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의 여자친구. 그리고 엄마와의 달고 쓴 여행의 기록
1편 - 프롤로그
엄마와 여자친구와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나는 고등학교 반 배정 고사 날 처음 만나서, 십년을 넘게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 우리는 몇 해를 함께 살기도 하였지만, 내가 한국에서 더 이상 살지 않게 되면서, 얼마 전부터 일 년에 4번 정도를 만난다. 아름답고, 가끔 집요하기는 하지만 똑똑하고, 사려 깊고, 계획적이고, 나를 멀리서도 통제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독립적이고 심지가 굳은 여자 친구 덕분에, 우리의 관계는 가끔 위태롭기는 하지만 여전히 뱃속이 간질간질하게, 마음 속에 그리움이 찰랑찰랑 차오르게 잘 진행되고 있다.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나에게 시집가라는 소리를 이따금 하기는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우리 딸은 시집을 늦게 갈 거라고, 아직 결혼은 이르다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 엄마는 내 여자 친구를 오랫동안 알아 왔으며, 고등학교 담임교사가 나랑 내 여자 친구랑 서로 사귄다는 이야기를 진로 상담 시간에 대놓고 전할 때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그래서 어쩌라는 반응을 할 정도로 자존심이 세고 누구 앞에서든 내 편을 들 분이지만, 내 여자 친구가 집에 올 때마다, 이렇게 예쁠 때 얼른 시집가야지라는 이야기를 해서 내 여자 친구 속을 다 뒤집어 놓곤 한다. 그래도 나는 명품 가방을 사느니 그 돈으로 스쿠버 다이빙를 배우고 싶다는 우리 엄마가 멋지다고 생각한다.
우리 셋은 모두가 무언가를 아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나는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 "말하지 않음"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 알게 된다면 억지로 헤어지게 될까봐, 정신 병원에 끌려가 갇히거나, 기도원에서 전도사에게 복숭아 나뭇가지로 두들겨 맞거나, 그래서 결국 서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여자 친구네 집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 나에게는 정말 사실적인 공포였다) 어린 나는 부모가 두려웠다. 조금 더 커서는 부모가 나로 인해 또다시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촌이나 고모나 이모나, 나는 이제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친척들의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오로지 누가 누구에게 시집가고 장가를 가서 애를 몇이나 낳는지가 대화의 중심인 관계 속에, 나는 관여하지 않을 테지만, 엄마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말하지 않음"의 핵심에는 결국은 내가 "배은망덕한 딸", 그렇게 지극히 아껴주고 사랑해줬지만, 결국은 부모를 배신하는 "배은망덕한 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식은 부모의 빛나는 면류관이라는 엄마의 말 속에는 언제나 남들 보기에 잘난 딸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기대가 있었고, 초등학생이던 나는 어버이날 카드에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다는 말을 적어 넣을 만큼, 충실하게, 이 빛나는 딸 노릇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노력 뒤에는, 물론 고생하시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렇게 이 "말하지 않는" 관계가 이어져왔다. 함께 사는 동안에는 갑자기 찾아오는 부모님 때문에 놀러온 친구들을 혼비백산으로 쫓아내고, 비지니스 호텔이나 친구 집으로 여자 친구가 도망을 가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몇 번이나 생기기는 하였지만, 그런 날에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여자 친구를 찾으러 가는 택시 안에서 목 놓아 엉엉 울기도 하였지만 (일요일 새벽 6시에 추리닝 입고 택시를 타서는, 아저씨, 강남역 이비스요, 으허허헝, 아저씨가 암말 안하고, 그냥 가줘서 다행이지), 그래도 들키지 않고, 혹은 말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든 무언가를 헤쳐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가 들어서, 아는 사람 결혼식이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배알이 뒤틀려 심통을 3만원어치는 부려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억압적인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주의 가족 체제 따위는 이쪽에서 버려주마, 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시민연대 속에서 사랑과 연애를 할테다’라는, 나 스스로의 긍지가 있었다. 내가 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두 주먹 번쩍 쥐고, 민주적이고 평등한 시민 연대 어쩌고를 하면, 내 여자 친구는 ‘아 네네’, 하며 들은 척도 안 할 때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좋은 삶을 함께 살고 있다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우리의 연애 속에 있었다.
그리고 이 민주적이고 평등한 시민 연대에 대한 나의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중요한 두 명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분명 즐거울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였다. 긴 타지 생활이 외로웠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개발도상국의 가혹한 현실 속에 1년을 살다보니, 나는 정말 간절히 가족이, 부모와 여자 친구로 구성된 내 마음 속의 가족이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여자 친구에게 갖은 애교와 감언이설로 이 말도 안 되는 여행을 애걸하였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내 여자 친구는 땡볕에 뭐에 쓰인 듯이 혼자 돌아다니는 나에 대한 동정에 이끌려, ‘그래, 그럼, 너 좋다는 데로 하자’라는 답을, 선물을 나에게 주었다.
물론 여기에는 엄마에게 유럽 여행을 시켜주는 효녀 딸이 되고 싶다는 허영심이 섞여 있었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두고 혼자만 어디 좋은 데에 다닌다는 데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이상 "말하지 않는" 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운 순간이 올 거라는 판단이 서기도 하였고, 또 말하고 싶은, 그래서 인정받고 싶다는,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커다랗게 자란 욕망이나 희망이나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여자 친구가 무언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혹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알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좋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만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나에게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그걸 통해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직업적인 믿음이 있다. 우리가 관계의 틀에 의지하지 않고, 엄마나 딸, 남편과 며느리 같은, 이미 반쯤 정해진 특정한 관계의 방식에 의지하지 않고, 타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딸의 여자 친구 같은, 한국을 비롯한 여러 이성애자 중심 사회에서는 영 기괴하고 비정상적인 관계도 어쨌거나 다른 모양을 띨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여행에 무슨 계획이나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커밍아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앞서의 일정이 너무나 바빴고,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폭풍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하고, 일정표를 무려 엑셀 파일로 만들고, 결국은 말만 많고 계획에 아무런 도움도 안 주는 멍청한 애인의 방조 속에 조석으로 마음이 바뀌는 50대 부인의 의중을 연구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도대체 무슨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손이 발이 되게 여자 친구님께 비느라, 사실 커밍아웃 같은 걸 생각할 틈도 없었다. 비행기 표와 숙소 예약이 다 끝난 상황에서, 전능하신 여자 친구님은 그 모든 위약금을 다 내더라도 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셨고, 나는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게, 제발 함께 가면 안 되냐고, 다시 애걸복걸을 하느라 목이 탔고, 그래서 커밍아웃의 전략 따위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또한 엄마가 처음 온 외국에서, 엄마에게 무언가를 터트리는 건, 그건 아무래도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냥 무사하게 모두가 좋은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기만을 바라게 되었다. 물론 아무것도 내 사정대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여자 친구와 엄마가 한 비행기를 탔고, 우리는 런던과 파리, 스위스의 인터라켄을 12일에 걸쳐 다녀왔다. 여행을 가기도 전에 이미 이 여행 계획은 내가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세 가지 결정 중의 하나가 되었다. 사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이 시간을 통해 내 인생의 그 어떤 중요한 부분이 어떻게든 바뀐 것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뭔지 아직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동인련 활동가 한 명이 여자 친구에게 그 여행을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 나는 도끼눈을 뜨고, 아니 지금 활동가가 우리에게 벽장 속에 있으라고 종용하느냐하며 내심 미운 소리를 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그 조언이 얼마나 많은 삶의 성찰을 담고 있었는지를 다시 생각한다. 동인련 활동가 두 명이 무려 스크린을 통해 영화배우로 전국적 커밍아웃을 하는 이 아름다운 때에, 친구들의 용기에 답하기 위해서, 멀리 있어 더 많이 그리운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여자 친구의 검열 아래, 총 5편에 걸쳐서 이 달디 달고 쓰디 쓴 여행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친구들, 그리워요!
후원금을 내자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회원 이야기 > 회원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이의 사랑에서 섹스를 해방하라! (2) | 2011.08.04 |
---|---|
감성청년, 동성애자인권연대를 만나다! (2) | 2011.08.04 |
제대 기념 선물 (4) | 2011.04.10 |
위로의 편지 - 저는 아직도 따뜻한 봄날을 기다립니다 - (3) | 2011.04.08 |
<종로의 기적> 그리고 커밍아웃 (0) | 2010.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