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욜(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에이즈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나는 이 질병에 걸리고 나서 가족도 떠나고 친구도 떠났습니다. 사람들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주세요”

 

토론회에 참석한 한 감염인이 손을 들고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이 발언을 듣고 한 동안 멍해졌다. 에이즈 예방을 위해서는 공포를 덜어내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었지만 그 순간엔 어떤 말이 과연 정답이 될 수 있을지 고민되었다. 감염인 앞에서 에이즈는 무서운 질병이 아니라 관리만 잘하면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사실조차 말할 자신이 없었다. 여느 토론회나 포럼과 다른 분위기도 내내 걸렸다. 마치 몸에 밴 듯이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감염인들의 태도 속에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오롯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감염인 자조모임 인터뷰에서는 수동적으로 복지서비스를 제공받기만 하던 타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되었다.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에서 준비한 토론문에도 유독 부탁과 감사가 아니라 인권과 복지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감염인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과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 것이라는 계획, 다짐이 많았다.

 

에이즈, 다르게 생각하기 토론회 포스터

 


이번 토론회는 지난 1년 동안 감염인 자조모임과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기관 10곳을 선별해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오랫동안 HIV/AIDS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자부해 왔지만 HIV/AIDS감염인 자조모임이나 HIV/AIDS관련 기관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가깝게 만나 어떤 활동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감염인들에게 어떤 복지서비스가 제공되는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터뷰 기획은 출발했다. 먼저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소속단체(카노스, 건강나누리+, 가톨릭레드리본 소속의 감염인모임)들과 대구 경북지역 감염인 자조모임 <해밀>, 2011년 말 결성된 10-20대 감염인 모임 <알>을 만났고 감염인들을 대상으로 지원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는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한에이즈예방협회 대구경북지회, 종교기관으로서 가톨릭레드리본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 외 병원에서 감염인들을 상담하고 있는 상담간호사와 남성동성애자 대상으로 에이즈 예방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에이즈퇴치연맹 동성애자사업부 <아이샵>과의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감염인 인권과 복지 현실 전반을 다루기엔 한계가 많았다. 편중된 인터뷰이들의 발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만큼 객관성을 담보하기도 어려웠다. 토론회에서 그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고대회의 정리된 글의 가치보다 인터뷰를 위해 직접 찾아다니며 2시간 남짓 주어진 시간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것들을 물으며 정리해 낸 그 과정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곳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시간은 아이샵과 감염인연합회 소속단체들과의 인터뷰였다. 아이샵은 남성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콘돔배포 및 홍보, 검진사업을 하고 있는 만큼 비판과 제언자의 위치에서 아이샵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봐 왔기 때문이고 연합회 소속단체의 경우 별도의 모임으로 따로 있다가 연합해서 운영하게 된 계기, 당사자들이 느끼는 자조모임의 중요성, 앞으로의 활동계획, 성소수자 인권운동과의 관계 등에 대해 가깝게 듣고 싶었다. 이 둘은 게이로서 어떤 가치와 방법을 가지고 에이즈 인권운동에 접근해야 할 지 고민을 던져 준 자리이기도 했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부분은 에이즈 운동의 당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다. 토론회 자리에서도 제기되었듯 ‘왜 당사자가 아닌데 이런 토론회를 개최하느냐’라는 질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나는 단 한 번도 에이즈 인권운동의 주체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꽤 많은 나의 친구들이 HIV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고 자신의 과거가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에 이런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거나 낙원동과 이태원에서 버림받을까 두려워 더 음지로 숨어들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질병예방차원을 넘어서서 성소수자 스스로 건강하게 살기 위한 권리로서 에이즈예방과 인권을 위한 활동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이들이 HIV감염에 취약한 것은 정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수의 남자와 수차례의 항문성교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과 낙인, 그리고 에이즈 공포심이 문제라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성소수자 운동도 에이즈 예방과 성소수자 권리의 연결지점을 확인하고 아이샵에 에이즈 예방활동의 모든 것을 위임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보완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콘돔에 대한 접근이 잘 되고 있는지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지금 성소수자 인권수준에 대한 평가가 더 절실하다. 하지만 아이샵과의 간담회에서는 에이즈 예방을 위해서, 콘돔을 더 자주 습관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막연한 공포감이 아니라 현실적 공포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적 공포감이 나와 성관계를 맺는 사람이 감염인일 수 있다는 의심과 ‘아차!’ 하는 사이 감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라면 감염인 인권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에이즈 예방 전략을 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샵이 비감염인을 위한 서비스 제공자의 위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국 감염인 성소수자가 아닌 그 누구도 에이즈 인권운동의 주체가 되긴 힘들 것이다.

 

연합회와의 간담회에서는 질병유무에 따라 당사자와 지지자 역할로 확연히 구분되는 현실을 마주했다. 여기서 성정체성이 동일하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동인련에서 주관한 토론회 기획조차 왜 자신들과 상의를 하지 않고 결정했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여전히 감염인 당사자들은 그동안 목소리내지 못한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주체들의 등장을 불편해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만 쉽게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자조모임을 구성하고 친목과 인권을 동시에 목표로 하는 모습은 스스로 역량을 키워나가기에 더 없이 좋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분들의 삶의 경험은 자조모임을 튼튼하게 구성하게 하는 자양분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비감염인-감염인 사이의 거리두기는 에이즈 예방을 위해서도,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뷰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 관련기관들은 예산과 프로그램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치와 받는 사람의 위치를 확연히 구분하고 있었고 감염인 자조모임은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감염인 인권을 염두해 두지 않는 비감염인 대상의 에이즈 예방활동이 과연 모두에게 도움되는 방향인지도 평가되어야 하고 에이즈 예방활동의 방향도 재검토를 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하기도 했다.


꽤 많은 감염인들이 <에이즈, 다르게 생각하기> 토론회에 참석했다. 오히려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이 쭈뼛쭈뼛거릴 정도였다. 자신의 질병을 직접 밝히며 발언을 하는 감염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토론 정리발언에서 나는 성소수자 인권단체가 준비한 에이즈 관련 토론회에서 감염인들의 참여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오늘 이 자리가 큰 변화의 시작임을 강조했다. 2000년대 초반 감염인 자조모임 행사에 게이들이 쉽게 초대받지 못했던 시기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에이즈 토론에 관심 있어 처음으로 참여한 성소수자들이 있었다면 보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보다 토론회 분위기, 감염인들의 발언 속에 담긴 의미를 가지고 더 많은 고민이 들었을 것이다.


ps. 긴 시간동안 감염인들과의 소통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부족한 인터뷰 결과물을 에이즈 인권운동의 ‘모든’ 주체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준비해 준 HIV/AIDS인권팀 활동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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