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웅 (인권활동, 미술평론)
*검열, 수탈, 무례
해당 원고는 서울시 산하 기관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기획전시《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2025.03.06 ~ 2025.07.27) 도록에 실릴 예정이었다. 문장이 과거형인 것은 이제는 도록에 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도록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이 글은 실리지 않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 이 글은 도록에 실을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긴 글에 짧지 않은 문장을 더한 점에 이해를 구한다.
전시 담당자에게 이유를 물었다. 중립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립'의 개미지옥에 기어이 휩쓸렸다. 대체 '미술관' 당신은 어째서.
전시는 기억과 기록으로서 예술을 '실천'으로 수행해온 작업들을 다룬다. 아래는 소개문의 일부다.
'최근의 국내외 갈등과 분쟁, 참사 등은 ‘현재를 어떻게 기록하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라는 복합적인 과제를 던진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 속에서 재현과 보존을 넘어 사회적 기억을 복원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내는 동시대 미술과 기억 기관인 아카이브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조금 순화된 형태지만, 참여하는 작가와 아카이브 기관들이 4.3 제주항쟁과 일본군 위안부,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퀴어와 이태원의 트랜스젠더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들이 소위 정치적 '중립'에 저항하며 행동해온 기록을 모으고 기억하는 실천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음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승자독식의 역사에 맞서 가려진 시간을 발굴하고 그로부터 시간을 다시 열어내는 기억하는 행위의 급진성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글은 윤석열이 12월 3일 발표한 계엄 전후로 쓰였다. 헌정질서를 농단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세력에 맞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사회 변화를 갈망하는 광장에서 썼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24년 11월 당시 받은 청탁 내용은 '동시대 사회 이슈에 개입하는 작업에 대한 지형도에 관한 글', '잊혀진 사건이나 집단, 재난에 관해서 동시대적 기억과 목격, 사변적 서사 등으로 접근하는 작가들의 실천', 그리고 '진상규명활동 등을 병행해오고 있는 기관 실천이 과연 정말 행동과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가를 물어가는 글'이었다. 계엄과 맞물린 상황에 글을 쓰면서, 설령 우연일지라도 전시기획자들의 감각적 촉과 타이밍이 남다르다고 감탄했다.
어찌 보면 전시가 다루는 기억과 기록은, 지금처럼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에 맞서고 지켜온 실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쓰는 입장에선 지금의 역동적인 정국을 기록하는 일이 앞선 실천들처럼 넘쳐나는 정보와 사건들에 묻히기 쉬운 경험과 순간을 남긴다는 점에 아카이브 실천에 작게나마 기여한다고도 생각했다. 설령 이 글이 해당 전시가 주목하는 작업과는 다른 갈래의 예술 실천들을 다룰지라도, 전시와 상호 보완하며 독자에게 입체적인 감상을 남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와 아카이브 주체들 역시 광장의 성원이며, 전시 자체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실천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전시가 다루는 아카이브 기관들을 비롯하여 참여작가들 역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폭거와 혐오에 맞서 투쟁과 생존의 현장을 기록하고, 기록을 발굴하며 보존해왔다는 점에 지금의 정국과 무관할 수 없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글을 수록할 수 없다는 입장만 확인해줬다.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유라니, 전시 방향과 상반된 판단 아닌가. 명색이 '기록의 행동주의'를 주제로 삼은 전시가 계엄을 비판했다고 게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재차 이유를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그 뿐이다. 누구의 결정이냐고 물었고, 기획 실무자들은 거듭 어쩔 줄 모른채 사과만 했다. 급진적인 아카이브 실천이라는 전시 방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중립을 운운하며 비평의 자리를 박탈하는 미술관의 납득할 수 없는 판단은 '검열'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주제의 시의성을 별개로 두더라도 해당 전시가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로서는 모험적인 시도였을지 모른다. 아카이브 행위는 다분히 역사성과 정치성을 고려하지만, 이를 '실천'으로 부르며 직접적으로 의미부여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카이브에 초점을 맞춘 공립 시설임을 감안하면 해당 전시는 기획자의 용기와 기관의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술관의 방향성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했다. 과욕이었을까.
기록의 급진적 실천을 주제로 삼는 전시는 정작 동시대 발생하는 현실을 향한 비판적 입장은 담지 않는다. 기록의 실천을 그저 기념비로 의미부여하면서 '깃발'을 꽂고 싶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주변의 기록들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명색이 공립 미술기관에서 정치 비판적 메시지를 '아카이브'라는 울타리로, 전시의 키워드로만 가두면 사정이 달라진다. 지배적인 역사에서 단편적이고 감춰진 기록들을 발굴하는 실천이 현장에서의 급진적 행동과 분리할 때, 기록의 실천적 의미와 급진성은 한갓 폐쇄적인 미술공간의 전시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미술관의 검열은 현장의 급진적 실천을 화이트큐브에 가둘 수 있도록 취사선택하고 살균하며 착즙되지 못한 것들을 배제하는 '수탈'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은 편향된 만큼 고르지 못하며 분석과 진단, 해석 면에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 격동의 정국에 펼쳐진 장면들을 수습하느라 호흡이 가쁜데다, 이 글이 다루는 '지금'은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피드백은 사전에 얼마든지 나눠 수정할 수 있으며, 사후 다른 지면을 통해 후속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그마저도 가로막은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결정은 의견을 나눌 비평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미술기관의 위력행사이기도 하다. 더구나 기록이 어떻게 지워지고 보존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기관일진대, 결정뿐 아니라 결정을 전달하는 방식마저 실망을 안긴다. 어떤 공식적인 서면 기록도 없이 필자에게 구두로 전달한 점은 지금 다시 생각하면 '무례'하다. 전시기획자와 해당 부서의 과장이 이해와 양해를 구하며 거듭 사과했고, 기획자는 끝까지 미안해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실무자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인정을 구할 문제가 아니다. 사과와 수습의 책임이 실무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째서 미술계도 예외가 아닌가.
위기상황에 기록은 긴박한 작업이 되곤 한다.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 역시 어느순간 다른 긴박한 기억들을 만들 수 있음을 유념하는 것이 이번 일에서 얻은 교훈이다. 당시 바이라인에는 '인권활동가'와 '미술비평가'를 나란히 넣었다. 그것이 성소수자 인권운동단체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웹진에 해당 원고를 다시 싣는 배경이다. 원고는 송고한 텍스트에서 크게 고치지 않고 게재했다. 어떤 공식적인 루트로도 공식적인 거절 사유를 듣지 못했기에 사실관계의 오류는 피할 수 없지만, '지금 시점에 계엄을 다뤄 싣기 어렵다'는 구두메세지는 또렷이 박혀 있다.
2025년 4월 29일
비상계엄으로부터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망설였다. 원고를 구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회의 예산 폭거와 국가기관 교란 등을 근거로 들었지만, 전쟁과 내란 등의 비상사태와 현실정치를 구분하지 않은 판단에는 어떤 당위도 보이지 않았고 여론도 설득할 수 없었다. 발표 당일 시민은 계엄군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국회는 신속하게 계엄 해제를 표결했다. 곧장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지만, 그는 헌법적 절차를 따른 것임을 또한 밝혔다. 비상계엄을 '나쁜 수' 정도로 생각한 이의 자세였다. 시민의 저항과 국회의 빠른 결단으로 막았지만, 그는 12월 12일 담화에서 그는 두 시간 계엄은 내란이 아니라고 비토하며 시민의 저항을 도둑질했다. 1
사태의 무게와 시시비비를 저울질하는 일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더불어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격랑의 정세를 진단하는 것도 예술의 행동주의를 논하는 글에서 벗어난다. 다만 남겨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계엄이 화투패처럼 쓰이는 상황은 국민의 주권까지도 쉽게 박탈하고 없앨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가를. 그러니까 ‘나쁜 헤프닝’인양 계엄을 초래한 자와 그의 끄나풀들이 스스로 열어버린 파국의 무게를 축소하려 드는 포스트 계엄의 시대는, 사회가 액체처럼 녹아버리고 형해화하는 이른바 담론으로 쓰인 상황을, 재난이 일상이 되고 부동산 자본의 논리에 터전이 파괴되며, 금융자본의 등락처럼 사람의 무게도 불안정해지는 소위 동시대를 진단하는 현실을 극단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지표가 아닐까. 거꾸로, 계엄은 이러한 사정을 국가가 공인하고, 헌법이 인정하는 정부의 수장이라면 발생시킬 수 있을 또 다른 재난은 아닌가.
물론 시민사회는 한국 근대사에 비상계엄이 십여 차례 발현하는 동안 그로 인한 부당한 학살과 고문을 기록해 온 활동들은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이고 독재의 수행인가를 기록하고 교육해 왔다. 한국사에서 민주주의는 추구해야 할 이상이자 사수해야 할 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10년 사이 시민의 자발적인 요구에 의한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제도화되고 체화되었다고 인지되는 이 상황에 발생한 계엄은 외려 정치공학적으로 소급된다. 여당의 투표 거부로 재차 거듭해서 올라간 탄핵소추안이 300명 중 204표로 가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백골단' 2을 기자회견에 올리고, 서부지법을 폭력적으로 점거하는 이들을 두둔하며, 윤석열의 체포를 막기 위해 수십 명의 의원들이 관저를 지키는 모습은, 계엄이 초래하는 민주주의의 파괴를 경계하는 일보다도 정권과 권력의 유지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언제고 재난이 발생할지라도 정권 사수를 위해서는 책임지지 않을 수 있음을, 정권을 위해서 재난은 묵인할 수 있음을, 오히려 자신들이 초래한 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정권을 잡는 것이 본인의 책임이라는 식의 논리다. 어떤 위기도 불사하며 조장하고서는 시민과 여론의 저항에 부딪혀 무마되면 곧장 본인들이 국정안정을 찾아주겠답시고 권력을 탐하는 모습은 출몰하는 사건들을 밈처럼 증발시키며 불안을 증폭하게 만든다. 국가가 재난을 방기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수준 넘어, 재난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국민에게 각인시키고, 재난이 발생한 와중에도 그것이 재난도 폭력도 아님을 주장하며 재난 위에 또 다른 참사와 혐오를 덧대어 재난의 파괴성과 문제의 심각성을 증발시키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경험되어 판단과 실천을 구성할지 지켜봐야 한다.
단지 계엄이라는 하나의 사태로만 국한할 수 없다. 계엄을 선포하고 처리하기까지 들었던 가벼운 무게는 이미 성원의 삶이 가벼워진 상황을, 목숨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누적해 온 체제를, 이를 주도적으로 제도화하면서 권력을 구조화 해온 국가의 현실을 환기한다. 언제고 계약이 종료되면 터를 옮겨야 하는 불안정 노동과 주거의 상황은, 한편에서 정세와 사건의 파고에 따라 등락을 달리하는 금융과 부동산자본의 그래프에 따라 리듬을 달리하는 세태와 함께 일상을 잠식한다. 여기에 국적과 장애 여부, 성별에 따라 노동을 비롯한 활동의 자격을 부여하고 가치를 달리하는 상황은 몸은 자본에 재편된다는 문장을 실재화한다. 이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단어의 세부에 노동과 주거, 관계의 질서 아래 성원을 체화시킬 뿐 아니라, 자본의 회로에 의해 미디어와 심적 정동이 구성되며, 욕망과 관계, 공동체 또한 계층화되고 구획됨을 시사한다. 사야크 발렌시아가 제창한 ‘고어 자본주의’ 3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그리며 노동의 자리를 노골적인 폭력과 약물산업, 마피아 경제가 대체한다고 진단한다면, 한국 사회는 불안정성 너머 위험과 죽음을 담보하는 노동의 자리에 취약한 삶의 여건에 놓인 이들이 들어서는 형국이 펼쳐진다. 생사를 자본화하고 죽음의 외주화와 참사의 일상화가 지속되며 한없이 성원의 목숨을 가볍게 만든다. 시민의 자격에 위계를 두며 혐오를 일상화하고, 금융 시장 속 투기를 통해 한탕을 노리며, 관심이 돈이 되는 가운데 음모론이 가짜뉴스의 산업이 되고 현실정치를 잠식한다. 공동체의 절멸 속에 분노와 혐오를 양분 삼아 극우를 정치세력화하며 국가와 법치를 폭력적으로 부정하는 이들은, 결국 파국을 초래할 상황을 지속하며 일상을 삼킨다. ‘상사를 죽이는 멕시코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국인’이라는 농담이 농담만은 아니다.
이러한 시국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글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맞은 12월의 상황은, 예술의 액티비즘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예술의 실천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성원들이 그저 체제에 체화하며 종속된다고만 이야기할 수 없다. 가벼워진 삶은 그만큼 이동과 연결에 용이해지면서 위험과 불안에 대처하는 기예와 전략을 구축하는 여건을 제공한다. SNS를 바탕으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연결되며, 공동체의 양상을 재편한다. 발화할 수 있는 언어와 채널을 확보한 이들, 기성의 공론장에서는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 발언을 하더라도 야유와 악플에 헤프닝처럼 지나가는 이들의 언어는 모이고 환류한다. 예술의 액티비즘 역시 2016년 이광석이 조명했던 ‘변경, 옥상, 망루, 철탑’ 4의 공간으로 소급되지만은 않는다. 2024년의 한국 사회는 그가 자립과 변경의 ‘옥상미학’을 다루며 당대 예술의 행동주의 실천의 확장을 목도하고 그 너머를 상상한 것 이상으로 양태와 복잡성을 달리한다. 2005년부터 이어진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2007년부터 이어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2009년의 쌍용자동차 투쟁과 용산참사, 2010-2011년의 한진중공업 고공농성,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22년 이태원 참사, 2009년의 두리반 투쟁과 2018년 을지OB베어 투쟁, 2001년부터 이어지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2023년부터 이어지는 용주골 강제 폐쇄 반대 투쟁, 2024년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고공농성 등, 당장 떠올릴 수 있고 여기에 적지 못한 것이 더 많을 수많은 투쟁은, 말 그대로 변경과 옥상, 망루, 철탑에서 이어지는 농성과 시위가 이어졌던 현장이자, 사진과 문자, 영상기록이 SNS를 바탕으로 그것이 유통되고 공유되면서 시민들도 그 내용과 무게를 알 수 있도록 해왔다. 점거와 농성 등의 고군분투는 홀로 그 짐을 지더라도 주변의 조력자와 동료 활동가들의 지지가 필요하고 그들이 SNS와 언론을 통해 사태의 현실을 알리며 사람들에게 변화와 참여를 유도한다. SNS를 통해 투쟁이 알려지고, 투쟁이 재현의 소재이자 전시로 가공되는 생리는, 의제를 알리기 위해서는 현장과 시공간의 거리를 둔 이들, SNS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의 관점을 전제한다.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특정 의제를 환기하는 작업의 경우에는, 그것이 전시공간에서 어떻게 시각적으로 보일 것인가와 더불어, 전시한 작업 자체를 기록하고 외부에 환류하는 방식을 강구하게 된다. 작품의 물성과 촉각성, 시각적 형식과 방법론이 그것이 보이고자 하는 내용과 메시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 작가들이 규범적인 미술환경과 제도적 공간에 일정 부분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활용하여 바깥의 의제들을 미술계 내부로 끌어올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작가 스스로 기록노동자나 현장 활동가, 출판과 디자인 등으로 입지를 다지면서 협상력과 독립성을 확보하여 창작물을 통해 운동사회와 미술계, 관객과 대중에 접촉면을 만드는 삶의 양식을 고안해낸다. 하여 오늘의 행동주의적 예술 실천은 내부 제도에 의존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협상하며 제도 자체를 문제 삼는다. 현장의 역동과 무게를 담는 작업은 SNS의 피드와 기록의 문법에 체화하며 투쟁이 발생하는 장소 특정성에서 이탈하고 현장과 화이트큐브 안팎을 오가며 서로를 호출하고 때로는 불화한다. 그것은 사회운동에 참여하면서도 그로부터 거리를 두며 자율적인 형식을 분기하는 급진적 예술 형식을, 제도와 단절하지 않으면서도 그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며 언제는 비판과 수정을 요구하는 예술가의 고투를 담는다. 적어도 예술의 액티비즘, 또는 행동으로서 예술은 그로부터 논의되어야 한다. 5
무능과 대상화, 딜레마를 직시하며
재난과 트라우마적인 사건은 정동을 일으킨다. 슬픔은 집단을 결집하여 애도하고 예술은 살아남은 이들과 희생자를 기억하는 이들, 혹은 망각 자체에 귀를 기울인다. 이들의 예술 실천은 상흔을 더듬으며 치유의 효과를 내거나, 관계의 형식을 고안한다. 재난과 파국을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전유하여 대안 서사를 쓰거나 대안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사변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더러는 행동을 통해 현장에 개입하며 수정과 해결을 요구한다. 이는 또한 사건의 시시비비를 묻는 일에 국한하지 않으며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묻고,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구조를 통찰하여 함께 문제 삼을 이들을 찾는다. 사건은 다른 사건과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이 구조적인 불평등과 착취에서 발생함을 알게 된다. 더불어 죽음이 다른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지금의 삶들이 먼저의 죽음들에 연루되어 있음을 감각한다.
예술로 실천하는 방식에 대해 당장 떠올리기 쉬운 예시는 현장에 참여하는 예술 행동이다. 예술가는 현장에 참여하며 투쟁을 기록하고 묘사하거나 극적으로 무대화하며 제 역할을 한다. 아니, 말처럼 매끄러울 수만은 없다. 선전의 장치로 쓰이는 작업은 사건에 장식적이고 주변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치지 않을까. 운동의 관성적 언어와 문법에 낯선 감각적 표상과 표현을 적용하는 일은, 그저 부수적인 도구라는 피상적 비판에 갇히지 않을까. 기존 구호와 음악, 집회의 방식을 전유하는 일은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이 체제에 인정받는 시민의 자격을 전유하여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현장은 이미지와 문자 기록뿐 아니라 공연, 선전, 사회운동의 역할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기능과 역할을 혼성적으로 분담하거나 협업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기획과 준비, 진행과 정리에 따르는 의사결정과 더불어 어떤 언어들이 들리게 할 것인지 논의하는 일은, 투쟁의 목표뿐 아니라 투쟁하는 공동체의 민주적 의사결정으로서 민주주의 실천까지도 제고한다.
허나 또 다른 부침이 있다. 예술이 저항과 투쟁을 소재로 삼을 때, 예술가는 대상화를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예술'이라는 테제는, 예술이 부수적으로 여론을 주도하기 위한 선동의 도구가 되거나, 비평적 관조의 위치에서 소재를 선별하고 이를 재현하는 특권적 주체가 되면서 정치적 사건의 무게를 예술이 수탈하리라는 우려가 있다. 공동의 투쟁이나, 발언권을 갖지 못한 이의 서사와 얼굴을 작가 개인의 작업으로 가져가는 일은, 그 자체로 미술계를 광장으로 연결 짓고 열어내는 의의를 갖지만, 공동체의 자산과 타인의 취약함을 예술의 몫으로 미학화하는 우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곧 운동의 방향성에 반하는 예술로, 무능하고 무력하여 언제라도 체제의 도구로 전환할 수 있는 예술의 취약함을 다시금 마주하게 만든다.
현장을 기록하고 이를 비평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은 사건 의존적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투쟁의 성패에 따라 재현의 위상과 해석은 달라진다. 2009년부터 시작한 콜렉티브 리슨투더시티는 개발로 파헤쳐지고 터전을 잃으며 더러 생명을 박탈당할 것들을 그리고 백서와 도감, 전시의 방식으로 이어간다. 작업은 농성장과 철거 지역, 생태가 훼손될 지역으로 이어가며 장애인과 개발로 터전을 빼앗긴 원주민, 비인간 (무)생물과 더불어 투쟁하는 이들, 자신들처럼 투쟁현장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예술인을 잇는다. 그의 궤적에는 부동산과 금융 논리에 훼손되고 매끈하게 채워진 도시와 토목의 풍경이 함께 한다. 개발과 파괴를 전후의 풍경으로 대치하는 일은 그의 작업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승자의 역사로부터 무언가 있었음을 기록하는 작업은 하지만 그것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음을 예비한다. 그림과 전시 등 감각적 기록이 남은 현장에는 보가 놓이고 흐르던 물이 고이며 주변에는 큰 도로와 아파트가 들어서고 근린 시설이자 친환경 공원이 구성될 것이다. 녹색으로 윤색되어 가는 현장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일은, 투쟁의 피로와 기록의 무력함을 담지만, 한편으로 동시에 파괴된 것의 이미지를 취해 물화하는 것은 아닌지, 개발된 도시의 경관이 파괴한 과거의 터전으로부터 피상적 이미지와 담론을 발췌해 개발 전 돌아올 수 없는 시공을 미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무엇보다 전시를 보고 도감과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에 대한 책임과 고통을 직시하는 일에 대해 보상처럼 작동하면서 의도를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우려를 예비해 두는 것은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열린 태도를 갖는 미술 공간이 끝내 놓지 말아야 할 비평적 태도이기도 할 터.
양효실은 페기펠란을 읽으며 퍼포먼스를 설명하는 글에서 ‘퍼포먼스의 힘은 바로 퍼포먼스의 무능, 궁핍에 있다’고 말한다. 6 주어를 '예술'로 바꿔도 문장은 유효하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자. 예술의 무능이 타인의 언어를 빼앗고 착취하는 동기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타인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라면, 그에 따르는 부채와 책임 또한 대상으로 삼으며 주객을 구분하는 규준들로부터 어떤 틈새를 내고 감각의 역량을 출현시킬까. 작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거나 작업 형식으로 이어내는가.
2020년대부터 회화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노예주는 투쟁 현장에 참여하면서 주장하는 내용과 구호뿐 아니라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과 그 현장을 그림에 담는다. 사실적인 묘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현장 속에 있음에도 온전히 밀착할 수 없는 관찰자로서의 화가를 회화로 표현하는 일은, 예의 재현적 거리를 탈색하고 공백을 남기며 때론 화면 위에 몸의 흔적을 격하게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기록의 무력함과 그 무력함까지도 기록하는 일을 창작의 모티프로 삼는 이는, 온전히 재현할 수 없지만 함부로 변형할 수 없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재현의 윤리와 창작의 감각을 살피며 하나의 화면 위에 펼친다. 참여하면서도 관찰하는 이의 딜레마를 시각예술의 형식으로 고안하는 방식은, 기록하는 이로서 반성적 의식화를 회화적 형식으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무력함의 역량을 인지하는 작가들은 현장에 일체화가 될 수 없는 관찰자로서의 한계와 자조적 위상을 직시한다. 기록과 재현의 역량을 미적으로 시각화하는 일은 이 부정성에 바탕한다. 가령 안지환의 영상작업 〈행진대오의 죽은 원혼들〉(2022)은 지금 싸우고 싸우다 먼저 간 이들을 찾으며 느끼는 부끄러움과 닿지 못하는 한계에서 시작한다. 그는 강도 높은 투쟁 현장에서 마주한 비현실적 풍경을 떠올리며 열패의 기록에 픽션을,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투쟁 현장을 잇는다. 관찰자의 시좌가 홍진훤의 이미지와 영상에 이르면 투쟁의 주체가 사후적으로 위계화되어간 시간을, 기념비가 되어버린 승리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복원할수록 삭제되는 어떤 세계’ 7의 추적으로 이어지며 기록과 관찰의 한계와 부정성으로부터 비평적 시선을 세공한다.
한데 기록과 관찰로서 예술을 객관적 거리에 바탕하는 참여 관찰적 기록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부당한 지점이 있다고 항변하지 않을까. 작가들은 예술이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고립된 공백과 순수의 장소라는 점에 저항하거나 개입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예의 프레임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원론적 구분을 탈구하는 실천은 현장의 창작자와 기록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대중매체가 다루지 않고, 국가가 외면하는 현장에서 기록을 수행하는 일은, 승자의 역사가 외면하는 비시민의 얼굴을, 미등록과 말소의 시간을, 이를 부정하는 집단의 행동을 기입할 뿐 아니라, 내부로 난입하는 일을 자임하기도 한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공동정범〉(2018)은,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참사 이후 형을 마치고 돌아온 생존자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상대에게 갖는 불만 너머 봉합할 수 없어 보이는 시간과 기억 속에 서로에 대한 반목과 불신에 주목한다. 이는 앞서 용산참사의 현장을 재구성한 전작 〈두 개의 문〉(2012)에서 생존자와 활동가들의 증언과 재판기록을 자료로 삼아 사건을 추적하고 재연하며 종국에 국가의 공권력이 어떻게 참사를 반복하는가를 다룬 일의 연속이면서도, 참여관찰과 동시에 예의 불구덩이에 개입하는 일 자체를 작업으로 삼는 도약을 시도한다. 제작자로서 이들의 역량은 생존자들을 불화에 대면토록 하고, 그들의 날 선 언어를 서로 듣게 하는 데 있다. 8 그저 사회를 바꾸고 보존하는 행동뿐 아니라, 행동하는 이들에게 발생하는 내부의 갈등과 관계까지도 재고하는 점은, 이들이 관찰자와 동시에 현장에 참여하는 이들로서 싸우는 이들을 동료로 삼고 관계에 대한 책임을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령 화해와 봉합이 불가능할지라도, 이는 예술의 무용함과 기록의 역할의 딜레마로부터 예술가가 어떤 책임을 더 확장하고, 그것을 어떻게 활동이자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이어낼 수 있는가를 환기한다.
광장의 예술가는 현장의 분위기를 포착하고 구호를 감각적인 형식으로 가공할 뿐 아니라, 주체의 출현을 발견하고 해석하며 다시 재현해 무대에 올린다. 채집과 창작, 해석의 행위가 이어지는 매개로서 예술 실천은 기성 체제의 한복판에 들어가 변경의 언어를 전달하고 설득하고 가시화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하면서 현장 바깥의 장소에 이를 전시하고 확산할 수 있다. 그런 점에 예술가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현장이 아닌 시공간에서 현장을 상연하고 이를 다시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더불어 관찰자이자 현장 참여자 사이에 균형과 긴장을 의식하면서, 그저 싸우고 지킬 뿐 아니라 투쟁의 성패를, 투쟁 이후의 시간을 견디고 이를 남긴다. 사회운동의 방식을 취하거나 그것에 기여하고 협력할지라도, 예술의 액티비즘은 투쟁의 형식과 재현에 대해, 운동이 삼은 목표에서 누락한 것에 대해, 혹은 운동 이후 기록하거나 기억하지 못한 시간성에 천착한다. 하여 예술가는 운동과 같은 방향을 향하면서도 그것이 운동의 주변을 맴돌거나 평행선을 그리며 예술 실천이 항상 사회운동과 같이 기능을 가질 수 없음을, 그럼에도 이를 통해 투쟁의 이전과 이후를 마주하고 열어낸다. 그는 예술의 무력함을 감각하고 현실의 견딜 수 없는 부정성을 안으며, 과거가 되어버린 사태에 뒤늦게 찾아와 미래로 가장 먼저 도약한다. 그는 재현적 파국으로부터 기회의 틈새를, 잔존하는 빛을 찾는다. 미술 공간과 제도에 개입하면서 사라진 것의 흔적을 남기는 일은, 작업의 비평성을 연장하면서도 전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미래의 관객을 위해, 더불어 미래의 보존과 보존 너머 체제를 바꾸기 위한 투쟁의 모티프를 얻을 관객을 기다린다. 그 과정에 그들은 현장뿐 아니라 미술 제도와 공간을 통해, 혹은 이들을 활용하고 포섭하며 자신들과 같이 다른 장소에서 싸우고 싸움을 기록하는 다른 이들의 신호를 만나기도 한다. 하여 지금의 작업은 파괴의 사후적 수행일지라도 미래를 미리 조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확정성을 담보할 수 없고 우연적이며 언제고 미끄러질 수 있을지라도, 예의 불확실성과 무력함을 작업을 지속할 동력으로 전환한다.
당사자성, 이라는 고유성과 고립에 대하여
사라지는 시간이 있고, 역사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기억의 자격을 심문조차 받지 못하고 각하된 것들이 있다. 싸워서 지켜낸 것들이 있고, 지켜내지 못한 것이 있으며, 지켜내지 못한 것들을 기억하는 이 또한 있다. 지켜낼 것인지조차 판단의 자격을 갖지 못한 채로 오욕 속에 오랜 시간 낙인의 대상으로 고착된 것들은 늦게나마 이름과 외피를 얻는다. 파괴와 망각, 수탈과 착취에 맞선 보존의 쟁투로서 예술적 실천을 논하는 작업은, 그 너머 새로운 주체들의 출현을 알린다. 이미 존재했지만, 과거에 머물러 잊혀버리기 쉬운 것들은 미래로부터 찾아온다.
뾰족하게 출현하는 이는 기울어진 인식과 편견의 여과망을 어떻게든 뚫고 나온다.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SNS는 자신의 안전과 적당한 익명성을 담보하며 발언권을 쥘 수 있다. 하위주체로 스스로를 자각하고 정체화한 사용자는 자신의 언어를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으며 상대의 언어와 문화를 미디어 리터러시와 함께 학습한다. 취약한 삶들이 발언하며 서로를 발견하고 군집을 이뤄 결사(結社)하며 집단의 행동을 도모한다. 주디스 버틀러가 집회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우발적인 형태의 행위성들이 ‘문화, 권력, 담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규약들의 내부로부터, 갑작스러운 일탈로부터 출현한다’ 9고 언급한 문장의 주변에는 출현한 이들과 공간을 점하고 함께 호흡하며 그들을 포착하고 듣는 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술은 관찰하는 이와 참여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피며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발견하고, 이를 감각적 형식으로 분기시키는 역할을 이행한다. 이를 좀 더 보충하기 위해서는 집회를 진행하는 광장 뿐 아니라, 광장안팎에서 무엇이 이뤄지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예컨대 온라인 환경과 광장에 출현하기까지 동시대 담론을 서로 간 학습하고, 인권·사회운동이 조직화되고 이들의 소식 또한 유통되는 환경 속에 투쟁의 현장을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연결하며 소식을 주고받는 사회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다만 발언할 자리와 매체를 확보한 이들은 사회에서 인지되고 인정받는 위상 사이에 낙차를 경험한다. 페미니즘, 퀴어, 장애, 이주의 키워드는 새롭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 시민권으로 접근할 때 불완전하고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이는 당사자성을 바탕으로 운동을 만들고, 예술을 실천하는 동기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페미니스트와 퀴어, 장애, 북한이탈주민을 비롯한 이주민 등 당사자 작가의 등장은, 미술의 소재적 분과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의심을 항상 대면하게 만든다. 예술가의 주체성만으로 투쟁의 성격을 가질 수 있을 때, 액티비즘과 예술은 동어반복적인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닌가. 자기 서사에 기반하고 천착한 작업은, 삶의 고유함을 시각화하며 사사로운 삶들을 공적인 사회에 침범하고 오염시키며 재차 시민의 위계와 규범을 문제 삼고 변화시키는 의의를 갖지만, 동시에 제 서사를 가시화하는데 있어 예술을 도구 삼고 있지 않을까.
사회적 소수자성을 갖는 이는 자신을 피해자의 프레임에 넣고 형식화하는 외부의 프레임과 유혹에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이는 또다시 예술을 빌어 수세적으로 기념비화하는 시도는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이미 오래 전 할포스터는 ‘다르지만 아주 타자적이지 않은’ 하위문화가 기호와 상품에 위반적인 위상을 점하면서도, 위반으로서 이미지라는 이중의 약호화를 시도한다고 분석했다. 10 그것은 하위문화 자체를 규범적 체제 안에서 물신화하기 쉬운 방식이기도 하다. 그의 통찰이 40년이 지난 지금, 예의 탈식민주의 문화비평은 다른 물음으로 분기하지 않을까를 조심스럽게 진단케 한다. 하위문화의 성원들이 SNS를 통해 발화할 수 있을 때, 그가 언설과 표현에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규범적 문화와 제도에 입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일탈적이고 불화하는 사물과 인간, 비인간 생명체들이 발굴되고 발굴하며 자신의 존재를 주창하는 것을 허용하는 채널이 예술로 한정될 때, 그들에게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많지만 그것이 하위문화적인 것으로 주변화 되거나 으레 ‘운동권’ 언어로 구획될 때, 이른바 ‘행동주의 예술’, ‘포스트 민중미술’ 등으로 분과화하고 ‘퀴어 미술’, ‘장애 예술’의 세부 항목으로 구획하며 실존을 약호화하고 사건을 축소하며 투쟁의 제스처를 예외적인 무대로서 예술로, 그러한 수행성을 물적으로 지원하는 허락된 채널로서 예술이라는 규범적으로 인정된 예외성으로 수렴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이야기하면, 물신화의 방향은 거꾸로 하위문화 안에서 예술을 페티시의 도구로 삼게 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것은 당면한 현상보다는 의심과 우려에 기반하여 수세적인 방향으로 진단한 추론이다. 다만 예술적 실천이 한시적으로 사람을 모으며 공론을 창출할 수 있는 광장의 성격을 점할지라도, 영세한 창작자들이 기금에 의존하는 상황과, 장애 예술정책이 여전히 시혜적인 복지 차원의 정책의 그림자에 놓인 상황에서 언제라도 고립되고 틀지어질 수 있는 여건은 예술로 하여금 스스로의 물음을 떠안도록 한다.
물론 예술은 제 자조적 행위성을 승인하는데 그칠 수 없다. 무용함의 공백으로부터 액티비즘 예술은 다른 얼굴과 몸짓을 만난다. 직접적으로 사회운동을 자처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몸이 사회에서 난잡하고 문란하며 더럽고 범죄화의 타깃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하며 이를 작업으로 삼는 일은, 사회와 예술 안팎으로 반목과 조우를 꾀하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작가와 모델, 작가와 비인간 생물/사물,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교섭하고 위상을 조정하거나 역전하는 실천을 잇는다. 증언과 고백으로서, 자신의 서사와 개인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존해야 하는 관계와 커뮤니티, 제도와 장치들은 그의 서사가 올곧이 설 수 없음을, 연루와 연결에 기반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최근 포스트 휴먼과 페미니즘, 기후와 노동의 사유들은 신체의 객체성을, 주체의 취약함과 결핍으로부터 타인과 사물 간 연루와 연결을 활성화한다. 흑표범은 비인간 작은 생물과 이를 의태하는 몸짓을 통해 그것을 알린다. 그는 미술의 범주 너머 공동체에 제안하고 손을 내밀며 네트워크를 넓힌다. 김화용이 동물권과 기후정의, 노동의 권리를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독파하는 전시적 기예는 미술작가뿐 아니라 연구자와 활동가와의 협업으로 나아간다. 이는 교육과 캠페인의 현장으로서 전시장을, 전시가 발생하는 공간을 프로파간다를 표출하고 생성하는 공간으로 상정한다. 관객 또한 시각예술의 감상과 참여를 바탕으로 문자 기반의 의제를 감각적이고 다른 시간성과의 교접을 통해 확장한다.
예술은 다른 주체들을 조명하는 무대를 구성한다, 그리고 곧장 예술은 이들이 전유하고 점유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스크린과 무대를 가로지르는 작업은 최근 여성 장애인과 트랜스젠더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시도된다. 특히 장애여성공감의 ‘춤추는 허리’는 여성장애인이 여성운동과 장애운동을 통한 메시지 외에 그들이 예술을 향유하고 실천하는 주체로서 어떤 관계성을 가질 수 있고, 어떻게 몸의 문법을 공동으로 만들 수 있는지 무대를 실험 삼아 수행한다. 이는 장애예술공감이 20주년 선언문에 선포한 바 있는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11를 상기시키면서도, 동료와 그 관계들이 만들어낼 공동체를 발명하는 과정에 미끄러짐과 유머를,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살피는 작업으로 상호적 간섭에 바탕하는 정동의 폭을 넓힌다. 귀를 기울이며 다른 몸짓을 상상하는 일은, 그저 장애인 여성/퀴어가 갖는 특수한 신체적 특성으로부터 표현 되는 몸짓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몸을 드러내고 말을 하는 일이 그저 혼자의 능력으로 가능할 수 없음을, 자신의 주체적인 표현을 위해 돌봄과 지지가 필요함을 역설하며, 나아가 규범으로 지각하기 어려운 외모와 매력의 정상성에, 일할 수 있는 몸의 규범성에 개입하고 재고할 수 있는 틈을 연다.
예술에서 당사자성은 특정한 성격을 갖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몸으로, 다른 매체를 통해 재현하고 증언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창작자와 다른 모델이자 소재로 채굴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고, 그들이 무대를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낸다. 실수와 일탈을 관리하고 봉합하기에 앞서 경청할 것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무대는, 현실과 분리된 장소이면서도 책임과 역할을 나누는 일을 미리 연습할 수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박탈당한 시간을 다시 공동으로 생성하는 실험의 현장으로서 무대는 퀴어한 사태가 출현하는 공간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상실과 철저한 대상화로서 수치심과 우울, 공백의 자리에 펼쳐지는 거칠고 불연속적인 언어들을 마주하며, 관객들이 어떻게 관계성을 성찰하고 상상할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자리로서 무대와 전시를 상정한다. 그렇기에 예술에서의 당사자성을 그저 실존으로서 개인을 드러낸다고 기술하는 일로 그칠 수 없다. 적어도 당사자성을 고찰하는 일은 어떤 관계성 위에 그의 출현이 가능했는지, 그것이 어떤 역사적 계보를 갖거나 그러지 못하는지를 함께 살핀다. 당사자성을 바탕으로 사람을 모으는 일은, 예술 현장을 한시적인 공동체로, 기존 공동체의 점거로서 효과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친밀함과 긴장을, 협상과 불편을 숙고하도록 한다.
'형식의 가벼움'과 장치들
무대와 광장은 서로를 보완하며 환유한다. 광장에도 무대가 마련되지만, 광장이 여의치 않으면 무대와 공연장은 관객을 호출하며 광장의 역할을 하고, 광장의 무대가 설치되지 않더라도 어느 곳이든 무대로 삼을 수 있다. 광장을 구성하는 성원들은 대부분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참여하지만, 이들은 현장에서 배포하는 피켓과 선전물을 들고 판매하는 선전 용품을 구입하면서도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표식이 새겨진 사물을 통해 결집한다. 좀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면, 무대와 광장은 점거와 농성이 이어지는 공간으로, 그들과 광장, 무대를 SNS로 잇는 네트워크와 스마트폰의 화면으로 확장한다.
이번 계엄 상황에서 응원봉은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이는 2030 여성들의 두드러지는 집회 참여와 함께 엮인다. 이미 케이팝K-POP 팬덤은 오랜 시간 이어지며 문화가 되고 시장을 만들며 군중을 형성해 왔다. 팬덤은 아이돌 기획을 가능케 하는 자본의 공급처이자 지지 공동체이며, 아이돌과 기획사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12집회에는 팬덤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일사분란하게 이동하며 구호를 외치는 훈련이 유효한 기예가 될 수 있다. 세간에는 갑자기 등장한 응원봉과 더불어 2030 세대의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주목하지만, 이와 별개로 응원봉이 갑자기 촛불을 대체하게 된 현상 역시 나란히 짚어야 한다. 충전하면 오랜 시간 꺼지지 않으며 높은 조도로 발화할 수 있는 효율성과 시각적 효과뿐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팬덤의 일부라는 표식은, 기존 아이돌 팬덤에 대한 비하적이고 가치 절하된 평가를 전유하는 주체적인 행위의 일환이기도 하다. 어두운 콘서트장에 빛나는 수천, 수만 개의 응원봉이 집회에 나온 것은 무대와 광장이 상호 호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응원봉과 함께 짚어야 하는 것은 깃발이다. 운동문화에서 조직의 정체성을 시각화하는 선전물로서 깃발은 언급하기 새삼스러울 만큼 익숙한 집회 도구다. 그것이 2008년 한미FTA 반대 집회 당시 ‘깃발 내려!’의 구호와 함께 조직에 묶이지 않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했다면, 2016년대 박근혜 탄핵 국면 당시 ‘아무 깃발’들의 집단적인 등장은, 소위 운동권의 기호를 전유하고, 사회운동과 불화하지 않으면서도 광장의 일원임을 알리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매김한다. 13이는 기존 선전이 품어온 진지함을 온라인 주접 댓글과 밈의 가벼움으로 호환하는 사례일 수 있지만, 깃발이 지닌 무게의 스펙트럼은 가벼움과 무거움, 조직과 각개의 개인으로만 세어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성소수자의 경우, 이번 윤석열 탄핵 정세 속에서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의 연대체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을 중심으로 구성한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이 기획한 ‘무지개존’은 성소수자 인권 단체뿐 아니라 퀴어 동아리와 특정 정체성, 그저 퀴어가 들어간 연고 없는 문구로 제작된 깃발들이 군집을 이루며 성소수자뿐 아니라, 집회에 참여한 수 많은 군중을 둘러싸며 울타리를 형성하는 풍경을 펼쳤다. 이는 사전에 사람들과 평등과 반차별을 약속하는 집회문화의 변화에서 나아가, 이곳을 성소수자가 점하고 있음을, 성소수자도 당신과 함께 변화에 참여하는 시민의 일원이고, 집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미한 사고를 대비하여 안전을 보장하는 공간이자 퀴어한 만남과 경험이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현재의 도래를 가리키는 시각적 지표가 되기도 한다. 14
깃발은 좌표의 기능을 한다. 서로 다른 신체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동류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이미지이자 사물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만, 개인을 보이기는 부담스러운 환경에서, 반대로 자신의 정체를 쉽사리 드러낼 수 없는 현장에서, 집단이 함께 모이고 섞이며 집단적 실존을 드러내면서도 불이익을 받지 않으리라는 안전의 신호가 된다. 높은 위치에서 펄럭이는 깃발은 바깥에서 보고 찾아오거나 멀리서도 의식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능과 더불어, 집회에서 공동의 요구를 발화하는 일원임을 공표하는 점에 시민권을 행사하고, 당사자 너머 다른 집단의 이들과 주장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 커뮤니티와 네트워크의 기능 또한 갖는다.
서울퀴어콜렉티브가 2022년 탈영역우정국에서 진행한 전시 《FREAK FLAG FLY》에서 보인 깃발의 행렬은, 정상적 규범성의 공간을 한시적으로 점거하는 이들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는 비정상과 일탈의 표상들이 결집하고 점거하며 연결의 풍경을 그리기까지 사회운동의 시간과 습속이 형식적일지라도 군중의 문법이 되어왔음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여서 어떤 방식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호흡을 맞추기 위해 구호와 공연, 발언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은 고리타분할지라도 운동의 문화가 기능하기에 가능하다. 사사로운 것으로 미뤄지고 잊히기 쉬운 몸들을 공동체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저 낯선 언어로만 환기할 수는 없으며, 소위 규범의 장치들, 상징계의 언어들을 전유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렇기에 이 기호들은 특정한 주체의 전유물일 수 없으며, 설령 한시적으로 소유와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교란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응원봉과 연결되는 케이팝 시장은 퀴어의 하위문화들을 상당 부분 차용하고 전유한다. 보깅과 와킹 등의 퀴어 볼룸 씬에서 태동한 춤과 더불어 산업에 종사하는 퀴어 당사자들의 존재와 더불어, 아이돌을 퀴어커플로 설정하고 가상의 서사를 생산하는 알페스와 BL문화 등을 향유하는 팬덤은 이미 퀴어적 실천에 닿아 있다. 물론 케이팝 산업이 퀴어문화의 기호들만 차용하고 퀴어 당사자의 시민권과 불평등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않는 퀴어베이팅은 위계 아래 자행되는 일방적인 차용이라는 점에 문제 삼아야 하지만, 특정 문화의 코드와 습속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12월 21일 응원봉과 깃발은 농민들의 트랙터를 만난다. 윤석열이 첫 번째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을 12월 3일 쿠데타가 발생하고 한덕수 권한대행이 거부한 상황에 분노한 농민들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등을 중심으로 ‘전봉준투쟁단’을 꾸리고 트랙터 행진을 벌였다. 16일부터 진주와 무안 등에서 서울을 향해 출발한 30여 대의 트랙터는 서울과 과천의 경계에 있는 남태령에서 경찰차에 막혔다. 전봉준투쟁단이 SNS에 올린 호소문이 100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시민들은 남태령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응원봉을 들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고 발언을 이어가면서 길을 열 것을 밤새도록 요청하고, 경찰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길을 열었다. 현장에 트랙터를 몰고 왔던 강광석 님이 25일 페이스북 개인계정에 남긴 ‘28시간의 남태령’ 15은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받고 공유되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깨우친 것들을 정리하는 글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말미에 남긴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이었다. 그는 이 낯설고 벅차오르는 광경을 보며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다고 회고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의 무거움’에는 삶을 박탈하고 배제함으로써 가볍게 만드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이 가벼움은 일차적으로는 응원봉과 집회에서 활용하는 선전물과 구호, 음악 등의 전반적인 분위기뿐 아니라, 시민들이 갑자기 몰려들 수 있는 기동력과 정동을 배경으로 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활을 걸고 몰았던 트랙터는 응원봉을 만난다. 고가의 농기계는 농번기에 돌아가며 사용한다. 항의를 위해 도로를 점하면 경찰들은 안전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파괴한다. 여기에 가세하는 응원봉은 생계와 노동의 생산도구가 애정을 표시하는 집단의 사물과 조우하는 객관적 사실을 초과한다. ‘남태령 대첩’으로 불리는 현장의 우연한 조우는, SNS의 언어를 매개로 콘서트와 점거가, 노동과 팬덤이, 나아가 가부장적(이라고 고백하는) 농민운동이 SNS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퀴어와 여성의 급진적 몸들에 휘말리는 지점이자 반대로 그들의 몸이 무엇을 바탕으로 기본적인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지 학습하는 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가벼운 사물들은 그간 투쟁현장에서 선전을 위해 임시방편의 재료들로 제작해온 창작의 문화로서 애드호키즘(adhocism)과도 연결성을 갖는다. 16 가벼운 사물과 형식을 좀 더 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삶이 가벼워지는 저마다의 상황들과도 연결할 수 있다. 불법 촬영의 대상으로 착취당할 수 있고, 언제라도 갈아 치워질 수 있는 일터에서 일하며, 이윤의 논리 아래 기반산업을 가치절하 하면서 농어업 노동자의 생계가 위기에 직면하며, 찬반으로 삶의 근본부터 구획되는 이들, 유동적이고 언제든 흔들리고 무너지기 쉬운 이들의 투쟁은 가벼운 선전의 도구와 장치, 채널을 참조하고 활용한다. 이는 기존의 투쟁처럼 사상과 목적성을 갖기보다 상이한 이해관계와 세계관이 조우하고 불화하면서도 그로부터 새로운 언어와 우연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미래를 예비한다. 예술은 ‘ㅇㅇ계’로 표현하는 분리된 양태의 씬과 시중에 명멸하는 유행과 디지털 밈에 접속하며 낯선 타인과 그 문화를 연결하고 이해하는 통로이자, 이해해야만 하는 과업을 또한 안게 된다.
접근에 대한 소고
예술의 울타리에도 내부의 반목과 불화가 거듭한다. 예술계의 위계와 절차를 문제 삼는 일은 근래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 예술계 미투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그것이 창작과 전시환경에서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못했던 구조적 위계를 수정하기 위한 시도들로 이어졌다. 이는 예술제작과 향유의 환경이 얼마만큼 분배와 접근성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도출하고 직접적인 해결을 모색하게 하면서도, 여성과 퀴어, 장애 미술에 대한 담론적 접근과 제도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미적 실천과 향유의 접근에 대한 성찰은 좀 더 급진적인 언어들을 고안한다. 이는 복지 차원에서 장애 접근권을 넓히거나 동시대 미술의 분과항목을 하나 더 늘리는 일 너머, 정상성의 신체 규준으로 설정된 전시 기획과 작품 제작, 감상의 환경을 되묻는 것이기도 하다. 다이애나랩과 한국농인LGBT+와 같은 콜렉티브는,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각각의 구성원이 장애당사자로서, 미술계 종사자나 창작자로서 이른바 감각을 전환하고 번역하는 일을 모색한다. 이-무-기 프로젝트가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업소와 오랜 시간 몸담은 이들을 주류 예술 무대에 올리는 작업과, 무대에 세월호 유가족과 장애 여성, 드랙퀸과 트랜스젠더를 연출자와 배우로, 극작가와 관객으로 초대하고 제작의 동료로 삼는 고주영 기획자의 〈연극연습 프로젝트〉를 비롯한 근래의 무대들은 무대에 서는 이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살피도록 하면서 예술의 접근권이 기성의 규범적이고 제도적인 장소와 문법에 단어와 장치를 추가하는 일 너머 감각의 번역과 확장에도 연결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특정한 손상과 변형, 타인과 장애의 감각은 기존의 제도와 문법에 간섭하고 필요하면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무대의 속성은 그들에게 한시적이고 단절적이며 예외적으로 제공되는 이벤트는 아닌가 하는 질문 또한 피할 수 없다. 무대가 예외적이고 특권적이라 한다면, 그것은 현실의 속성들을 참조하고 재현하며 대상화하고 수탈하기가 쉽지 않을까. 하지만 거꾸로 무대의 속성을 빌어 하위문화의 언어를, 망각 되고 억압되어 잊히거나 오욕에 사로잡힌 것들을 빈칸과 물음표의 형식으로,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서사로 만들어 미래의 무대를, 혹은 이후의 광장과 커뮤니티를 예견할 수 있지도 않을까.
물론 그것은 행정과 예산이 드는 문제이다. 대개의 제도적이고 규범적인 장소들은 그러한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 쉬운 해설이나 문턱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애초에 그러한 공간을 미리 설계한다. 화장실 역시 성중립 혹은 젠더프리 화장실을 구성하는 시도들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으로부터 영세한 전시 공간들의 접근권은 구성이 쉽지 않다. 급진적인 메시지를 전시할지라도 이를 수행하는 이들의 경우 접근성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접근성의 계층화로 주장한다면 접근성이 물리적인 여건을 우선에 두고 있음을, 더불어 접근성을 위해 필요한 논의와 과정의 중요함을 예산과 장소의 규모로 기준 삼고 있다는 관점을 피할 수 없다. 이에 관해 전시기획자 유은순은 온전한 접근성의 곤란함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전시를 기획하면서 문턱과 화장실, 층간 이동과 전시 공간의 기능을 분할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일뿐 아니라, 작품제작과 설치 과정에서 상이한 신체 감각기관의 능력을 요청하는 작품들을 어떻게 손상된 이들에게 전달할지, 이를 어떻게 표준화할지, 그것이 어렵다면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와 기준으로 둬야할지를 고민한다. 이는 접근성이 그저 시혜적인 서비스가 아니며, 접근성의 기준이 항상 고정될 수 없으며, 예술의 보편적인 향유를 위해서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소통의 능력과 감각들이 협상하고 때론 경합하는 과정을 수반하며, 협상과 경합의 주체가 누구이며 이들의 참여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하는바, 이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공간이 미술관을 비롯한 예술공간임을 환기한다. 17 미술 기관과 공간의 운영이 예의 부동산 자본과 개발 논리에서 무관할 수 없지만, 하나의 독법으로만 공간을 읽고 활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록과 보존, 공유를 지속하는 일은 관용의 장소로서 재현적 저항을 전시하는 체제의 방파제로서 미술관을 계속해서 담론적 쟁투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접근권의 요구는 미술 공간 너머 도시설계와 제도의 세부 항목에도 개입한다. 액티비즘으로서 예술은 공간의 급진성과 함께 자원과 기회의 배분을, 감각의 분할 너머 분할을 위한 절차와 환경의 평등까지도 제고할 과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급진적 미술실천을 위하여
설령 저들이 계엄을 선포한 이후로 한시적인 경고와 겁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명할지라도, 비상계엄은 주어진 여건 속에 가볍게 소일하고 소비하는 삶까지도 위협한다. 계엄이 일찍 끝났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주장은, 권력에 선 자라면 언제라도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재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낸 지금의 정국은, 자스비르 K. 푸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오랜 기간에 걸친 무력화(Disablement)를 관찰하며 진단한 불구화(maming)의 현재를 강화하고 확대할 수 있다. 18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죽이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배경에는 그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힘으로써 더 이상의 재건과 재생산이 불가능한 잔인함이 작동한다. 그와는 다를지라도, 영구적인 손상을 입힘으로써 ‘죽지 않게 내버려두는’ 정치가 한국에서는 소모되고 피상화된 삶까지도 통제함으로써 저항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삶을 언제든 다른 목숨의 노동력으로 바꿀 수 있는 환경으로 전개한다. 정치재난을 포함한 참사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타인의 고통과 불평등을 밈처럼 소모하면서 서로를 경계하고 혐오하며 감시하는 사회에서, 불법촬영과 유포로 삶의 온전함을 박탈하고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삼키려 드는 환경에서, 투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은 예술의 가능성과 표현을 묻는 것이기도 하며, 사회와 성원의 미래를 응시하는 문장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우리는 예술에서 사회적 실천을 발굴하고 접면을 넓히는 시도뿐 아니라 의도치 않은 예술 작업에 급진적인 해석과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실천 또한 의식해야 할 것이다. 예술에 따르는 미적 실천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목적과는 거리를 둔다. 그것은 흔히 아마추어적이고 불완전하며 실패와 미끄러짐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예의 무용함은, 예술이 공인되고 기념비적인 기억보다는 망각에, 허구에, 제도적 삶에 멀어진 것들에, 빈곤과 장애, 문란함과 오염에, 그리고 죽음에 시선을 두며 무엇을 발굴하거나 재현할 것인지, 그 실패까지도 시각화할 가능성을 연다. 고군분투에 가까운 과정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규범과 타인의 (비)관계에 휘말려 있다. 하여 예술가는 현재 주어진 장치와 제도를 활용해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찾고, 사라지기 쉬운 것들을 지켜내며, 그것이 허구이거나 한시적이며 불가능에 가까울지라도 관계를 만들고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는 예술계의 외부와 내부, 중심과 주변, 주류와 마이너의 이원론에 놓이면서도 이를 초과하는 실천을 해나간다. 어쩌면 예술적 액티비즘의 주체 또한 예술가라는 직함이 필수로 따라붙는 것도 아닐 것이다. 요컨대 액티비즘 미술은 온전한 장르와 목적성으로 가둬둘 수만은 없다. 어쩌면 지금의 이야기는 액티비즘 미술에 대한 영토를 그리자고 시도했지만, 결국 몇몇 작가들과 예술실천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미술의 액티비즘이 무엇인가를 다시 재고할 수밖에 없음을 다루는 글임을 고백해야 할지 모른다.
억압되고 배제된 시간과 이름, 언어를 찾고 기억하며 서사의 틈새를 벌려 대항 서사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실천은 경계의 유동성과 모호한 지점을, 해석과 실천의 자리를 계속해서 요청한다. 그런 점에 미술의 액티비즘은 아카이브 실천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크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병’은 기원이 부재하는 가운데 회귀하려는 강박과 죽음충동으로, 죽음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여는 역설을 제시한다. 부재로서 기원에 기반하는 아카이브로 액티비즘 예술을 설명하는 방식은, 기원의 시간이 향하는 사건의 본질과 존재의 실체가 끝내 공백으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는 사건의 단일한 본원성이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오히려 승자의 역사로 설명되는 규범적 서사관에 바탕 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데 단초가 된다. 다만 존재와 부재의 양자 대결에 기반한 논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으로 지정된 시간을 둘러싸면서 어떤 의미들이 부여되고 있는지, 실천으로서 예술이 현실에서 어떤 위계와 정상성의 규준에 예속되고 동일시하면서도 그에 반목하는지, 정치적인 행동과 미적 실천의 효과가 어떻게 구분되면서도 서로 보완하며 상승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색할 과제를 남기기도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사라 아메드가 제안하는 ‘접촉’으로서의 아카이브를 가져와 보충할 수 있다. 가령 ‘(도서관, 책 웹사이트 같은) 제도적 형태의 접촉뿐 아니라 (친구, 가족 등과의) 일상적인 형태의 접촉을 아우르는’ 다양한 효과로서 접촉은 알려지고 공인되는가 하면 사라지고 삭제되면서 서로를 구성하는 아카이브로 기능한다. 19 그것은 의미의 부재와 존재 사이의 역설을 논하는데 맞서거나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현재라는 시간을 구성하는 표면들과 다른 표면들이, 가령 타인과 사물, 시공간과 접촉하면서 발화가 생성되고 역사가 구성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른바 아카이브 실천은 부재에 대한 죽음충동의 강박적인 행위라는 자조적 설명 너머, 상호적으로 의미를 구성하고 기존의 구성된 의미를 탈구하며 때론 미끄러지는 역동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
앞서 다룬 깃발을 다시 환기한다면, 집단과 공동체의 이름을 내건 깃발은 동류를 의식하는 이들이 모이는 삶의 울타리를 표식하면서도, 그것의 본류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희생과 죽음, 억압과 배제의 역사를 기념비화하는 사물로 내걸리기도 한다. 다만 그것은 다른 깃발의 행렬을 만나고, 깃발의 이미지와 언어를 다르게 경험한 이들을 조우시키며 무엇보다 깃발일 수 없었던 것들에게 반목의 기회를 모색하도록 함으로써 이후의 시공을 연다. 이는 오랜 시간 여성 국극을 탐구한 정은영의 작업처럼 누락 되고 가치 절하된 역사를 발굴하며 동시대의 창작자들과 무대와 전시를 만드는 퀴어한 실천으로, 이강승처럼 희박하고 거칠게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애도의 행위로서 전시와 퍼포먼스를 기획하며 그들을 급진적으로 애도하는 또 다른 아카이브 실천으로 이어진다. 예술가는 자체적으로 아카이브를 구성하거나, 기존의 역사적 사료와 그 기록들을 활용하면서도 과거로부터 미래를 여는 매파의 역할을, 작가와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나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소속 없는 성원을 엮어냄으로써 한시적으로 공동체의 감각을 창안하는 시간을 여는 이로 제 역할을 확장하고 갱신한다.
이러한 등장은 사회전환의 국면마다 새로운 주체와 의제가 떠오르면서 동시대의 화두들이 예술계에도 떠오르며 담론의 수요를 만들어가는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비엔날레와 국공립, 사립 미술기관에서도 동시대의 담론들이 예술의 주요 키워드로 부상한다. 이는 담론장에 하위문화가 공적 의미를 갖는 의의를 갖게 할뿐 아니라, 담론과 외부의 의제들을 창작할 수 있는 예술가의 역할뿐 아니라, 예의 내용을 취합하고 재배치하며 망라해내는 기획자와 전시 공간의 역할도 못지않게 중요함을 시사한다. 새로운 주체로서 예술가뿐 아니라 관객을 호출하고, 그들이 접근하는데 작동하는 문턱을 고려하며, 예의 고민을 전시뿐 아니라 토론과 퍼포먼스, 상영과 집회까지로 이어가며 외부 공권력의 검열에 대한 대응부터 내부 작가와 행정절차의 과정까지도 조율하고 조정하는 과정에 민주주의를 제고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어떠한 급진적인 화두일지라도 제도와 규범에 포섭되며 문화와 언어를 수탈당할 수 있다는 필연성에 대한 우려는, 현재 국제적인 미술 행사마다 호출되는 주제로서 기후 정의와 페미니즘, 퀴어, 이주를 다루면서도 이들을 누가 어떻게 보여내는지, 이를 배치하고 시각화하는 이는 누구인지, 이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가 있는가를 살피게 한다. 제작 환경에 대한 시장 비판적 논의를 다루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이후의 작업을 위해 적어둔다. 프리즈 이후 시장지향적 시계가 본격적으로 미술계의 욕망을 노골화하는 상황을 감각하고 경계하는 활동 속에서, 더구나 기금에 의존하게 되는 작가들의 작업환경은 시장 편향성으로부터 자율적인 환경을 모색함과 동시에, 기금제도의 보완 너머의 자립을, 이를 위한 근원적인 공생의 미래를 요청한다. 결국 예술의 액티비즘은, 액티비즘 예술을 수행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비평적 액션의 재생산을 확보하는 일을 포괄해야 할 것이다. 미적 실천의 급진성을 다시 급진화하는 일은, 급진화하는 주체의 위상을 재고하고, 관계성을 살피는 일인 셈이다.
-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통령의 말과 글》, 대한민국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 12월 12일 발표 및 게재. 링크는 현재 점검중이라고 나온다. 12월 3일 비상계엄 선언문은 대통령실 공식 홈페이지에 누락되어 있지만, 검색을 통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본문으로]
- ‘백골단’은 80-90년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사복경찰관에 대해 시민들이 일컬었던 비공식 별칭으로, 당시 사회에 공포를 일으켰다. 그리고 지난 12월 9일,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의 주선으로 국회에서 출범 기자회견을 가졌으나 거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김민전 의원은 곧장 기자회견 주선과 관련해 사과를 했지만, 김정현 반공청년단 단장은 “반공청년단 예하 조직인 백골단의 이름을 유지한 채 활동을 계속 이어가기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본문으로]
- “고어 자본주의의 기업가는 경제적 기업가, 정치적 기업가, 폭력 전문가가 뒤섞여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시야크 발렌시아, 『고어 자본주의』, 최이슬기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1. p.49. [본문으로]
- 이광석, 『파국에 맞서는 예술행동 탐사기-옥상의 미학 노트』, 현실문화, 2016. [본문으로]
- 미리 이야기하면,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2025년 기획전시 《행동주의 기억법》에 청탁받아 쓰인 본 원고는 전시의 내용을 설명하거나 이를 충실하게 참조하지 않는다. 물론 큰 범주로서 전시가 지향하는 아카이브로부터 모색하는 급진적인 예술 실천이나, 예술 실천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아카이브의 가치를 공유한다. 동시에 이 글은 당면한 한국 사회의 투쟁 현장에 참여하고 때론 거리를 두고 관찰하며 또 다른 예술 실천과 제반의 환경들을 비평적으로 살피면서 행동주의적 예술이 어떤 난제에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하여 전시와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더불어 상호비평적으로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당 각주를 따로 남긴다. [본문으로]
- 양효실, 〈사라짐으로서의 퍼포먼스-페기 펠란의 논의를 중심으로〉, 웹진 춤:in, 2020. 10. 14. 게재. 링크: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zom_idx=609&div=03&type=OUT [본문으로]
- 홍진훤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인용. 링크: https://jinhwon.com/89 [본문으로]
- 생존자들의 대면 장면에는 박래군 인권운동가가 중재에 참여했다. [본문으로]
-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집회의 수행성을 위한 노트』, 김응산, 양효실 옮김, 창비, 2020. p.49. [본문으로]
- 할 포스터, 『경성대문화총서34- 미술·스펙터클·문화정치』, 조주연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2. pp.307-310. [본문으로]
- 장애여성공감, 〈20주년 기념 선언문-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 2018. 2. 2. 링크: https://wde.or.kr/20%EC%A3%BC%EB%85%84-%EC%84%A0%EC%96%B8%EB%AC%B8/ [본문으로]
- 연혜원, 「케이팝의 젠더퀴어한 미학」, 『퀴어돌로지』, 연혜원 기획, 오월의 봄, 2021. p.319. [본문으로]
- 〈이 사람들 궁금했죠?…아무 깃발 대잔치!〉, 프레시안, 2016. 12. 31 게재.
- 그것 또한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96년도 노동개악부터 무지개깃발을 들고 나온 성소수자의 행동이 이어진 궤적 위에 놓을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필자가 2024년 12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에 기고한 〈[상임 활동가의 연말 사정] 인권 운동이 해온 일〉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링크: https://lgbtpride.tistory.com/2021 [본문으로]
- 계엄 이후 이어지는 집회마다 SNS에는 수많은 메모와 감상, 스케치와 토론이 올라오고 공유된다. 강광석 님의 글은 그 중 하나이며, 이 글은 계엄 이후의 기간 동안 접한 수다한 증언과 제안, 토론의 이야기의 한복판에서 쓰였음을 또한 밝혀야할 것이다. 25일 강광석 님이 남긴 페이스북의 텍스트는 이후 ‘28시간의 남태령’의 제목으로 슬로우뉴스와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등에 게재되었다. 12월 21일 전후 상황을 다룬 많은 텍스트들이 생산되었는데, 필자가 이들과 더불어 시사IN의 1월 6일 기사 〈서로를 가르친 28시간, 남태령은 ‘학교’였다〉를 참고했다.
링크: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716 [본문으로]
- 찰스 젠크스, 『애드호키즘- 임시변통과 즉석제작의 미학』, 현실문화, 2016. [본문으로]
- 유은순, 〈시행착오의 접근성〉, 세마 코랄(SeMA Coral), 2025. 1. 2. 게재.
링크: http://semacoral.org/features/eunsoonyoo-accessibility-of-trial-and-error [본문으로]
- 자스비르 K. 푸아, 「불구화할 ‘권리’- 팔레스타인에서의 무력화(Disablement)와 비인도적 생명정치」, 《오늘의 문예비평 2016 가을통권 102호》, 김지영 옮김, 오늘의 문예비평. pp.248-282. [본문으로]
-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 봄, 2023. p.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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