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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

[활동가 연재] 상임활동가의 사정

by 행성인 2024. 10. 22.

 

기획의 말

2024년 한 해 동안 '상임활동가의 사정' 연재를 시작합니다. 행성인 네 명의 상임활동가들은 종횡무진하며 단체 안팎에서 활동을 하는데요, 한 달 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것들을 고민하고 있는지 함께 만나봅시다.

 

 

지오



최근 딸에 대하여, 대도시의 사랑법, 럭키 아파트까지 퀴어의 삶을 다룬 한국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하였습니다. 반가운 영화들을 보면서 주변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는 재미가 쏠쏠해요. 각 영화마다 색깔과 주제가 달라서 작품마다 나누고픈 이야기가 풍성하지만 성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에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보이는 것이 세 작품의 공통된 특성일 것 같습니다. 이전에 영화 속 성소수자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세 작품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 있습니다. 성소수자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며 돌보는 관계에 대해 (딸에 대하여), 소수자로 관계맺는 삶에 대해 (대도시의 사랑법), 자본에 떠밀리지 않는 공동체에 대해 (럭키 아파트)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하죠. 또 존재를 숨겨야하는 차별적인 현실 속에서도 슬프고 우울하기 보다 잘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저항하며 연대하는 모습을 밝고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이러한 변화는 현실의 변화에 힘입어 더욱 경쾌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승소는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가능성의 힘을 실어주었고 얼마전 있었던 11쌍 동성부부의 혼인평등 소송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었어요. 다급해진 보수개신교 세력들은 대규모 집회를 연다지요. 여전히 성소수자를 찬반 논쟁에 가두려는 이러한 시도는 얼마나 후지고 빈약한가요. 우리 스스로를 찬반에 가둔 적도 없지만 우리는 이미 찬반을 넘어 돌봄, 관계, 연대를 통한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보수개신교던 인권위원장이던 더불어민주당이던 국정감사던 어디서 뭐라고들 지껄여도 끝내 우리가 이길 겁니다.



 

오소리

 

 

 

지난 10일, 혼인평등소송 시작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이번 소송은 열한 쌍의 부부들이 함께하는 집단 소송으로, 2014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의 혼인 소송 이후 10년만에 제기되는 소송이며, 저와 제 남편이 열한 쌍의 부부 중 한 쌍으로 참여하는 소송이기도 하기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난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을 경험하며 동성혼 법제화의 필요성을 더없이 느꼈습니다. 동성 배우자로서 가질 수 있는 수많은 권리 중 단 하나의 권리를 얻기 위해 지난했던 4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른 권리들을 위해 매순간을 반복할 순 없을 것입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동성혼 법제화입니다. 

 

또 다시 지난한 순간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래도 이번엔 곁에 다른 열 쌍의 부부들이 함께여서 든든합니다. 그리고 행성인 회원분들의 응원은 언제나 힘이 됩니다. 혼인평등으로 가는 여정에 많은 관심과 지지 부탁드려요! 💕

 

📰 소송에 참여하는 오소리·소주 부부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 결혼을 상상하게 됐다, 용민이가 집에 없던 그날 [열한 가지 결혼 이야기 ④]




남웅

 

10월은 유난히 길었다. 망원동 집을 비우고, 같이 활동한 동료가 떠나고, 만난 이들도 적지 않고, 여기저기 출장도 부업도 많았다. 그런 중에 월말 일주일을 통으로 휴가내서 그사이 타이베이를 다녀왔다. 나에게 주는 보상 같은 거다 쳤는데, 돌아오니 미뤄둔 일이 귀국과 함께 쏟아져 정신이 없다.

 

관광과 여행에 목적을 뒀지만, 겸사겸사 타이완 LGBT 프라이드 2024, 그러니까 타이베이 퀴퍼를 염두에 두었다. 지난 해 행성인 회원들이 행사 참여 겸 여행을 다녀온데 이어 올해는 나도 가보겠다는 심산. 활동보다는 구경에 가까운 참가였다. 

 

행성인 동료이자 술친구인 민지, 영민과 함께한 여행은 중화권 여행 다수 경험자 민지가 여행메이트 겸 가이드 역할까지 맡았다. 의견을 수렴해서 여행 일정뿐 아니라 항공권과 숙박, 고궁박물원과 택시여행 등등 세부준비까지 다 챙기고, 매일 영양제를 챙겨준 덕에 다녀와선 여독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출발 직전에는 현석과 코코넛 등 몇몇 행성인 HIV/AIDS인권팀 팀원들이 대만행 티켓을 끊어 현지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저마다 취향이 제각각이라 전부 한자리에 모인 건 두어 번 정도. 

10월 25일 트랜스마치 (사진: 김민지)

 

퀴퍼 이틀 전부터 당일까지는 매일밤 시먼홍러우에 가서 술을 마셨다. 이 동네는 클럽과 술집이 모여있어 이태원과 신림, 종로를 합쳐놓은 느낌이 든다. 퀴퍼특수라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다음주 월요일엔 자리가 텅텅) 십수 년 전 종로 포차거리에 게이들 천지이던 그때 풍경이 살짝 떠올랐다. 아니지, 한국사람이면 명동을 떠올릴법한 시먼은 꼭 이 구역이 아니어도 시내 곳곳에 손잡고 다니는 퀴어 커플들이 많이 보인다. 상점간판과 배너, 거리의 사람들마다 여섯빛깔 무지개가 어색하지 않게 녹아들어 지역이 퀴퍼의 주말을 함께 즐기는 분위기다.

 

이 차이는 무얼까. 그저 동성혼 법제화 사실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도시가 어떻게 개발과 보존을 하는지, 보존이든 개발이든 성소수자의 역사는 어떻게 의미부여되는지, 이에 대해 민관이 취하는 태도가 얼마만큼 거리의 활기를 좌우하는지, 어떤 얼굴들이 거리에 보이며 활기를 채우는지 생각했다...남들 술먹고 춤추고 놀 때 그거 구경하면서 이런 얘기나 하는 거보면 영락없이 나이먹어가는 활동가나 다름없다는 자조까지. 멀끔하고 몸 좋은 남자들이 떼로 보이니까 나중엔 그게 어쩌라고 싶었다. 이곳의 많은 게이들은 바버샵 깍두기 머리를 반듯하게 하고 나시에 핫팬츠 근육이나 소위 아시아 베어룩을 기본으로 장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 베어문화의 성지 답고. 일년 중 제일 텐션이 높을 때여서일지 잔잔한 플러팅이 빈번했고, 나는 어플 프로필에 한글 천지에 얼사 몸사도 걸지 않았는데 기대도 안한 쪽지들이 많이 왔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시도했느냐 하면,, 그냥 축제 주간을 위해 사활을 걸고 나온듯한 이들을 보면서 덩달아 자존감이 올랐고 기부니 조아따.) 내가 이정도면 다들 얼마나 활발하게 굴러다니는 것인가를 또 실감하고.

 


비슷한 시간 한국에서는 수만 명의 군중이 시청광장에 모여 온갖 혐오를 쏟아내는 자리에 서울시장이란 자가 축전까지 보내는 꼴을 보이는가 하면, 민주당은 차별금지법보다 민생이 중요하다는 궤변으로 정작 민생 후퇴시키는 얘기만 광광거리는 뉴스가 나온다. 쿠팡노동자의 사망이 국감에 올라오고, 대통령 내외의 소식은 끝도 없다. 두 나라를 비교할 건 아니고, 내가 사는 이 나라는 왜 이럴까를 생각하며 다시 관광객모드로 최선을 다해 회피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웹진 원고 독촉은 여행 와서도 놓지 않았다. (마감을 지켜준 여러분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타이완 LGBT프라이드 2024는 듣던대로 규모가 상당했다. 현지 참여도 많았지만, 해외에서 참여한 이들도 많았다. 규모에 비해 행사장이 좁은 듯 했다. 부스구경보다는 사람구경만 실컷 했다. 시청 앞에는 누드모델로 활동하는 이들이 피부색과 비슷한 팬티를 입고 프리허그를 하고, 꼭 그들이 아녀도 여기저기 한껏 벗고 입고 꾸민 이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한여름을 피해 좋은 온습도를 찾을 겸 핼러윈과도 날짜를 맞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만의 알록달록한 미감과 함께 사람들도 다채로운 인상을 준다. 트위터와 온팬에서 얼굴과 몸만 훑었던 게이포르노 배우들을 여럿 알아봤고, 한국에서 참여한 단체들도 있었다. 배우들이야 행사를 기회삼아 콜라보 영상을 찍을 거고,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나 큐앤에이는 부스도 차렸으니 그저 즐기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소 소박한 규모의 무대와 음향기기에 갸웃했지만, 이미 나는 혐세의 소음에 대치하며 앰프를 늘리고 경찰과 날세우는 서울의 환경에 이미 쩔어 있음을 인지했고...

 

기업의 부스참여 역시 남달랐는데, 차량에는 패션과 금융 외에도 GSK와 로슈, 길리어드를 비롯한 제약회사 차량들이 늘어섰다. 에이즈 연대 행렬을 따라가겠다고 여행 가기 전에 마지막 활동가의 사명감을 고수했지만, 행진 당일에는 다른 차량을 따르기로 정했다. 저쪽의 사정은 모르니까 당장 판단은 하지 않기로 한다.

 

행렬은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동선의 거리보다 대기시간이 길어지는 게 더 힘들게 했다. 경찰이 도로를 모두 가로막지 않고 차량을 통과시키고 행렬을 가게하다보니 가다서다가 반복하는 듯 했다. 행렬이 수시로 끊기는 모습을 보면서 경찰이 일을 못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여기에 대해 모르는게 많구나 싶고. 하지만 모른다고만 말하는 건 또 회피가 될 것 같고. 부스 중에는 대만 회사가 소유한 캄보디아 기업의 노동자 차별을 고발하는 캠페인도 있었다. 

 

 

 

우리는 페티시 트럭을 따라갔다. 여기저기 차량에 케이팝이 적잖이 나왔는데, 그걸 멍멍이들이 허밍으로 떼지어 따라하는 모습은 귀엽고 (좋은 의미로) 괴랄했다. 민지는 무지개 선비옷과 갓으로 참가자들에게 기념샷 명소가 되었고, 마루는 펍마스크를 개시했다. 수백 명(마리?)의 멍멍이들, 알몸과 하네스와 라텍스 틈새에 함께 행진하는 일은 그거대로 새로웠다. 나는 왜째서 레인보우 레퓨지 티셔츠를 입고 갔는데, 사람 멍멍이 목줄을 쥐고 있는 짧머의 라텍스 쫄쫄이 남자가 흥미롭게 쳐다보더니 이게 뭐냐고 물어서 대충 얼버무렸다만...내가 나누고 싶었던 얘긴 그게 아녔다. (대만 여행기 퀴퍼편 끝 - 이정도 분량을 남길거면 걍 글을 따로 쓸걸 그랬다.)

 

 

 

호림

 

 

오랫동안 꿈꾸고 상상하며 준비해 온 순간이 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결심, 노력과 응원, 지지, 연대가 모여 만들어졌다.

 

언제나 기쁘고 좋은 순간은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모든 것을 초과하는 모양으로 다가온다. 건강보험 피부양자 항소심에서 이겼던 날도, 혼인평등법을 포함한 가족구성권 3법이 발의되던 날도, 건강보험 사건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던 날도 그랬다.

 

그리고, 드디어 10년 만에 다시 발을 떼는 혼인평등소송의 시작을 알린 지난 10월 10일은 그 중 두번째로 빛이 나는 날이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이렇게 정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나에게 최고의 날은 서울고등법원에서 건강보험 피부양자 사건 항소심을 이긴 날이다. 지금 이 일을 계속 해 나갈 확신과 희망을 준 날이니까.)

 

긴 호흡으로 해 나가야 할 일이지만, 목표를 먼 미래로 잡아둔 일도 아니다. 사람들의 최선의 마음을 믿으며 즐겁게 일하다보면 그 날이 우리 눈 앞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지금 머릿속으로 그리는 모습을 훌쩍 뛰어넘는 모양으로.

 

(여기까지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개인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소감) 

 

+ 지난 주말, 서울 도심에서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라는 제목으로 보수 기독교 세력의 집회가 열렸다. 성소수자와 여성,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가득하고, 시대착오적인 왜곡된 신념이 가득한 100대 기도문을 읊는 행사. 거대 정당의 원내대표가 이 행사를 조직한 이들을 만나 ‘차별금지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겠다는 의지를 단 한번도 모은 적이 없다’는 말을 부끄럼없이 하고, 서울시장이 축사 영상을 보내는 상황에 화가 나고 조금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가 조직된 가장 큰 배경이 7월 18일에 있었던 건강보험 피부양자 사건 대법원 승소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 기도문의 어떤 내용보다 이 대법원 결정이 “큰 충격을 주었”다는 대목을 짜릿한 자부심으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일은 그들과의 소모적인 논쟁과 대응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해나가며 우리의 길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