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2015년 행성인의 상반기 활동평가에서는  운영회의나 활동팀 외에도 단체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통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에 행성인은 회원들의 주도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활동역량을 강화하고자 회원모임을 기획했습니다. 회원모임에서는 회원들과 함께 LGBT 운동의 주요 의제들을 놓고 열린 교육과 쟁점 토론 등을 하는 자리입니다. 물론, 주제에 관심이 있는 비회원 여러분들도 참여가 가능합니다.


 

행성인 9월 회원모임



지난 9월 18일, 행성인 회원모임에서는 류민희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를 이야기 손님으로 모시고 혼인평등운동의 현황과 과제를 듣고 이야기나눴습니다. 류민희 변호사는 혼인평등이라는 용어의 사용 변천사부터 미국의 혼인평동운동 역사, 동성혼제도의 세계적 현황, 국내외 이슈와 현황을 들려주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혼인평등 이슈에 관심을 갖고 계시리라 생각하는 만큼, 이 글에는 발제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동성결혼? 혼인평등?


발표의 첫 꼭지는 혼인평등 용어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비이성애적 성적지향을 통틀어 gay라고 부른 것을 바탕으로 gay marriage(동성애자 결혼)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며 성적지향으로 결혼을 불허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 same-sex marriage(동성결혼) 또는 gender-neutral marriage(성중립적 결혼)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marriage equality(혼인평등)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돼 운동에 대중적인 추진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혼인평등은 이미 존재하는 혼인제도에 소수자의 원천적 진입금지가 명백한 차별이라는 주장이 담겨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결혼은 이성간의 결합이라는 것은 변한 적이 없었으므로 원래부터 너희 것이 아니며 고로 차별이 아니다’는 것이 반대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여기에 혼인평등은 결혼을 재정의하기보다 기존 결혼제도에 소수집단을 배제하는 것이 차별이나 불평등임을 주장하며, 혼인평등을 실현함으로써 결혼제도를 소외집단으로 확대하는 것일 뿐임을 주지시킵니다. 혼인평등에 함의된 정치적 의미를 듣다보니 우리의 투쟁에 사용하는 단어 하나가 가질 수 있는 힘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좀 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고요.


호주나 유럽 등 서구국가들에서는 혼인평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보편적입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는 어떨까요? 동성혼 법률이 국회에 제출된 상황인 대만에서는 이미 혼인평등이라는 단어가 운동의 슬로건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 관련단체에서 동성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지자체 단위에서 파트너쉽 제도를 만드는 모습을 보이지만 아직까지 혼인평등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가 높은 상황은 아닌 걸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상황도 그리 녹록치는 않습니다. 2015년 7월 6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동성혼소송 심문기일 기자회견에서 외친 평등, 사랑, 존엄이라는 가치를 내세워야 했던 것은 불평등과 차별, 배제는 끝내야 한다는 메시지가 혼인평등이라는 용어만으로는 대중에게 온전히 전달되기에 어려운 상황을 반영했다고 합니다.


 

환호 그리고 탄식


물음은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왜 ‘결혼’일까요? 이 질문으로 류변호사는 지난 50년간 혼인평등과 관련한 미국의 운동과 사회변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알다시피 지난 6월 26일 미 연방대법원은 동성결혼 합헌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처음 혼인평등 운동이 일어나던 1970년대와 현재를 비교하면 법리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회의 인식 변화가 근본적인 뒷받침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모든 주에서는 동성애를 금지하는 소도미법이 존재했고 커뮤니티 또한 제한적이었습니다. 당사자들 또한 동성결혼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했다고 합니다.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70년대에 들어서 성소수자 운동이 성장했지만 비범죄화와 차별금지, 정치권 진입이 주 목적이었고 혼인평등은 우선의제가 아니었습니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APA)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에서 제외하고 7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성 동성애자인 하비 밀크가 시정감독관으로 당선되는 등 운동이 진전하는 동시에 반동성애진영 또한 조직화되었고, 1980년대 에이즈위기를 겪으면서 법 바깥에 있는 동성관계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결혼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을 확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열망과 법적 투쟁의 과정을 거쳐 1982년 미국 위스콘신 주에서 성적지향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20여개 주로 확대되는 성과를 올립니다. 이 기세를 몰아 1986년에는 연방대법원이 조지아주 소도미법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게 되는데요, 빠른 발걸음만큼 저항도 커진 걸까요? 5:4의 의견으로 소도미법 합헌 판결이 납니다. 판결은 혼인평등 운동과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기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법적인 투쟁에 대한 신중론이 등장, 이후 LGBT 운동에서 법적 운동이 주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중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비혼자에 대한 세금부과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1991년 하와이에서 다소 뜬금없이 제기된 소송에서 동성결혼 배제에 대한 주 법원의 위헌 판결이 나온 것이죠. 그러나 여지없이 공화당은 이를 반격의 기회로 삼아 보수기독교세력 결집에 동기부여합니다. 그 결과 1995년 유타주가 동성결혼 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무려 30여개 주가 이를 따라하게 됩니다. 또한 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연방결혼수호법(DOMA)에 사인함으로써 미국의 혼인평등 운동은 앞으로 한 발짝 내딛으려다 두 발짝 물러나게 됩니다. 또 다시 운동 내부에서는 괜히 법적인 문제로 끌고 나왔다가 되려 후퇴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진보와 후퇴를 거듭하는 싸움은 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2003년 소도미법이 연방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받아 86년의 충격적인 패배를 뒤집게 되고, 같은 해 메사추세츠 주가 최초로 동성결혼을 법제화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인 2004년 미국의 13개 주가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주 헌법을 통과시키는 역풍이 불었습니다. 

 


 

마침내 이뤄내다

 

 

 

 


 

그러나 혼인평등에 대한 법적 저지 시도와 무관하게 동성결혼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는 지속적으로 상승했습니다. 동성애자를 안다고 하는 미국인은 1985년 25%였던 것이 2004년에는 65%로 상승했습니다. 1990년 75%의 미국인이 동성애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했으며 29%가 동성애자들의 입양을 찬성하고, 단지 10%~20%만이 동성결혼을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동성결혼에 대한 찬성여론이 반대의견을 넘어서게 됩니다.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주 법원들의 동성혼 인정이 날로 늘어났으며 결국 2015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동성혼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비록 당사자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싸움이었겠지만 미국에서 반복된 혼인평등 운동의 진보와 후퇴 양상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흥미를 자아냅니다. 미국의 사례는 우리가 운동을 함에 있어서 잠깐의 승리나 패배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때로는 속도감 있게 때로는 숨을 고르고 전열을 가다듬기도 하면서 지속적이고 전략적인 싸움을 장기적으로 가져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 같았습니다.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 운동은 시작된 지 불과 20여년 만에 폭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권의제 중에서 이렇게 한 국가 대중의 의견이 빠른 시일에 바뀐 적이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인데요. 미국을 포함해서 이렇게 동성결혼 시행중이거나 시행될 예정인 국가는 전세계에 21개나 됩니다. 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시민 결합이나 등록 파트너쉽 제도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여기는 태도에 맞서야 하는 한국의 운동상황에서는 이러한 국가들이 그저 부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더불어 대체 저런 나라들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류민희 변호사는 어떤 조건 하에 이러한 동성 간 제도적 결합이 가능해졌는지에 대한 지표들도 소개했습니다. 우선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진보적인 성향의 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에 동성혼이나 파트너쉽 인정이 도입됐고, 게이 비지니스 산업의 크기(커뮤니티 인프라)가 어느정도 규모를 갖추었는가, 선출직 공무원에 LGBT가 얼마나 있는지 여부 또한 관련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혼인평등

 

 

김조광수 김승환 부부의 동성혼 소송 심문기일 기자회견

 

 

그렇다면 우리의 혼인평등 운동의 역사는 어떨까요? 한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이니 미국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1990년대에 커뮤니티 내에서 일부 혼인예식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법적인 사건은 2004년 이ㅇㅇ, 박ㅇㅇ 커플이 공개결혼식 후 은평구청에 혼인신고를 했으나 불수리 처분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같은 해 퀴어문화축제에서는 ‘한국에서 동성결혼은 가능한가’ 토론회가 열렸으며 인천지법에서는 재산분할과 위자료 문제로 사실혼을 인정해달라는 레즈비언의 소송에 대해 동성간에는 사실혼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동성 배우자는 오랜 시간 함께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되었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성결혼 운동이 단지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고 보호해준다는 로맨틱한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취약 배우자를 보호하는 기능으로서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 사람간의 사적 계약을 공적화해서 계약이 불이행이 되었을 때 위자료나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죠.


2004년과 2006년에도 한차례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2007년에는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의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새로운 길찾기’ 워크샵도 진행되었죠. 혼인평등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연대체인 ‘성소수자 가족구성권을 위한 네트워크’는 2013년 김조광수 김승환 부부의 공개결혼식이 있던 해에 탄생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혼인평등과 '나'


다른 나라 혼인평등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며 앞으로 우리 혼인평등 운동의 전제조건에 대해서 류민희 변호사는 단지 결혼에 대한 대리욕구가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열망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사회적으로 동성커플의 가시성도 높아져야 합니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기획/발주하고 성적지향·성별정체성법정책연구회가 연구를 수행한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이슈에 차별금지법이 53%로 1위, 동성결혼은 45%로 2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동성결혼을 중요한 정책적 이슈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것을 얻어내겠다는 의지는 다소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혼인평등 운동은 동성결혼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것을 단지 결혼제도에 대한 개인적 호오의 문제로 국한해선 안 될 것입니다. 동성혼 문제는 평등한 시민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커뮤니티 내부에서 목소리를 모아내는 작업은 우리에게 어떠한 권리들이 배제되어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지를 파악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차별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들이 차별임을 서사화할 수도 있습니다. 혼인평등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학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성소수자 유권자의 정치세력화를 꾀하고 정당과의 연대협력도 넓혀야 합니다. 


사실 저도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한 후에 한동안은 결혼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주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미국의 1950~60년대의 성소수자들 대부분이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결혼은 더욱 상상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꿈꾸던 연애의 모습은 부모님 세대와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항상 좋고 행복할 수만은 없지만 공적으로 인정되는 계약 안에서 ‘미운정 고운정’으로나마 평생의 동반자로 살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이러한 저의 연애관은 나이가 어릴 때 보다는 점점 시간이 지나고 노후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일이 늘어날수록 필요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결혼 또는 그와 비슷한 공적인 제도 안에서 묶이고자 하는 바람을 마음속에 지녀왔던 것입니다. 물론 저와 전혀 다른 연애관을 가진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냐며 비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저에게 동성애자로 살면서 실질적으로 혼인평등을 이룩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열망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문턱에 발걸음을 내딛고 나서야 겨우 이 의제를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수준의 사고를 가지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번 강연은 저의 생각이 그것보다도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강연자인 류민희 변호사도 이 의제가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모두의 이야기


동성결혼의 법제화를 보고 자란 10~20대의 생각은 그 이전을 살아온 세대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한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뒤, 이제 그 1세대들은 은퇴와 함께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고 그들에게 혼인평등 의제는 더욱 가깝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혼인평등은 단순히 결혼제도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한번 상기해봅니다. 혼인평등이라는 의제가 10~20대에 동성결혼 법제화를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 노후를 앞둔 사람들, 결혼제도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성소수자 운동이 혼인평등이나 가족구성권을 주장할 때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들이 이 문제를 동성애 반대 프레임과 끊임없이 결부 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동성결혼이 불가한 것인 만큼이나 곧 동성애도 불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년 무지개 깃발을 펄럭이며 퍼레이드 행진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함께 노래하며 국제 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DAHOTI)를 기념합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차별의 부당함에 대해 외칩니다. 수많은 차별들 중에서 법적인 차별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언제까지 법적인 차별의 철폐가 인식이나 감정적 차별을 걷어내는 것보다 후순위가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성소수자 차별의 장막은 ‘언제가는 되겠지’ 하는 생각만으로는 걷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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