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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의 사랑에서 섹스를 해방하라!

by 행성인 2011. 8. 4.

게이의 사랑에서 섹스를 해방하라!


사와코와의 섹스가 사막에서 마시는 한 잔의 물이라면

엠마의 그것은 푹푹찌는 열대야 속에서 온 몸으로 뒤집어 쓰는 소낙비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 마실지,

몸 속까지 푹 적실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의 갈증은 해소된다.

-요시다 슈이치,<최후의 아들>, 73쪽


나는 이 글에서 게이의 사랑과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쉬운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게이는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아마도 게이의 일차적 조건은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는 사실에는 부정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사랑’에는 ‘섹스’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섹스가 배제된 남자 간의 사랑은 우정이나 의리, 전우애 등 상황에 따라 다른 여러 감정적 유대로 명명되거나, 혹은 그러한 감정적 유대들과 구분짓기가 애매모호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게이들의 사랑에는 섹스가 유독 특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른 질문 하나를 더 해보겠다. 한 남자와의 모노가미 관계를 10년 간 유지해왔지만 섹스가 부재한 게이와 단 한 번도 장기간의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10년 간 짧은 연애나 번개, 찜질방 등을 통해 매주 섹스를 해온 게이가 있다고 하자. 과연 이 두 게이 중 누가 더 게이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누가 더 ‘올바른’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선택의 문제일 뿐, 어느 쪽이 더 게이답다거나 더 올바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대부분의 게이들은 전자를 추구하고 또 그래야만 된다는 압박을 받는다.


나는 앞서 게이 간의 사랑에서 섹스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런데 장기간의 연애로 파트너에게 성적 흥미를 잃어 섹스를 등한시하는 게이는 이제 어떻게 스스로를 게이로 정체화해야 할까? 모노가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뭇 남성과의 섹스를 욕망하면서도 죄책감이나 주변의 시선을 위식하며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게이는 행복할까? 장기간의 연애를 부러운 눈길로 치켜세우며 자신을 치하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행복해 해야만 하는 것일까?


동성애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성애자와의 성애적 차이를 드러내며 섹스 자체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애초에 같은 성과 섹스를 하는 사람이라는 일탈적 변태 성욕자의 이미지가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보다 선행했기 때문이다. ‘동성연애자’라는 성애 중심적 표현을 정치적으로 올바른 ‘동성애자’라는 호명으로 정정해왔던 움직임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동성애자들의 두드러진 성애적 측면을 순화시키고 이성애자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도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렇게 뒤로 물러난 섹스는 사랑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행위가 되어버리거나, 적어도 가벼운 섹스만을 추구하는 게이는 진지한 연애 상대를 구하는 게이보다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소 과격하게 말해, 동성애자들은 사랑에 종속되어 있던 섹스의 독립을 위한 첨병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의 그 독립운동은 찜질방이나 인터넷 상에서 은밀하게 이뤄질 뿐, 실상은 많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적 사랑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많은 퀴어영화들이 방탕한(?) 성 생활을 즐기던 주인공이 진실한 사랑을 만나 구원(?) 받는 해피엔딩(?)를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이성애자들과 다른 조건 속에서 추구하는 그 모방에는 필연적으로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 균열에 섹스를 구원하는 동성애의 전복적 가치가 숨어있다.


동성애가 미정신의학회에서 정신질환 항목에서 삭제된 후,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 간의 연애와 이성 간의 연애가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서는 게이 커플이 이성 커플보다 오래 가는 경우가 드문 것은 그들이 게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남성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여성과 달리 남성은 ‘구분compartmentalization’이라는 과정을 통해 섹스로부터 감정을 분리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로 인해 모노가미 관계의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정절을 지키기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게이커플들이 몰래 바람을 피거나 아니면 합의를 통해 관계를 오픈하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이 다른 남자와의 섹스가 오히려 자아를 긍정하고 커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거짓말을 하면서 드는 죄의식이나 외도 사실을 들켜서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기능이 부정적 기능보다 크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전통적 의미에서의 모노가미 대신에 ‘감정적 모노가미’라고 새롭게 명명한다. 다양한 사람과 즐기는 섹스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게이 간의 이상적 연애 관계를 재정립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여기서 드는 의문하나. 우리가 여기에서 목도하는 것은 전통적 모노가미에서 외도를 인정하는 감정적 모노가미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라, 모노가미라는 개념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다. 왜 게이들은 감정적 모노가미라는 대안적 개념까지 만들어가면서 스스로를 장기적인 모노가미의 틀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일까? 실상 따지고 보면 감정적 모노가미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암묵적으로 많은 이성애자 부부들이 성적인 구속이나 여타 조건보다는 감정적 유대를 우선으로 결혼 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노가미 관계를 이상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이상, 게이 커플과 이성애자 커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들이 합법적인 부부관계이든지, 성적으로 오픈된 연인관계이든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합의를 통해 허용된 섹스일지라도 결국 변주된 모노가미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섹스는 외도라는 이름 안에 갇힌 채 절반의 해방밖에 성취하지 못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한 사람과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연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게이들은 병리학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다. 과거에 동성애가 정신질환 목록에 기입되었듯이, 실제로 이들은 정신과 치료의 대상으로 분류된다. 모노가미에서 벗어난 사랑은 비정상적인 사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통념에 따른, 혹은 의학적 기준에 따른 일대일의 장기적 관계 맺기란 무엇인가? 한 사람과 한 달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 비정상이라면, 반대로 한 사람과 10년을 넘게 같이 사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관계를 오래 지속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이것은 제3자가 재단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선택의 문제이다. 찜질방에서 만난 익명의 누군가와 섹스를 하더라도 그는 자기 방식대로 게이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연애를 오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반면에, 이 바닥에서의 1년 동안 사귀는 것은 이성애자들의 10년과 맞먹는다는 자조 섞인 푸념은 용납할 수 없다. 게이를 게이답게 하는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한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한 시간의 총량이 아니다. 단 하루를 만나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며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듯 열심히 섹스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게이다운 것이다. 섹스를 사랑의 노예로 만들지 말자. 동성연애를 하자. 게이라는 성 정체성에 잠재된 무한한 역능을 헤프게 풀어헤치자.


게이섹스해방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