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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

[상임 활동가의 연말 사정 4] 다시 열린 광장에서 발견하는 희망의 근거

by 행성인 2024. 12. 25.
2024년 연말을 맞아 '상임활동가의 사정'에 변화를 줬습니다. 12월 '상임활동가의 연말 사정'은 활동가들이 같은 지면에 메모처럼 남기는 기존 형식이 아닌 각각의 독립된 이야기를 남깁니다. 조금 길게 전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연말의 정세와 활동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그리고 서로의 일상을 만나봅시다.

 

 

호림 

 

광장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열망도 경계해야겠지만, '죽 쒀서 개주는 게 싫다' 류의 냉소도 피해야 할 것이다. 냉소는 과거를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게 생산한다는 점에서 퇴행의 감정이다. 모든 사건이 영원회귀처럼 반복되더라도, 조금의 차이와 조금의 다른 궤적으로 반복된다. 그 차이를 포착하지 못하는 냉소가 그래서 가장 퇴행적이다. 

게다가 실상 2008년 명박산성, 2016년 촛불, 2024년 응원봉은 역사의 단순 반복이 아니다. 우리는 조금씩 변해왔고 또 조금씩 다르게 변주하며 반복하고 있다

- 영화감독 이송희일 페이스북 글 (2024.12.24) 

 

 

지난 12월 3일 이후 지금까지 펼쳐진 정치적 국면에 관한 수많은 말 중 가장 깊이 공감 되었던 것은 위에 인용한 이송희일 감독의 페이스북 글이다. (특히 지난 주말 ‘남태령’을 지켜보며)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엄 이후 펼쳐진 온/오프라인의 광장‘들’에서 과거와의 차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이 차이와 그 의미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때 세상을 바꾸는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차이 자체가 뻔한 과거의 반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이들의 절실한 열망과 노력, 저항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희망의 근거가 될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했다. 

 

과거와 다른 차이는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집회에서 배제되거나 불쾌함을 느끼지 않고 참여할 수 있도록 약속문을 읽고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부터, 어린/젊은 여성의 압도적인 참여에 대한 과한 호들갑이나 오히려 이 사실을 지우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것까지. 모두 그렇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차이다. 남태령의 전봉준 투쟁단에서 시작해 안국역의 전장연 출근길 시위, 거제의 조선하청노동자들의 투쟁, 구미의 옵티칼 고공농성까지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있는 연대의 움직임은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만들어 낸 광장의 힘인 동시에, 거대한 정치적 사건 앞에 쉽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는  누군가의 투쟁을 홀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이들의 의지와 열망이 모인 결과라고 짐작해 본다. 

 

성소수자 운동은 함께 저항하고 연대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무지개 깃발을 들고 광장에 나섰다. 늘 그래왔다. 그런데 지금의 광장에서 눈에 띄는 차이는 무대에 올라 발언하는 성소수자 시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성소수자를 잊지 않고 언급하는 시민들까지 더해져 매 집회마다 성소수자 시민의 또렷한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는다. 성소수자들에게 지금의 광장이 과거의 반복일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가장 놀라운 차이다. 광장의 시간이 끝난 후, 성소수자가 ‘나중에’로 밀려나고 지워졌던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일까, 이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여기에서는 나를 드러내고 나의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과거와는 다른 집단적 감각이 만들어진 걸까. 이 놀라운 차이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항상 제자리인 것 같아도 지난 8년 사이에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왔음을, 이제 더 큰 변화를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하는 때임을 확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 펼쳐질 많은 것들은 과거의 반복, 혹은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 일 것이다. 광장에 모인 서로를 마주하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기도 하지만, 지금 함께 통과하고 있는 시간이 앞으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삶을 힘겹게 할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임은 부정할 수 없다. 광장의 시간이 끝난 후, 이곳을 채웠던 변화에 대한 수많은 열망과 기대가 또다시 갈 곳을 잃고 사그라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주말을 보내며 나는 윤석열 퇴진 이후 우리가 도착할 곳은 지금 우리가 함께 경험하며 만들어 내는 차이들이 모여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일 거라고 믿게 되었다. 설령 그 변화가 생각보다 작고 연약한 것일지라도 그 변화에 기대어 또다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지금 주어진 일들을 열심히 지치지 말고 해보자는 다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