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내가 이따금 나가는 모임이 있는데, 다름이 아니고 가톨릭 앨라이 아르쿠스의 월례 미사이다. 한국에 퀴어 당사자와 앨라이가 모여서 퀴어 정체성을 긍정하며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그렇게 많지 않기도 하고,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겠지만 내가 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유신론자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젠더나 성소수자 등의 이슈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서 아르쿠스 미사를 나가기 시작했고, 퀴어 커뮤니티에 나오고 나서도 시간이 되면 아르쿠스의 미사나 워크숍 등의 행사에 참여했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포덤대학교에서 만든 퀴어 기도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한국의 퀴어 당사자나 앨라이들의 이야기까지 수록된 책자를 만드는 아르쿠스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작년 초에 최종 번역 작업이 끝났는데 이런저런 일로 지금에서야 인쇄비 마련을 위한 펀딩을 시작했고, 아마 이 글이 나온 시점에서는 펀딩이 모두 끝나 있을 것이다. 펀딩을 시작하고 열두시간 만에 300만원이라는 목표치를 넘긴 돈이 모이는 것을 보고 다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나와 친한 가톨릭 신자 출신 게이 형이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고 펀딩에 참여해서 감동받았던 기억도 난다. 원문 책자를 읽고 번역에 참여하고, 성소수자이자 가톨릭 신자인 활동가에게 책자에 기고할 기도문과 묵상문을 부탁드리고, 나의 기도문과 묵상문을 작성하면서 나의 신앙과 유신론, 그리고 섹슈얼리티와 활동 사이의 간극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퀴어 이슈를 비롯한 사회의 여러 의제에 대해 더 진보적이고 열려 있지 않느냐고 한다. 그런데 내가 이십 년을 넘게 가톨릭 커뮤니티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일단 개신교 교회는 각 교단이나 교회, 목사들마다 성향이 워낙 다양해서 퀴퍼에 나가 성소수자 커플들을 축복하거나 진보정당에 가입해 기후위기와 성소수자 이슈 관련 활동을 하는 목사부터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며 윤석열 지지 집회를 주도하는 목사까지 정말 여러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잘 가시화되어 있고 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톨릭을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가톨릭은 중앙집권화가 잘 되어있는 종교이며, 바티칸의 교황청에서 정한 입장과 교리를 전 세계의 모든 교회와 성직자가 받아들여야 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관료주의가 중세 시대의 가톨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는 자영업자이고 가톨릭은 체인점이나 직영점이라고 하면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알아듣는 것 같다. 그 말인즉슨,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서도 전 세계의 모든 가톨릭 교회에서 같은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톨릭 교회는 성소수자에 대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혐오와 대놓고 거리를 두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소수자 정체성 자체는 죄가 되지 않지만 동성 간의 성행위 등 직접 실천하는 행동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아,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하느님이 주신 선천적인 성별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며, 논바이너리니 젠더퀴어니 하는 것은 가톨릭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스젠더 여성과 시스젠더 남성만 인정하는 가톨릭은 이성 간의 '피임을 하지 않은' 성행위만 정상적인 것으로 선포하니, 자신의 소수자성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성소수자들이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얼마나 큰 죄인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 행위는 그 자체로 무질서'이며, 동성애자들은 '정결을 지키도록' 부름을 받는다고 명시한 가톨릭 교리서에는(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정말 저 말 그대로 교리서에 쓰여 있다. 가톨릭 교리서는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누구나 읽어볼 수 있으니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돈다면 한번 가톨릭 교리서의 2357항부터 2359항까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바로 옆에 '그들에게(동성애자들을 가리킨다)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이면' 안 된다고 쓰여 있다. 정말 어쩌라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동성애자들은 가톨릭 교리서에서 그 존재를 인정하기라도 했지, 에이 스펙트럼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논바이너리, 젠더퀴어 등 트랜스젠더들은 가톨릭에서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이런 가톨릭의 퀴어혐오적인 교리와 퀴어를 배제하는 교회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퀴어를 포함시키는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퀴어신학이다.
아무튼, 내가 퀴어신학에 대해 말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신앙과 퀴어함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나는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고 가톨릭 학교를 다니면서, 퀴어 커뮤니티보다 가톨릭 교회의 공동체에 훨씬 더 일찍 노출되었다. 내가 나의 소수자성을 의식하기 시작한 열 살 전후부터, 그것이 아주 오랫동안 교육받은 신앙과 반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성적인 면에 눈을 뜨는 것에 극도로 예민해서 여자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하고 화장실도 문을 열고 사용하게 했던 엄마가 나의 퀴어함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사춘기 시절에 너무 힘들어서 이것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지나갈 것을 믿고 있다고 간절히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지나며 나는 성소수자 이슈를 포함한 사회 의제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되었고, 비온뒤무지개재단의 무지개 아기예수 뱃지를 샀다고 재단에 전화해서 아들이 성소수자인지 물어보는 엄마를 보며 나의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함을 느꼈다.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던 내가 당시 친했던 친구와 연애 관계라고 의심해서 학교 교무실을 뒤집어 놓는 엄마는 동성애가 죄라고, 성소수자들을 지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나의 소수자성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성소수자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은 매우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고, 앨라이로서의 나는 깨어 있는 진보적인 신자이지만 성소수자로서의 나는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교회 공동체에 당당히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본질적으로 무질서이며 죄라는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 수 있었지만, 성소수자로서의 나 자신이 신앙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퀴어 커뮤니티에 나오고 나서였다. 퀴어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받아서 종교를 잃거나 교회에 나오지 않는 성소수자들의 고민과 고뇌는 나의 그것들과도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싫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주신다면,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서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한 신앙과 나의 본질적 정체성을 둘 다 놓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나의 사랑과 욕망도 축복하시는 것이 진실이어야만 했다. 혹자는 이것이 정당화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치면 가톨릭 교회는 수백 년 동안 여성혐오, 이주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과 교리를 남용하지 않았던가. 퀴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투쟁하는 것은 나의 신앙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내가 그전부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가톨릭 교회의 성차별과 성소수자 혐오에 대해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애초에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인 신을 섬기면서 신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가부장제라는 혐오와 죄에 갇혀 있고,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인간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자들이 신과 신앙에 대해 제대로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신앙을 유지하며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투쟁의 동력으로도 작용했다. 활동가 커뮤니티는 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앙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잦은 공간은 아니지만, 신의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제자들을 파견했다는 성경의 내용이 활동과 아예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의 뜻은 이 땅에 정의가 찾아오게 하고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닌가. 가톨릭에서 말하는 개념 중에 '성소'라는 것이 있다.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면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것인데, 신이 사람들을 각자의 역할에 맞게 부르셔서 누군가는 사제로, 누군가는 수도자로, 누군가는 평신도(일반 신자)로 살게 하신다는 개념이다. 지정 남성에게만 사제직을 허용하는 가톨릭의 체제를 옹호할 때도 성소라는 개념이 쓰이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회와 교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활동의 현장에 나와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도 '성소'의 한 형태라고 느낀다. 신앙은 내가 지치지 않고 더 열심히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로 작용하며, 지치고 방향을 잃었을 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위로이기도 하다. 인권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나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각자 투쟁의 원동력이나 힘을 얻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제의 시급성이나 동료들과의 연대뿐 아니라 신앙도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작년 7월 18일, 대법원에서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던 날 아침, 집을 생각보다 일찍 나서서 시간이 떴을 때 근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정말 오랜만에 묵주기도를 했다. 안개마을에서 만든 무지개 묵주를 꽉 쥐고 (이미 결정은 나 있을 터이지만) 모두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대법원에 들어가 선고를 방청할 때도 묵주를 쥐고 있었다. 원고 부부의 승소 판정을 듣고 모두가 기뻐할 때에도, 묵주가 내 손에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감사 기도를 드렸다. 좋은 결과에 감사하다고. 우리가 앞으로도 함께 투쟁할 수 있는 것에, 이 순간을 맞이하는 것에 기뻐하면서.
행성인 등 여러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며 투쟁의 현장과 광장을 지키거나 여러 캠페인과 모임을 기획하고 모임에 참여하다가 아르쿠스에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문을 번역하면서 힐링과 치유의 시간을 가졌다고 느낀다.(생각해 보니 힐링과 치유는 동어반복 같긴 하다) 퀴어 커뮤니티에 나오면서 이전보다 미사도 많이 빼먹고 그렇지만, 그래도 나의 신앙, 혹은 유신론은 퀴어 정체성이나 활동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풍성하게 만든다. 내가 누군가에게 종교를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서도 혹시나 교회의 성소수자 혐오 때문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났거나 상처받아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앙과 퀴어함은 결코 상충되지 않으며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성소수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신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해 줄 것이다. 동시에 나도 앞으로 계속 가톨릭 신자이자 성소수자 당사자이며,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지 못한 교회에 실망해 신을 등지고 분노했던 나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안아 주며, 퀴어 그리스도인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이런 방황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 가톨릭 기도문 중 영광송에 있는 구절처럼,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기도하고 투쟁하는 나날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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