다. 적은 단어와 문장 위로 연상되는 다른 문장을 붙이고 순서를 매기면서 문단을 만들고 글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구성한다. 이런 공정 덕분에 퇴고의 시간이 길고, 어떤 부분에서는 뜬금없이 글의 방향과 소재가 튀는 경우도 많다.
대담집을 준비하면서는 이야기의 흐름과 주제를 먼저 구성했다. 키워드 별로 어떤 현안과 소재를 이야기할지 미리 준비하고 만났다. 그래도 여느 대화가 그러하듯 여러 차례 샛길로 빠지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에는 취지를 잊고 수다떨듯 사사로운 이야기로 나가기도 했다. 어차피 이 책은 두 평론가/활동가의 편파성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 하면서도, 대화 마무리에는 빠트린 인물과 작업이 없는지, 더 얘기할 이슈가 있는지 체크했다. 정신머리가 없었다.
제일 고된 건 글을 고치는 시간이었다. 만나서 대화하는 동안은 이렇게 고된 작업이 기다릴 줄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그냥 재밌다고 떠들었지. 그래도 필담처럼 수정작업을 주고받으며 다시 호흡을 맞추는 작업은 그것대로 매력 있었다. 한편으로는 저자들의 일정을 챙기고 저자보다 꼼꼼이 원고를 살펴준 출판사 편집자의 역할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걸 새삼 느꼈다. 행성인 웹진도 그렇게 해야 할 건데;
미술을 주제로 하는 대담이지만, 인권활동 경험과 감각을 같이 얘기해보자고 생각했다. 거꾸로 정세를 이야기하고 인권운동의 의제들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퀴어 당사자들에게 체화되고 지각하며 예술 창작과 형식으로 표현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걸쳐온 관계들을, 커뮤니티에 굴러온 시간과 커뮤니티가 굴러온 시간을 생각했다. 각자의 세계에서 궤적을 그려나가면서도 어떻게 다시 만나는지, 설령 접점이 없더라도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를 살폈다.
대화는 대흥동 행성인 교육장에서 진행했다. 흥미롭게 인권단체 사무실을 구경했던 리타 평론가의 모습이 생각난다. 마지막 대화를 마치고 행성인 가입서를 건넸다. 9월 말쯤 첫 북토크를 하는데, 책이 나오고는 연중에 행성인에서도 북토크 하자고 했다. 회원 독자여러분과 같이 얘기나눠야지. 교육장에 몇 권 구비했으니 와서 보셔도 좋겠다.
호림
운동을 시작했다. Activism이 아니라 Exercise다(활동가들이 꾸준히 하는 재미없는 농담이다). 대학원 졸업을 하고, 상임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혀 운동을 하지 않는 나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애인이 ‘올해 생일 선물은 다른 건 필요 없고, 운동을 시작하라’고 선언했다. 그 후로 3개월을 이어진 근심과 걱정어린 잔소리(!)를 버티다 못해 7월 초 드디어 운동을 등록했다.
집과 사무실 중에 그래도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기에 나은 곳은 사무실이고, 멀면 멀어질수록 금방 그만둘 가능성만 높아질거라 큰 고민없이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헬스장에 PT를 등록했다. 다른 활동가들의 양해를 구해서 업무 시간 중에 운동을 하러 간다. 업무 시간을 피해서 운동을 잡기엔 너무나 외부 일정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덕에 지난 두 달 동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두 번은 꼬박꼬박 운동을 하고 있다.
트레이너에게는 냅다 두 번에 걸쳐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1회차) ‘회원님 무슨 일 하세요?’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예요. 근처에 사무실이 있어요” (2회차) ‘(반지를 보며) 회원님 결혼 하셨나요?’ “네, 여자랑요.” 트레이너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지만, 요즘은 내가 일하는 단체가 비영리인지, 몇 명이나 일하는지, 배우자와 휴가는 어디로 가는지 등을 선선하게 묻고 답하는 관계가 되었다.
사실 운동을 시작하기 전 허리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래도 한 2년 꾸준히 했던 필라테스 덕에 지난 2년은 어디 아픈데 없이 잘 버티던 몸이 조금씩 안 좋아진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운동을 시작하고 나니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물론 일상적인 근육통을 달고 사는 몸이 되었지만…
‘왜 인간의 몸은 특정 연령을 지나면 운동을 하지 않고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을까.’ 운동을 하기 싫다고 자주 투덜거리지만 솔직히 운동이 주는 활력이 좋기는 하다. 지금의 목표는 그래도 올해가 마무리 될 때까지는 그만두지 않는 것. 이 목표를 달성하면 꽤 뿌듯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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