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원고는 서울에 위치한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9월 4일부터 10 월 19일까지 진행하는 전시 <그, 그들 그리고 그들>을 바탕으로 한 평문입니다.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미술비평)
1
이 글은 성토에서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 우정이라는 관계성과 그 가치에 대해 전시를 기획하고 있으니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직후, 과거에 겪은 몇몇 배신과 실망의 경험들이 스쳤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바에는 우선적으로 다소간 미화된 의미를 거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우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소모적인 경합과 신경전에, 나아가 괴롭힘과 수탈에도 아랑곳하지 않음을 박아둔다. 얄팍한 믿음과 자기주문에 기반 한 관계로 우정을 바라보면서, 서로의 치부와 알몸을 속속들이 알아야만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 자부하는 이들을 경계하며 쓴다. (몇 안 되지만 친구라 불러온 당신들에겐 미안하다, 하지만 이렇게 멱살을 잡는 까닭에는 끝내 우정을 버리지 못하는 지독한 미련 역시 인정해야만 한다.)
불시에 나의 치부가 드러날 때, 혹은 비밀과 상처와 가난이 탄로 날 때 그것을 품어줄 당신의 조건 없는 환대 같은 것을 그린다. 십 수 년을 동고동락하면서 호흡과 체온을 나누는 이들의 유대부터,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스킨십을 나누고 곧장 헤어지는 만남에 잠시 느끼는 희열과 허무의 감각까지도 우정의 연장으로 삼아본다. 어느 때고 취약한 상황에 놓일 때 그에게 향한 걱정과 호의로부터 느끼는 연결의 감정들, 관용과 공감을 기대하며 나는 다시 한 번 마음 내핵에 감춰온 부정적이고 너절한 무언가를 드러낸다.
우정은 계층의 시야를 좁히고 인맥을 세우는 불쏘시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정은, 사회 각 분야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비즈니스의 편법들을 세탁하며 국가정체성의 가치로 세워지고 이것이 다 우정이었노라는 사후적 세탁의 허울 좋은 명목으로 소환된다. 우정은 처음이자 끝이고 구성적 원인이자 예견된 결과다. 쉽게 말해 '이미' 우정으로 엮인 관계이니 불편과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응당 그렇게 하기에 이것은 '끝내' 우정으로 성립한다. 관계의 울타리처럼 작동하며 안전을 보장하지만, 울타리 안에서는 개인의 경계를 허물라는 강요의 명분이 된다.
결국 우정에 있어서만큼 미덕vs규범성, 친밀함vs구속의 항은 서로 대립하거나 딜레마로 묶이지 않는다. 도구처럼 소급되다가 어느 순간 새삼스럽게 우정 만세를 부르는 짠내 나는 기만은, 끝까지 어긋나는 중에도 우정을 확인하고 어쩌면 강요한다. 당신과 나의 극단적인 차이까지도 품으며 동질감과 유대감을 처절하게 긁어모으는 모습에서 체념과 의지가 구분되지 않는 어떤 숭고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의 지점을, 다소간 나의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당신을 붙잡는 이 상황을 기어이 우정으로 부르고야 마는 처절함을 떠올린다. 그렇게라도 우정을 말할 수 있다면, 다행인가?
2
전시 초입 오인환의 ‘나는 하나가 아니다’를 우정에 대한 알리바이로 읽었다. 문장은 여러 갈래로 이해할 수 있다. 나 같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공동체의 미명을 굳이 먼저 적어두지만, 내 안에 이미 나 아닌 자가 있고, 반대로 항상 당신을 염두에 두지만 결국 당신에게서 보는 건 내 모습이다. 고립되고 분리된 불안에 맞서 출현한 문장은, 이미 타인에게 예속되고 개입 당하며 구성되었음을 인지하면서도 끝내 독립된 개인의 경계로 돌아온다. 하여 또 다른 독해로서 ‘우리’는 나의 다른 표현으로 선언된다. 성재윤이 성별규범성을 어긋 내면서도 그에 걸쳐 있음을 인지하는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의 몸을 보인다면, 남들과 다른 몸,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드러내는 이의 신호에 누군가는 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익숙해진다면, 트라우마의 기억을 농담의 소재로 승화시키고 승화의 과정 자체를 공동의 전선으로 만들어 섹슈얼리티와 유머를 색칠할 수 있는 것 역시 우정의 힘일지 모른다. 여기에 전나환이 그린 사이클롭스가 트월킹하며 윙크한다. 바깥의 규범적 태도와 프레이밍에 고립을 자처하는 외눈의 거인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 갈급에 리듬을 잃지는 않는다. 분리된 화면을 울타리 삼아 화면과 화면 사이의 연결을 찾는 일을 우정의 신호라고 불러 본다면, 이 친밀함의 교감은 스스로 깨지 않을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상처와 부정성을 인지하기에 상대에게 손을 내밀고 건넨 손을 잡는 것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박승혁의 분체도장 상자들처럼 다른 모양에 같은 이름, 같은 모양에 다른 이름을 가진 사물들은, 또한 이우성이 화면에 펼쳐놓은 반짝임의 무리들과 공명한다. 이들을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한 하나의 그림이고 다름으로 하나가 된 오브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구멍 뚫린 상자들과 반짝임으로 가득한 그림은 '나는 하나가 아니다'의 문장과 함께 어울리며 언제고 연결될 수 있음을 기대할지 모른다. 그것을 ‘다양한 우리들’의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도 구태여 지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동형성의 반짝임은 비슷한 외모와 체형과 성별과 입장으로 우정이 갈라쳐지는 동네의 생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한 번쯤 긁어본다.
이 동형성이 항상 손뼉처럼 잘 맞기만 할까. 이정식이 숫자들을 기록한 한 쌍의 화면들로 시선을 옮기면 서로 같은 모습으로 다른 시간을 적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HIV감염인의 복약시간과 복약하지 않거나 먹지 못한 빈칸의 행렬이라는 점은, 감정을 공유하고 스킨십을 나누면서 어떤 장치들이 필요하고 누락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동질감을 나누는 일은, 기실 삶을 지탱하는 시간의 축이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린다.
필연적 차이와 닿을 수 없음은 낭만적 소재가 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바라봄’의 위치에서 관찰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이시마의 2채널 영상은, 분리된 화면을 오가며 자신을 부풀리고 접는 몸들을 보여준다. 한쪽의 프레임에 포획되지 않으면서도 화면 바깥으로 탈구하지 않은 채 화면과 화면을 오가는 이들은 서로 만나고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왜 화면속 이들은 그와중에도 화면에 계속 눈을 맞춰 보여지길 갈구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잡히기를 원치 않을라도 어쨌거나 잊히지도 않기 위해서는 출현을 감행하고 어느정도는 포착을 갈구하는 모순된 결핍 같은걸 읽는다. 그리고 다시 실눈을 뜬다. 시야의 틈새로 들어오는 오용석의 그림에서 음탕하게 아른거리는 또 다른 얼굴과 몸들을 삽입과 흡입의 리듬으로 삼아본다. 언제고 또 다른 몸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얼굴들, 그것을 잠시나마 유대이자 연대의 매듭들로 부른다면, 그것은 스쳐 지날지라도 우정이라 칭하지 못할 건 없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우정의 대상으로 삼고, 반대로 당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우정이 성립한다. 같은 취향과 성향, 학교와 지역을 공유한다고 우정만세를 부르고 같은 고통과 쾌락을 경험했다고 우정의 연대를 믿는다. 규범으로 굳이 묶이지 않지만 강렬한 연결을 갖는다고 믿는 결속을 우정으로 부르지는 않았을까. 우정은 명명할 수 없는 관계에, 명명되지 못한 스킨십에 동원되는 핑계 같은 것은 아닐까. 혹은 감당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해본 적 없는 타인의 신호에 답할 수 있는 이기적이고 편의적 선택지는 아닌가. ‘친구로 지내는 게 좋겠다’는 흔한 말에서 우정은 거절을 위한 우아한 도구가 되고, ‘너랑은 섹스 빼고 다 가능하다’는 관계의 마지노선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친구 간 섹스를 감행하며 ‘우정박’이라 부르고 자조하는 반도의 해학 속에서 과연 우정의 용처는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해 보지만, 비규범적 관계로서 우정은 무기한 양보하고 미뤄진다. 나는 우정을 믿고 나눈 사사로운 경험이 어떤 동의도 없이 고스란히 상대의 연구 실적과 사회적 성공 가도에 땔감처럼 쓰인 쓰라린 기억을 떠올린다. 친구 운운하면서도 차이와 잘못을 발견할 때 언제고 손절하고 당장에 조리돌림할 준비가 된 이들의 기억하지 않을 이름을 읊는다. 위기를 겪을 때 그로부터 도망치는 이의 합리적 비겁함을, 연애나 결혼관계와 경합하다 어떤 의미도 정리하지 못한 채 절교를 선언한 이가 걷어찬 후순위 관계로 떠밀린 우정의 취약함을, 그러다 규범적 관계의 낭만이 한꺼풀 벗겨지고 친구 운운하며 구속의 틈새로부터 뱀처럼 나와 입발린 소리를 하고 마는 간계와 유혹의 신호를, 입장 차이와 계층적 격차로 관계를 깨버리고 어떤 이유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증발해버리다가도 필요하면 불현듯 나타나는 유령같은 이들의 도시전설들을 떠올린다. 이를 고려하면, 우정이 관계와 용례를 확장하는 양상 뿐 아니라, 우정의 관계성이 관계의 규범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다른 규범적 관계들과 경합하거나 대개는 착취당하고 미뤄지는 일을 살피고 물어야만 할 것이다.
규범에 체화되어 있으면서도 제도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들, 대개는 퀴어로 자의로 부르고 타의에 불려온 이들에게 우정은 사방에 펼쳐진다. 미끄러진 사랑에 대한 이름이자, 동성 사회의 낭만이 체화한 우정에 성애를 섞고 성별을 교란하며 정의와 범례를 확장한다. 제한된 만남의 환경에서, 혹은 규범에 어긋난 관계에 붙이는 살짝 비릿한 이름 같은 것. 규범적이고 일상적 관계의 자격을 갖지 못한 한시적이고 익명적이며 다소 난잡한 관계들에 대해 우정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어떻게든 관계를 잇고자 하는 충동은 동시에 관계를 준비하지 못한 미흡한 이가 누구에게든 상처를 입고 또한 줄 수 있음을 함의한다. 취약한 비규범적 관계를 가리키는 흐릿한 호칭은, 우정을 선언하는 혀끝에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선험적인 우정의 선언에는 내가 언제든 배신당하거나 배신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따른다. 이어지는 연민과 체념, 미련 끝에 이것도 우정이었노라 사후적으로 인정하는 일 또한 인정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시차와 모순, 균열까지도 우정이 끌어안아야 한다고 재귀적으로 인정한다면, 상처 난 자리를 긁어 덧나게 하고 또 핥으며 그 맛에 젖어갈 테지.
하여 우정을 퀴어링하자는 제안과 시도에 대해서는, 우리 우정도 퀴어하지 않은가요! 라는 자화자찬이 수습할 생각도 없는 교만이 아닌가 하는 불신에 닿는다. 연루되었음을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결국 당사자인 ‘나’로 되돌아오는 지독한 순환 고리는 끊어지지 않으며 끊을 생각도 없다. 어떤 면에서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의 우정론과 우정에 실패한 이야기들을 참조하면서 우리가 서로를 모름에도 함께하는 일로서 우정을, 이른바 ‘비(非)우정의 우정’을 제안하는 동료 미술평론가 이연숙(리타)이 나눠준 근래의 이야기는 배신과 거리감, 소원함을 차라리 품으며 타인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1 나는 그의 말을 우정을 성찰할 수 있는 총알로 장전하면서도 불만을 잇기 위한 연료로 불사른다. 이미 부정성을 품은 우정이라면 ‘비우정의 우정’이라는 그의 화두는 동어반복이 아닌가를 심중에 두며, 우정을 말하는 나는 타인은 고사하고 자신을 알고는 있는지 자문할 수밖에 없다.
3
나란히 마주한 두 실존의 견딜 수 없는 침묵을 견디기 위해서는 소속과 연결됨을 확인하며 최소한 내가 당신을 해치치 않는다는 안도와 믿음을 심어줄 매듭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 우정은 규범과는 거리가 멀고, 확신의 표식도 없으며 용례도 다르다. 그만큼 우정은 규범적이고 표식으로 넘칠 만큼 불안을 품는다. 그러니까 우정은 밑도끝도 없이 대단한척 하지만 그냥 편의적으로 소구되는 이름이 아닌가를 재차 시비 걸지만, 그만큼 사람과 비인간 생물, 비생물 사물이 함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붙일 수 있는 관계의 미덕은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옹기종기 모인 이들 안에서도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다름을 인지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라고 속이고 속을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진실은 뒤늦게 인지된다. 차라리 언제고 줄다리기의 협상과 동등한 협상을 위해 특정한 가치와 정치적 지향을, 미적 취향을 서로 간 공유하거나 차이를 인지해야 한다. 회의와 의심은 우정의 주체들이 평등한가에 대한 의문으로 향한다, 아니다. 그럼에도 우정은 평등을 향한다. 기울어짐과 불평등까지도 끌어안는 이의 선택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혹은 어떤 법적 구속도 종속적이지도 않은 관계 속에서도 돌봄을 택하며 나의 영락을 포기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는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 그것을 재차 우정이라고 부른다면. 언제라도 사회 미덕으로 상찬될 수 있고 한심한 호구로 치부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위기를 감싸고 취약한 생을 위해 나의 일부와 전부를 던지는 일이라면.
새삼 반복하는데 이 글은 전시와 작품을 비평하기보다도 이들을 빌어 우정을 비평하는 글이며 비평보다는 성토에 가까운 글이다. 차라리 우정을 불신하는 누군가를 심문하는 글이며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언제라도 배신당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상대를 깎아내리며 수탈할 수 있다. 친구라는 이유로 글 값과 작품 값, 노동의 값어치를 후려치며 상도를 져버리는 이들에게 비평은 이토록 미운 얘기를 기어이 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우정이라고 부르며 신나게 가스라이팅 하겠지. 이를 자조적으로라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 비평의 미덕일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우정을 잘도 씹으며 또 사로잡힌다.
결국 지난한 우정에 대한 성토와 투정은 우정의 효능을 부정할 수 없기에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죽고 못 살 당신과 장렬하게 종언을 고하고 이후에 손을 내밀지만 그것이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는 아닐 때, 그 마음의 정체가 대체 무엇일지 당사자도 모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상황에도 다시금 당신에게 연민과 끌림을 가질 때, 기어이 망가진 관계에 이름을 붙여 애도를 해야만 할 때, 불편과 불신, 불화와 적대까지도 무릅쓴 어리석은 그리움과 불가능한 접점을 모색하는 가여운 노력을 기어이 우정으로 부르겠다면, 우정은 다분히 편의적으로 취해지는 지금의 조롱과 냉소에 끄덕이면서도 돌파할지 모른다. 차연서가 사후약방문처럼 법의학적 기록을 토대로 관계를 유추하는 것처럼, 그것은 제삼자에 의해 뒤늦게 우정이었다고 의미 부여하고 뒤늦게 발굴될 수 있다. 혹은 불길하게 찢어진 벽보의 자리를 그림으로 응시하는 이해민선의 작업처럼 관계가 깨지고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혹은 이 관계가 무엇인지 당장의 호명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도저도 아닌 관계에 당황하면서, 결국 이것은 우정이었노라 인정하는 일 같은 것을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는, 깨진 상황에서 연결의 충동에 어떤 명분도 의미도 붙일 수 없을 때, 가까스로 우정이라는 단어를 성급하거나 뒤늦게 떠올리게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이 편의적인 이름마저 없다면, 나는 더 이상 문장을 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결속을 믿지만 언제고 깨질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애착과 증오의 모순적 짝패를 품으며 이미 진절머리 나는 당신과 예외적으로 계속 열어두는 관계라면 말이다.
- 이연숙, 〈비(非)우정의 우정〉, 《인문잡지 한편 12호》, 20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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