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14. 산 - 세이브, 오토매틱

2015. 3. 10. 23:15무지개문화읽기/[김비 장편소설 연재]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長篇小說

 

 

金 飛

 

 

14. - 세이브, 오토매틱 

 

 

 지나고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일들이 있다. 내가 도착하려고 했던 곳이 아닌데, 흘러가듯 따라가다 보니 여기가 된 것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왔던 길을 되짚기보다는 떠밀린 여기 이 자리에서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을 찾느라 바빠진다. 어떻게든 되돌리려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들을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옳은 반성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뒤틀려버린 그녀와의 관계를 두고 화가 났다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끄집어내 늘어놓기 바빴다.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던 생각이나 마음가짐까지 어리석게 느껴져, 그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배려이자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한 넘치는 예의였다고 생각해버렸다

 고작 육 개월 아닌가? 몇 번 되지 않던 이전의 관계들과 비교해도 그건 너무 짧고 보잘 것 없던 시간이라고, 망가진 관계를 더 멀리 떠밀기만 했다. 그게 나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헌데, 그녀 생각은 이상한 순간에 불현듯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두려움과 같은 타래였다. 한 번도 온전히 누군가와 함께였던 적 없었으면서 두렵다는 생각이 들면 그녀가 떠올랐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내 어깨를 두드린 것처럼,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 나면 오싹 소름이 돋았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그녀가 그리웠다

  그래,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하는 구나.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마음 편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쉽게 인정해버린 공포는 더욱 생생했다. 혼자 누운 방이 갑자기 커졌거나, 침대 안에 갇힌 내가 갑자기 작아졌거나, 세상과 나 사이에 내가 모르는 공간이 드리운 느낌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을 버리고 나니, 몰랐던 차원의 공간이 내 주위를 감쌌다. 초겨울 같은 바람이 일렁였고, 불량배의 발길질처럼 툭툭 불규칙한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단지 누군가에게 주었던 마음을 거두어오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어디론가 끌려갔다. 어둡고, 축축하고, 반갑지 않은 소리들이 들려오는 어딘가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일상에 매달렸다. 다니던 직업 교육원 수업도 빠지지 않고 들었고, 그녀를 만나며 시작했던 헬스클럽에 다니는 일도 그만두지 않았다. 그녀와 같이 갔던 음식점에도 일부러 혼자 찾아가 접시 하나를 싹싹 비웠는데도, 나를 둘러싼 초겨울의 공간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상실감. 알지, 상실감. 그러나 인정하고 몰두하고 알겠다고 그거 안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더 고립되는 것만 같았다. 또 다시 내가 원하지 않는 어딘가에 어쩌다 보니버려진 나를 발견할까 봐 겁이 났다. 나는 다시 간절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반복된다 싶더니 나는 그녀에게 메일을 쓰고 있었고, 고작 상실감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의 SNS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써놓은 옛날 글 하나를 찾았다. 그건 나와 만났던 연애 초기에 그녀가 적은 두 문장이었다

 ‘그가 나와 다른 여자 사이에 고민하게 된다면, 나는 그를 붙잡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사랑은, 끊임없이 낭떠러지를 따라 걷는 위태로움이다.’ 

 공포에 질린 게 나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게 혼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를 만나고, 사랑하고, 온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런 두려움이고 위테로움이라니, 나는 모니터 화면을 붙들고서 울고 말았다.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그녀를 붙들고 싶었다. 그녀를 구하고, 나도 같이 구해지고 싶었다. 더 이상 어쩌다 보니그렇게 되고만 길 위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영화 보러 갈래요? 그 때처럼요, 우리 맨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광화문 서점에서 처음 만났던 그대로.” 

 

 따스한 온기로 내 품에서 몸을 말았던 그녀가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묻었을 눈물 자국을 그녀가 쓱쓱 닦아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이번에는 내가 그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고, 그녀가 내 온기를 들이 마시듯 나도 그녀의 온기를 들이마셨다. ‘어쩌다 보니그렇게 되어버린 지금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때처럼 우린 처음 만났던 그 정류장에 다시 섰다. 그녀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앉았고, 나도 그때 앉았던 그 정류장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그녀의 블로그에 글 하나를 올렸고, 그녀도 건너편에서 나를 처음 본 것처럼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정쩡하게 든듯 만듯 한 손이 아니라, 반가워 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는 그런 손짓이었다

 그녀와 나는 길을 건너지 않고, 각자의 길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8차선 도로가 있었고, 속도를 높이는 자동차들이 있었고,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지우고, 오로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서로만 바라봤다. 너무 멀어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그녀의 표정이 나와 꼭 같으리란 사실을. 그녀도 그렇게 그곳에서 나의 표정을 읽고 있는 것을

 우리는 칠순이 넘은 노년의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영화를 봤다. 그때까지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영화는 별로였다. 노년의 남녀가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곤, 모든 상황들이 현실감이 떨어졌고 억지스러웠고 두 사람 모두 또 다른 의무감으로 행복을 향해 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삶의 마지막을 목전에 둔 그 시간까지 내달리는 것만 같은 사랑을 해야 한다니, 나는 그 영화가 그린 사랑을 믿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영화를 보았지만 지금 우리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 했고, 그때처럼 똑같은 카페에 똑같은 자리에 앉아 다시 서로 손의 크기를 쟀다. 신기한 것은 우리 두 사람 손의 크기가 비슷해진 듯했다. 나의 손은 그녀의 손을 향해 작아졌고, 그녀의 손은 내 손을 향해 커진 것처럼. 그날의 비가 내리던 어두운 날씨와 어두운 조명이 만든 착시였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마저 우리의 빛깔이라고 믿었다.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멋대로 규정하면서



 이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망설이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면 그 말의 무게가 덜어지거나 닳아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더 이상 사랑을 놓고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진 않는다. 그건 기껏해야 두려움이거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제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더욱 더 사랑이 된다.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그 모든 감정들이 사랑이 된다.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사랑해야하는 때임을.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웃는다. 그녀가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녀의 두려움, 위태로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만 말한다. 사랑으로 그녀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놓지 않으니, 내 사랑이 된다. 그녀의 위태로움도 곧 내 쪽을 돌아볼 것이다. 사랑의 쪽을, 내 쪽을

 

 이제 나는 두렵거나 공포에 질리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나는 사랑이다. 내가 내 사랑의 주인이다

 

 

김비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