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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정욜의 세상비틀기

군형법 제92조 합헌결정. - 3월31일 너무 끔찍했던 하루, 그리고 새로운 다짐 -

by 행성인 2011. 4. 8.

군형법 제92조 합헌결정. - 3월31일 너무 끔찍했던 하루, 그리고 새로운 다짐 -

 

헌법재판소 앞에서 군형법 92조 합헌을 주장하고 있는 보수단체들

 

헌법재판소 소장과 재판관들이 입장하자 영상 카메라가 돌아가고 사진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TV에서만 지나치듯 봤던 헌법재판소 풍경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자니 처음엔 신기했지만 나중에는 엄숙함과 권위에 눌려 앞을 제대로 쳐다 볼 수조차 없었다. 2시부터 시작하는 헌법재판소 선고에 혹시나 방청권을 얻지 못할까봐 1시간 전부터 미리 와 있었다. 오는 버스 안에서 핸드폰으로 군형법 92조를 검색했다. 서대문 근처 한 교회에서 합헌결정을 위한 집단기도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블로그 글이 검색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먼저 와있던 교계 어르신들 덕분에 나는 방청권조차 얻지 못했다. 하지만 사법연수생의 도움으로 선고결과를 발표하기 5분전 방청석 맨 앞자리 좌석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 플래시 불빛이 약해지자 헌법재판소 소장이 입을 열었다.

“사건 2008헌가21 군형법 제92조 위헌제청 사건에 대해 주문부터 하겠습니다. 제92조 중 ‘기타 추행’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

합헌 5명, 위헌 3명, 한정위헌 1명이었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위헌의견을 밝힌 재판관의 내용이라도 건질까 싶어서 주의 깊게 들었지만 그들 역시 합의한 성행위조차 음란행위로 규정했고 보수교계의 눈치를 보는 듯 한 발언들이 귀에 거슬렸다. 법이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재판관들의 발언은 내 머리를 한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다음 선고로 넘어가기 전 20분 동안 나는 법원에서 마녀사냥 재판을 받는 듯 했다. 비정상, 비도덕이라는 말과 음란, 혐오, 문란이라는 말을 계속 내뱉어지는 사이 나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법이 이런 거구나.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3년 동안의 활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려운 법 내용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성애자는 헌법에서 규정하는 모든 국민에 해당되지 아니하고 감히 평등권, 성적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 등을 주장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헌법재판소 문 앞까지 걸어오는 발길이 너무 무거웠다. 기자회견을 통해 빨리 나의 심정을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는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 ․ 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와 함께 합헌 결정이 나든. 위헌 결정이 나든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모두들 얼굴이 굳어있었다. 헌법재판소 문 앞에서 왼쪽은 바른 성문화를 위한 국민 연합 등 보수교계와 단체 회원들이 있었고 오른쪽은 위헌을 간절히 원했던 성소수자들과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다. 선고결과 내용을 정리할 틈도 없이 우리는 바로 기자회견을 준비했고 결연한 심정으로 발언을 준비했다.

 

“대한민국 만세”, “동성애를 막아냈다”라는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교계에서는 섭리대로 당연한 결정이라고 환영했다. 왼쪽에 있던 이들이 승리를 환호하며 우리에게 야유를 보냈다. 물리적 충돌이 염려되었는지 어느새 경찰이 도착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기자회견을 계속 진행하려고 했지만, 경찰이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판하는 발언이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발언을 시작했다. 경찰의 2차 경고방송이 들렸다. 네 번째 발언자로 나선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있었지만 발언 내내 내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건너편 사람들도 경찰들도 내 발언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에 세상 모두를 향해 말하고 있는 듯 했다. 해산을 요청하는 경찰에게 “우리가 이 억울한 심정을 어디다 이야기합니까”라고 소리쳤고 야유를 보내는 건너편 그들에게는 “우리도 평등하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외쳐댔다. 건너편 분들은 계속 우리에게 소리치며 “군대에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과연 언제부터 그들이 군대에서만 안 된다고 했던 것일까. 떨리는 목소리와 손짓으로 발언을 끝낸 뒤 한참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우리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이후 대응 논의를 하기 위해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사무실에 모였다. 언론보도 기사내용과 헌법재판소 보도자료용 결정문을 확인하였다. 결정문을 보자니 삼류 찌라시 수준보다 못한 내용에 어이가 없었다. 합헌, 위헌 할 것 없이 군형법 92조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계간’ 조항을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끊임없이 제출했던 의견서와 탄원서를 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국방부 의견서와 허위사실로 도배되어 있던 보수교계의 의견, 탄원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 했다. 마치 이 조항이 없으며 군 기강이 없어지고 동성 간 성행위가 만연할 것처럼 표현한 구절에선 법을 빌미로 한 동성애 혐오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 했다.

 

밤 8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번 판결의 의미를 곱씹으며 앞으로의 대응을 논의했다. 3월31일 기자회견에 이어 더 많은 단체, 개인들에게 이번 합헌 결정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기자회견을 다시 열기로 합의했다. 기자회견문 초안을 준비하는 동안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의 2011년 신년사를 찾을 수 있었다.헌법재판소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 권력분립과 법치주의의 확립, 시장 경제의 건전한 발전 등 모든 분야에서 헌법의 이념과 가치가 존중되고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다. 나아가 세계적인 선진 헌법재판기관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무엇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이고, 무엇이 헌법의 이념과 가치가 존중되는 것일까. 과연 군형법 92조의 합헌 결정이 선진 헌법재판기관으로 도약할 수 있는 최선이었는가.

 

군형법 92조 최종 선고결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헌법재판소가 군형법 제92조에 대한 위헌결정 여부를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국회는 군형법 92조를 대폭 개정하였고 그동안 문제시 되어왔던 ‘계간’ 금지조항을 삭제하기는커녕 법정형이 1년 이하의 징역에서 2년 이하로 상향조정되었다. 더 악화된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원점에 서 있지 않다. 3년 동안의 활동 경험을 통해 합의에 의한 동성 간 성행위가 과연 형법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행위인지 사회적으로 의문을 던질 수 있었고 보수교계와의 쟁점다툼에서도 우리는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이제 하나 겨우 막아냈지만, 우리는 앞으로 군형법 92조의 개정은 물론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큰 현안을 가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논리가 과연 언제까지 먹혀들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성소수자들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도록 지금부터 다시 재정비해야 한다.

 

정욜_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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