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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입장] 문제 제기 이후- 오해가 아니라 검열이다

by 행성인 2025. 5. 22.

 

남웅(인권활동가, 미술비평)

 


*이 글은 행성인 웹진 4월호의 미술평론 '급진적 예술 실천을 위한 기억의 훈련들'을 둘러싼 입장문의 후속으로 쓴 글입니다. 해당 입장문은 다음의 링크에서 확인해 주세요. https://lgbtpride.tistory.com/2064)

 

이무기 프로젝트, 〈트랜스-젠더-시간-지도〉, 2025. 이미지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문제제기 이후 한 달이 지났다. 주변 작가와 평론가는 물론이고 활동가와 알음알음 지내는 지인들까지도 문제에 공감하는 가운데, 몇몇은 자신이 겪은 불편한 경험을 나눠주기도 했다. 

누군가는 공론화와 더불어 적법한 법적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도 짚어줬다. 하나 특기할 점은 게재를 거절당한 이후 해당 시점 이후로 그동안 메일로 주고받던 소통이 통화와 대면 면담을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가급적 텍스트로 입장을 정리해서 주고 받자고 요구했지만, 미술관의 그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텍스트를 남기는데 어떤 부담이 따랐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기록이 사후 예기치 않은 의미를 갖고 효력을 가질 수 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취한 태도라고 해석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특히 여론이 확산되고 기사가 나오면서 미술관 관계자들은 통화하고 만나기를 요구했다. 대면은 상황을 유연하게 만들 것이고, 인정에 의존하며 감정에 호소하기도 쉬운 환경을 만든다. 어쩌면 이러한 설득과 호소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흘러가게 만들고, 결국 사건을 개인 감정 차원의 문제로 축소하기 쉽다.(구태여 가스라이팅이라고 적지는 않겠다.) 문제를 경험한 많은 이들도 이러한 과정 속에 '동료'로서 고충을 이해하면서 찜찜하게 문제를 묻거나 불편한 침묵을 택하지 않았을까.

관계자와의 통화에서 상대는 지금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했다. 덕분에 선생님의 고충과 인간적인 면면을 알았지만, 그것은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이미 검열사실을 사건화하고 문제제기했다면, 이 상황에 필요한 건 피해자가 당신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오해를 푸는 일이 될 수 없다...오해라니. 이 사건은 분명한 검열이다. 기록 없는 음성만 오간 덕분에 관계자들은 내가 경험한 검열을 '오해'라고 완곡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자신들은 '중립'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고 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란 정국에 계엄을 비평문에 썼다는 이유로 게재가 미뤄지고 기어이 거절당한 상황에서 사용한 단어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건 소모적일 뿐이다. 

 

애석하게도 그조차 안에서부터 어긋나 있다. 미술관에 입장을 묻고 전해준 건 기자들이었다. 5월 20일 한겨레신문 노형석기자의 기사〈‘계엄 비판’ 글 퇴짜…서울시립미술관 ‘검열’ 논란〉에서,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게재 여부와 관련하여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5일 먼저 발행한 프레시안의 기사서울시립미술관, 전시 도록 '계엄 비판' 글 수록 취소 '검열' 논란〉 글을 싣지 않기로 한 결정이 '중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관에서 합의된 결과라는 담당 학예사의 말을 전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은 내부 의사결정이 얼마나 불투명한가를 짐작케 한다. 기사가 나올 즈음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은 그의 요청으로 나눈 통화에서 일련의 사태가 내부 소통의 문제이며, 검열은 오해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런 사정까지 지금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설령 내부 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미술관 여러분은 기관의 문제때문에 작가와 비평을 후순위로 미루며 존중하지 않고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더불어 내부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해명하는 태도는 결국 이 결정이 공동의 논의는 생략한 채 윗선의 판단이 아니라는 입장을 돌려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검열을 결정한 일은 중간 관리자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꼬리자르기 정도로만 취급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검열로 사건화한 일을 오해라고 취급하며 해명하는 일은 무책임한 대응이다. 자신은 개인적으로 검열을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면서 기관과 개인을 분리하는 방식의 태도는, 관제기관의 대표성과 책임을 갖는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범주로 축소함으로써 공동체적 해결은 커녕 최소한의 관료적 의사결정과정마저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을 시인하는 꼴이기도 하다. 

흔히 검열은, 뾰족하거나 비규범적인 주장, 위해성이 있고 문란하다고 취급하는 표현 등을 거부하고 불이익 주는 일로 이해하기 쉽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기에는 누가 불이익을 주는지, 거부를 결정한 의사과정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여기에 누가 연루되어 있거나 연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지 전반의 항목들을 모두 포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이 사안이 내부 소통의 오류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구조적 결함에서 어떻게 내란 비판에 대한 검열이 이뤄지게 되었는가를 짚어야 한다. 오해라고 말하며 피해사실을 축소하거나 꼬리자르기를 할 것이 아니라,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통렬하게 짚어야 한다. 기관의 사정이 어째서 이러한 결과를 만들었는가를 반성하고, 나아가 이후에도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책임을 표명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그간 미술관이 공동체니 사회니 운운하며 제고해온 가치이자 역할이 아니었던가. 이를 거듭 소통의 문제라고 둘러대는 태만은, 기관의 권위와 직함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책임지지 않고 있음을 시인할 뿐이다. 

 

어떤 입장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려 하는 상황에서 (통화 내용 녹음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은 농담이라기엔 너무 무례했다), 거듭 입장을 계속 내는 건 문제제기를 한 피해자(결국 이 단어를 꺼냈다)다. 다행히 몇몇 참여 작가의 지지와 문제의 사태에 공감하고 확산해준 동료들, 미술관의 입장을 전달해준 기자들 덕분에 이 문제는 개인의 불편한 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미술관은 끝내 침묵을 택할지도 모른다. 입장문이랍시고 검열을 오해라고 축소하는 이야기를 다시 지면에 올리며 유감 따위를 표명할지도 모른다. 윗선의 사람들이 책임에서 회피한 채로 이 사건을 유야무야 만드는 일은 결국 검열의 사태에, 어떤 방식으로든 일방적으로 검열하는 구조에 공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서울시립미술관은 2025 ❬SeMA-하나 평론상❭ 공모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오정은 평론가는 자유로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비평의 중요성을 말하는 비평상이 기만이라고 짚는다. 지금으로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해결의 노력은 커녕 회피와 침묵의 태도만 보인다면, 미술관이 표방하고자 했던 자유와 급진성은 취사선택이 가능한 사항으로, 수탈의 대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곧 미술관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처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