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동인련 HIV/AIDS 인권팀)

 

상식을 배반한 약값

지난 2월, 어줍지 않은 영어실력 덕에 통역이라는 명목으로 태국에서 열린 APN+(아시아 태평양 HIV/AIDS 감염인 네트워크) 총회에 다녀왔다. 유난히 추웠던 2월 초, 갑자기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난 내 몸은 바로 이상신호를 보내왔고, 겨우내 안 걸렸던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렸다. 통역이라면 종일 말을 해야 하는 일, 감기기운을 감지하자마자 근처의 약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약사가 권한 항히스타민제를 받아들고 계산을 하려는데, 가뜩이나 막힌 코를 꽉 막히게 만드는 가격. 한국 비보험 감기약의 3배였고, 태국의 백화점 식당가에서 먹은 저녁 한 끼 값보다도 비쌌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국적 제약회사의 제품이었다.

안 먹어도 그만인 고작 만원 남짓한 감기약에 대한 이야기로 전 세계 환자들의 생명과 직결된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일이야 말로 내가 ‘약의 적정한 가격은 얼마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 나라의 물가사정을 고려했을 때 개개인의 환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 가난한 환자들에게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가격, 그리하여 모든 환자들이 부담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가격. 답은 간단하지만 현실에서 구현하기 쉽지 않다. 더욱 강력하고 광범위한 특허권을 주장하는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탐욕은 이 간단한 답을 배반하고 있다.


 

“세계의 약국”이 되기까지

2007년, 국제 의료 구호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는 인도를 “개발도상국을 위한 약국(Pharmacy for the developing world)”이라고 묘사했다. 120개가 넘는 개발도상국에 공급되는 에이즈 치료제의 90%는 인도산 복제약이며, 전 세계 에이즈 치료제의 50%가 인도에서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항생제, 항암제, 혈압약, 당뇨약 등 전 세계의 20%의 복제약이 인도에서 공급된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포함한 국제 의료 구호단체들은 물론 저개발 국가의 환자들에게 에이즈 치료제를 공급하는 글로벌펀드, 유니타이드(UNITAID, 국제의약품구매기구)도 인도에서 복제약을 사간다. 그리하여 인도라는 거대한 약국의 존재는 저개발 국가의 환자들의 생명줄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현재의 인도는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세계의 약국은 인도정부의 제약 산업에 대한 육성정책, 건강권을 보호하기위한 조항을 담은 특허법, 그리고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위기의 순간마다 싸워온 환자들과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의 제약 산업은 80% 이상이 초국적 제약회사가 점유하고 있었으며, 인도의 의약품 가격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준이었다. 1972년, 이러한 현실을 180도 변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도 정부가 복제약 생산을 통해 자국의 제약 산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자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보호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특허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것이다. 이는 인도가 값싼 약의 공급자로 인정받으며 세계 의약품시장의 주체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신자유주가 세계를 휩쓸면서 복제약 생산을 가능케 한 인도의 특허법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인도의 활동가들과 이에 연대하는 전 세계 활동가, 환자들이 존재했기에 세계의 약국을 지킬 수 있었다. 특히 2005년 무역관련지적재산권 협정(TRIPs)으로 인해, 인도에 물질특허가 재도입 되고, 인도의 특허법이 재개정되는 위기의 순간, 이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의약품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인도 특허법의 안전장치들은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장사”

인도가 계속 세계의 약국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사건의 결과에 달려있다. 하나는 스위스계 제약회사 노바티스의 인도 정부에 대한 소송이며, 다른 하나는 협상이 진행 중인 인도-EU FTA다. 복잡해 보이는, 별개의 두 사건이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현재의 인도 제약 산업을 가능하게 했던 인도의 진보적인 특허법을 무력화하겠다는 것.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전 세계 환자들의 생명을 받치고 있는 인도 특허법의 보호막을 허물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약의 연구개발을 지속하기 위해 특허라는 “권리”의 보장이 핵심적이니, 환자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조치니 핑계를 대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시장에서 이윤 정체되고 “블록버스터 약”들의 특허기한이 만료되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된 계산을 덮어버리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초국적 제약회사들은 지금 세계의 약국인 인도의 복제약 산업을 무력화시켜 저개발 국가의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장사”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의약품 접근권과 초국적 제약회사의 횡포를 이야기할 때면 처음 떠오르는 얼굴은 역시 가브리엘이다. 기존의 에이즈치료제에 내성이 생겨 초국적제약회사 로슈의 신약 푸제온이 필요했던 윤가브리엘의 싸움은 환자들이 죽어가는 이유가 지구상에 약이 없기 때문이 아님을 너무나 절실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로슈의 수지타산은 한국의 에이즈환자를 배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2012년 3월 현재까지 여전히 가브리엘에게 푸제온은 “(한국에서 감당가능한 적정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공급” 중이다. 가브리엘은 푸제온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지만, 로슈가 언제까지 무상공급을 지속할 지 알 수 없다. 약의 공급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약값을 결정하는 것도 오로지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

 


폴린과 가브리엘과 우리

작년 8월 부산에서 열린 ICAAP(아시아태평양 에이즈대회)에서 만났던 액트업 파리(ACT UP Paris)의 활동가 폴린은 가브리엘에게 “건강하게 살고 있는 당신을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 그리고 고맙다”라고 말했다. 2008년에 로슈규탄국제공동행동에 참여했던 그녀와 가브리엘이 실제로 만나 인사를 주고받고, 함께 웃던 순간을 기억한다. 우리가 인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열 가지쯤은 댈 수 있지만, 마지막에 남는 건 사람들의 얼굴이다.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삶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수많은 가브리엘들, 세계의 약국을 위해 전 세계에서 함께 싸우고 있는 수많은 폴린들. 우리가 인도의 목격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1. 정욜
    2012.04.10 10:02 [Edit/Del] [Reply]
    약이 필요한 환자 가브리엘과 그를 전혀 모르지만 함께 싸웠고 한미FTA반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부산아시아태평양대회(ICAAP)까지 찾아와줬던 액트업파리의 폴린. 그리고 우리.

    인도와 제3세계의 에이즈환자의 의약품접근권을 위해 함께 싸우는것은 어쩌면 매우 단순한 이유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바로 ICCAP 마지막날 벡스코 앞 한 호프집에서 폴린과 가브리엘, 그리고 우리들이 늦은시간까지 맥주잔을 기울였기때문이다. ^^
  2. 이경
    2012.04.11 01:31 [Edit/Del] [Reply]
    글 정말 잘 읽었어요~ 첫 문단도 마음을 움직이더니 마지막까지 왜 싸우는가에 대해 보다 명료해지는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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