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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가족/비범한가족이야기

[회원 에세이] 난생 처음 분가한 게이의 이야기

by 행성인 2026. 1. 26.

켄토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연애에 대한 내 지론이 있다. 사랑은 갈구할 때 오지 않고 포기하면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  이번에도 그랬다. 행성인 활동을 시작한지 어느덧 10년을 넘겼다. 이제는 ‘고인물’이 되었다. ‘윤석열 나이’까지 동원해서 꾸역꾸역 미뤄보아도 나이 앞자리 숫자가 4가 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높아진 나이만큼 자존감은 내려갔다. 연애 공백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이번 생에 더 이상의 연애는 없다고 생각했다. 연애보다 그냥 섹스 파트너 몇 명 두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물론 그것도 쉽진 않겠지만) 그래. 연애는 포기한다 치고 그렇담 앞으로 중장년 게이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토크쇼를 기획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토크쇼를 마친 후 뒷풀이 도중에 윤석열의 불법 계엄이 선포되었다.

 

 

지금의 남편은 토크쇼에 참석하기 위해 이 날 처음으로 행성인을 방문했다. 토크쇼에서는 대화를 제대로 해 볼 기회가 없어서 나에겐 낯선 참가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 행사 이후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에서도 함께 있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다 며칠 후 갑자기 그가 보낸 저녁식사 제안을 받고서야 낌새를 알아차렸다.

 

저녁식사를 하던 날, 그는 나에게 조금 더 만나보자고 했다. 그 날 뉴스에서는 윤석열 탄핵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연애 포기 상태에서 갑자기 그런 제안을 받은지라 당황스러워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다. 그간 내 연애가 그랬듯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차이는 경험을 또 하고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다 거절하고야 말았다. 그로부터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그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고 연락을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그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열리고 그에게 기울어 갔다. 그렇게 우리는 ‘애인’이 아닌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가 되기로 했다.

 

나는 홀로살기를 해본 적이 없다. 평생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6년 전에 엄마와 이혼하면서 분가하여 우리집에는 나, 엄마, 남동생 이렇게 세 식구가 살았다. 남편은 비수도권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하우스메이트 친구와 둘이 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좀처럼 안 하던 외박을 하게 됐고 점점 잦아졌다. ‘무슨 인권단체 같은 곳’에서 활동하고 술을 같이 즐기는 지인이 꽤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엄마는 아마도 처음 몇 번은 과음을 하다 날을 새고 오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회의 끝나고 뒷풀이에서 술을 마시다 늦어지면 무리하게 심야버스나 택시로 집에 오느니 가까운 활동가 집에서 자고 오는게 편해서 자고 오는 것’이라고 거짓말하기 시작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아는 지인의 이야기’가 되어 엄마에게 전해졌고, 남편이 어머니 드리라고 준 선물들은 ‘잘 아는 지인이 준 것’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로도 가족에게 계속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엄마와 남동생은 나에게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내색하지 않았지만 시한부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남편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더욱 깊어지면서 확신 또한 커졌고,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시도하지 못한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커밍아웃을 하면서 드린 가이드북.

 

 

2025년 4월 18일. 엄마한테 커밍아웃을 했다. 실은 3년 전에 커밍아웃 할 기회가 있었다. 그냥 기회가 아닌 아주 좋은 기회 말이다. 2022년의 어느 날, 나는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상영회에 엄마를 데리고 갔다. 평소 영화관에 거의 가지 않는 내가 엄마한테 영화보러 가자며 댄 핑계는 크레딧에 내 이름이 나온다는 것. 엄마는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채로 영화를 보셨다. 많은 수의 성소수자 부모님들이 무대로 올라오신 GV까지 알차게 다 보고 나오신 엄마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부모모임 부모님들이 대단한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내게 물으셨다. “그러면 혹시… 너도 ‘그런 거’니?” 엄마의 질문을 듣는 순간 목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애를 쓰며 “아니 뭐 나는 영화를 만드신 분들이 내가 잘 아는 분들이고 크레딧에 내 이름이 나오니까 영광이어서 보자고 한 거예요~”라며 애매하게 둘러대 버리고 말았다.

 

3년이 지나서 한 갑작스런 큰 아들의 커밍아웃에 엄마는 내가 게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상영회 날 엄마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좌석에 앉자 마자 엄마 모르게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도. 3년 전에 커밍아웃 할 절호의 찬스를 놓쳐버리고 얼마나 후회했는지도.

 

내가 게이인 것이 매우 행복하다는 말과 함께 커밍아웃을 결심한 계기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몇 달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아주 진지한 만남을 가지고 있다고. 평생 함께 할 각오로 부부라고 생각하고 만나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고, 너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고 했다. 엄마의 성격을 아는지라 커밍아웃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에 다행이었지만, 내가 게이라는 것과 아들에게 동성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 하는게 느껴졌다. 당연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앞으로 엄마와 솔직한 대화를 더 많이 나누겠노라 약속했다. 커밍아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니까.

 

커밍아웃 후에는 남편 집에서 마음 편히 외박을 했지만 아주 편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한테는 ‘남편’이라는 말 대신 ‘OO씨’라는 호칭을 쓰는데, 집을 나서기 전에 OO씨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하면 어떤 날에는 흔퀘히 다녀오라고 하시면서도 어떤 날에는 되게 못마땅한 투로 대꾸하시곤 했다. 그럴 땐 나오는 발걸음이 편치 않고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다음 번 대화를 나눌 때 혹시 아들을 빼앗긴 것 같아서 서운한 감정이 드는지 여쭤봤다. 딱히 부정하시지는 않는 걸로 보아 그런 감정이 없진 않았나보다. 엄마 성격 상 “그래, 그렇다” 라고 말할 분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좀 더 대화를 나누면서 이유를 알게되었다. 엄마는 불안하셨던 것 같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남편에 대해 말씀드렸던 정보들 만으로는 부족했을 터다. 그래도 남편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으셨다. 아직 아들의 커밍아웃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점에 동성 연인을 만난다는 건 더 부담스럽고 어려울 테니까. 엄마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솔직한 마음이 담긴 충분한 대화 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서로 사랑을 약속한 이후 매일 텔레그램에서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고 눈에서는 하트가 뿅뿅 터지기만 할 것 같던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조금씩 사소한 오해와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솔로 지내면서 직장생활과 행성인 활동, 개인적인 페티시 취미 활동, 지인과의 술자리, 가족을 챙기는 것(가족 외식, 가족 쇼핑 등)으로 채워져 있던 삶에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내 안에서 영역 다툼(조정이라고 하자)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과 만나기로 약속한 것을 깜빡 잊고 가족이나 다른 지인과 약속을 잡거나, 사후에 양해를 구하는 일이 생겼다. 남편은 실망감을 표하며 그러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을 약속하며 남편에게 실망감을 주었다는 사실에 몹시 힘들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서 오래지 않아 또 비슷한 문제가 또 일어났고 나는 재차 사과했지만, 남편은 자신이 포기해야 하는 문제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느 날은 친한 지인과 술을 마시다 과음을 하게 되어 거의 인사불성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하지 않고 잠에 빠져들어 남편을 크게 걱정시킨 일도 있었다. 이런 소소한 문제들이 생길때마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면 ‘같이 살면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결론으로 매번 끝맺음 되었다.

 

엄마한테 커밍아웃을 한 지 6개월이 지난 2025년 10월의 어느날,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분가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이제는 가족을 떠나서 살아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미 한 달 전부터 남편 방 구조를 바꾸고 공간을 확보해서 내가 쓸 책상과 의자, 노트북에 연결할 모니터까지 구입하는 등 새 살림을 차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족들은 별 거부감 없이 내 결정에 동의해 주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에 옷가지와 같은 가장 필요한 물건부터 시작해서 며칠씩 간격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내 방에 있는 짐을 옮겼다. 

 

가장 마지막에 옮긴 물건은 내 방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하는 데스크톱 컴퓨터와 부가적인 하드웨어들인데, 이것들을 들어내고 책상 위 아래가 텅 비니 나조차도 기분이 이상해질 만큼 내 방이 휑한 느낌이 되었다.분가를 위해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문을 나서며 듣는 “항상 조심하고” 라는 엄마의 말이 외출할 때마다 으레 듣던 말인데도 그 날만큼은 다르게 들렸다. 이번에는 한 마디가 뒤에 더 붙었다. “자주 연락해라”. 현관문 안의 공기 속에는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우린 애써 감추었다. 엄마는 운전 조심하라며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본가를 떠나 남편과 같이 사니 행복했지만 엄마가 자꾸 신경쓰이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직 60대인데다 큰 질환이 없고 직장도 다닐만큼 정정하시지만 괜스레 엄마 얼굴을 떠올리면 너무 늙어버린 것 같았다. ‘이전보다 적적하시진 않을까?’ 그럴 때마다 나와 엄마 모두 적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자위했다. 어차피 헤테로 정상성 가족이었다면 대충 마흔 미만의 어느 나이에 결혼해서 분가했을텐데 좀 늦어졌을 뿐이라고.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이렇게 무겁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혼의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나마 엄마 옆에 동생이 있는게 다행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열과 성의를 다해 자식을 길러놓으면 결국에는 저 좋다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내고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게 쏟는 거구나. 그것이 세대를 거쳐 계속 반복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옛 말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참말이구나 싶었다. 이 깨달음(?)을 얻은 것도 이후에 엄마를 만나 이야기 해드렸는데 엄마는 “다 그런 거지 뭐~”라는 말로 길게 대꾸하지 않으셨다.

 

뒷산에 오르면 북한산이 펼쳐진다.

 

두 달이 지난 지금 다행히 잘 적응해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적응하고 있으니 엄마도 분명히 나처럼 잘 적응하고 계실거라 믿어 본다. 남편이 돕기는 하지만 본가에서 살 때는 살림살이의 일부를 엄마에게 의지했는데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해야 하니 집안일에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집에서 하던 것처럼 강박스럽게 고집했던 청소를 좀 덜 한다던가, 간간히 로봇청소기에 맡기는 등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동시에 조금씩 내려놓게 되는 것이, 이 또한 부모의 품을 떠나서 살기에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아 신기하다. 내 나이에 나보다 더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집안 살림을 모두 챙겼던 어머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괜한 걱정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가족으로부터 독립한 삶이 페이스를 찾아가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자신감이 생긴다. 6년 전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이혼한 후로 이제서야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가는 엄마를 잘 챙길 것이다. 내 정체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자주 소통할 것이다. 내 가족과 남편의 가족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게 될 그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