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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문수의 지구여행기

[문수의 지구여행기] 못 다한 이야기

by 행성인 2025. 12. 23.

문수 (한국HIV/AIDS감염인인권연합 KNP+)

 

연재의 말

게이들은 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래서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의 삶을 기록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새마을운동, 집성촌 - 70년대

 

경상도 산골짜기 마을에는 70년대 중반에야 전기가 들어와서 호롱불과 촛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의 여동생 말숙이는 우리 동네에서 만화광이었다. 그의 집에 놀러 가면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었다. 자주 놀러 가서 만화책을 보곤 했는데 그 당시 활동했던 이상무, 길창덕, 이두호, 허영만, 고우영 등의 만화를 좋아했다. 당시 학교와 동네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고, 마을마다 새마을 운동으로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지금도 ‘새마을 노래’ 가사와 멜로디가 귀에 남는다.

 

박정희는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새마을운동을 독려하였고 우리는 학교에서 마을에서 노래를 귀에 박히도록 외우고 불러야 했다.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라고 하는 양철지붕으로 지붕을 바꾸면서 비가 오면 지붕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좋았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변변한 텔레비전 하나 없는 마을에서는 문화 시설이라고는 보고들을 수 없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이맘때쯤 텅 빈 들판을 보면 왜인지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아련하게 아려왔다.

 

마음을 달래듯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을 추수가 끝날 즈음 천막 극장이 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곤 했다. 당시 천만 극장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고, 연극을 상연하며 노래자랑도 열었다. 엄마는 노래자랑에서 가끔 상품도 타오곤 했다.

 

엄마는 동네 재담가였다. 동네 온갖 대소사 일을 참여하였고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 좌중을 휘어잡는 말주변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당시 엄마가 보는 책을 같이 읽었는데 서유기〉 〈일지매, 홍루몽, 로빈후드의 모험등을 읽으며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얼굴이 이뻐서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집안 사정으로 3학년에 서울 근교 안양으로 이사를 갔고, 5학년이 되어 다시 다니던 학교로 전학 왔다. 친구들하고도 서먹서먹하던 때였다. 2년 만에 경상도 말투가 서울말로 변해있어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그때 술도가집 인기 많은 친구가 나의 편을 많이 들어주었다. 그 당시 학교 가는 신작로 옆에 방앗간과 술도가를 함께 하는 집 딸이었다. 학교에 그 친구와 사귄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는데, 그 아이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5학년이 되던 해 마을에 청년들이 이사를 왔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빵을 주면서 저녁에 놀러 오라고도 했다. 우리는 그 집에 매일 놀러 가서 찬송가도 불렀는데, 그곳에 가면 맛있는 먹을거리를 줘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다시 보니 그곳은 통일교 분파였다.

 

당시 위생은 당연하게도 매우 좋지 않았다. 재래식 변소는(화장실이라는 말은 서울에 와서 처음 들었다) 똥을 바가지로 퍼내서 집 앞이나 뒤뜰 텃밭에다 뿌렸다. 당시 아이들 몸 안에는 누구라도 기생충이 득시글거렸다. 수년 전 총 맞으면서 판문점으로 탈출한 북한군 병사가 몸 안에 기생충이 많이 나왔다고 뉴스에 나올 정도였는데, 70년대에 우리가 그랬다. 매월 쥐 잡는 날도 있었는데 쥐약을 거의 무료로 나눠주면서 부작용도 심각하게 나타났다. 숙모도 쥐약으로 안 좋은 선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시골에는 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아버지의 사촌 형님이 우리 동네 강 건너 외진 마을에서 살고 계셨다. 옆 동네 삼거리에 오일장이 설 때면 그 아재분은 장날마다 강을 건너와서 산골짜기 물건을 내다 팔고 막걸리를 마시며 소일거리를 하다가 다시 걸어서 강을 건너가곤 했다(무릎 높이로 흐르는 곳이 있었다). 하루는 막걸리를 마시다 밤 11시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강을 건너고 있었다. 물가에서 웬 여자가 소복을 입고 빨래를 했다. 아재는 술김에도 이상하다, 이 시간에 웬 빨래인가.’ 생각하고 강을 건너가는데, 건너온 뒤에도 저 앞에서 소복 입은 여자가 빨래하고 있는 게 아닌가. 놀라서 자세히 보니 눈코입이 없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혼비백산 마을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고 하는데, 아재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우리 마을은 집성촌이라 모두가 같은 동성동본이다. 1년마다 묘사라고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행사를 한다. 그 행사를 집행하는 제실(서울의 종묘를 떠올리면 쉽다)이 마을에 있다. 제실은 1년에 한 번 사용하고 나머지는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개의 방이 비어 있었다. 여름방학이면 제실에 모여 공부하고 놀기도 하였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8살 여름의 어느 날, 제실에 있던 친구들은 하나씩 집으로 가고 나와 동창생인 ㅊ만 남았다. 그 녀석이 날씨 때문인지 멜랑콜리 하다면서 살금살금 다가와 나를 덮쳤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들였다. 박정희가 총살을 당하고 1212사태가 발생한 즈음이다.

 

 

서울, 전두환 - 80년대 서울

 

서대문구 모 대학가 레스토랑 불새에서는 당시 커피를 주문하면 토스트를 주면서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곳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친근하고 말도 웃기게 잘한다고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학교 동아리 회장이나 회원들하고도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먼 고려대 앞에서 지내는 친구들 3명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동호회처럼 모임을 만들어 폭주족까지는 아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 통하여 절친한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그들과 어울리며 신촌나이트클럽으로, 동대문으로 놀러 다니곤 했다.

 

하루는 그들 중 막내가 새로 산 오토바이를 번호판도 붙이기 전에 끌고 왔다. 다 함께 신촌으로 가서 축하주를 나눴다. 선술집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오토바이가 없어졌다.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순경은 관할 타령하면서 시큰둥했다. 내일 찾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어느 파출소 앞에 그 오토바이가 있던 거다. 도난당한 오토바이가 맞았다. 파출소에는 20대 친구가 앉아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절도범은 오토바이를 훔쳐서 끌고 열쇠점에서 열쇠를 만들려다 수리공이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한 거였다. 처음으로 경찰서에 가서 피해자 조사를 하였고 구치감에서 범죄자들이 조사받는 광경을 보았다. 82년부터 84년 초까지 그곳에서 일하다 방위 근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에서 틈틈이 누나가 운영하는 마을 정류소 매점 일을 도와줬다. 교회에도 다녔는데 마을에서 2키로 정도 걸으면 나오는 마을에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동네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는데 집성촌에 교회는 안 된다고 반대하여 우리동네보다 작은 마을에 교회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곳 젊은 전도사가 마음에 들었는데 총각이었다. 일요일마다 교회를 열심히 나가서 활동했고 성탄절에는 연극도 하며 교회 학생, 청년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 얼떨결에 청년회 전도부장을 하게 되었다. 전도사에 대한 짝사랑을 하다가 방위 근무를 마치면서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도 한동안 그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선데이서울을 통해서 알음알음 찾아간 파고다 극장은 신세계였다. 그곳에서 처음 사귄 친구는 지방에서 올라와 김포에서 혼자 자취하면서 공장 일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순진한 시골 총각이었고 서울 생활이 매우 서툴렀다. 그의 집에 가보니 TV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청계천에서 TV를 구매해서 그의 집에 가져다주었다. 당시에는 안테나를 설치해야 TV를 볼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진 후, 충무로 극동 극장에서 고교졸업 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앞둔 새내기를 만나기 시작했다. 진정한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이였다. 그는 귀여운 상에 몸매 좋은 친구였다. 우리는 매일 만나서 빵집과 영화관 등을 다니며 데이트했고, 그의 입학식에 가서 축하도 해줬다.

 

행복한 나날이 지난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통보했다.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했다. ‘올 것이 왔구나!’ 당신 같은 킹카를 애인으로 뒀다면 언제든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남자가 검사 임용을 앞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한쪽 가슴이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으로, 술을 마시며 실연의 아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80년 초반 광주 항쟁과 의령파출소 우순경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회가 뒤숭숭할 때, 전두환은 국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3s(스크린, 섹스, 스포츠의 약자다) 정책과 야간 통행 금지 해제를 시행했다.

 

출처: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그 시절, 이반들도 이에 발맞춰 열심히 활동했다. 술집과 사우나, 이반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극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통금이 해제되기가 무섭게 깊은 밤이면 남산공원 등지를 장악하다시피 하였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80년대가 이반 크루징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