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따위는 없었다.
박찬욱은 떼레즈 라깡의 원작자 에밀졸라를 뛰어넘는 이 기괴하고 끔찍한 동시에 매우 우아하고 매혹적인 B급 영화 속에서 인생 본연의 목마름(thirst)을 표현해 냈다.
이 영화가 갖는 복잡하고 어려운, 그래서 허무하기까지 한 스토리라인은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의 원작을 살짝 빌려와 인간의 감정과 욕망, 정체성, 섹슈얼리티, 믿음, 사회적인 계급과 종교 등을 마구 뒤섞여 놓아 보는 이들의 시각이나 관점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뉘게 만든다.
영화는 보는 내내 관객에게 물컹하고 비균질한 정액을 마시는 불편함마저 끊임없이 제공한다. 대속과 부활, 영생을 말하는 종교영화인 듯 하다가, 피가 낭자하게 흐드러지는 B급 호러무비 인듯하다가, 순간순간 파고드는 블랙 코미디 앞에서 관객은 어리둥절해 진다.
성소수자로 막 나가는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이 복잡 미묘한 영화에 압도된 것은 인간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인 존재로서 진화하며 배제하고 억누른 욕망을 뱀파이어라는 정상성에서 한참 벗어난 소재로 풀어간 내용과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떼레즈 라깡에서 이름마저 빌려온 박쥐의 떼레즈 ‘태주’ 김옥빈이 있다.
나는 그녀를 여고괴담 개봉 바로 전날 스텝들만을 위한 자리인 이름도 거창한 ‘기술시사회’에서 조감독과 아는 인연으로 바로 코앞에서 대면했던 적이 있었다. 넘치도록 차려입고 완벽한 화장을 한 조연들 사이로 촌빨을 휘날리며 청바지를 입고 서있던 한 소녀의 아슬아슬하고 불길한 눈동자에 깜짝 놀랐던 기억은 나를 태주에게 깊이 빠져 들게 만들었고 현상현의 고통과 아픔보다 태주에게로 나의 모든 감각은 쏠려 버렸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버리지 못해 신부 상현을 유혹하고 흡혈귀가 되고 만 그녀야 말로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망으로 결국은 게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나와 꼭 닮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현과 태주는 흡혈귀가 되어 스스로의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점차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상현은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괴로워하며 산사람의 피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야말로 궁색하기 짝이 없는 호스로 피를 구걸한다. 급기야 신 앞에 죄를 짓고 욕망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바지를 벗고 한 여자를 겁탈하는 모습을 신도들에게 보이기까지 하며 흡혈귀가 되어버린 죄의식사이에서 갈팡질팡 힘들어한다.
이에 반해 상현에 의해 뒤늦게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흡혈귀로서의 자신 모습을 만끽한다. 결국 그녀를 불안 해 하던 상현은 나한테는 너뿐이라던 연인 태주와 햇빛에 스스로를 태우는 단죄로 끝을 맺는다. 앞과 뒤로 읽어도 같은 발음을 내는 ‘현상현’이란 매우 우회적인 이름은 결국 삶속에서 선과 악, 구원과 단죄, 자살과 순교, 윤리와 죄의식은 하나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현에 비해 자신의 정체성을 즐기며 기뻐하는 태주는 더욱 기괴하고 사악하게 보여 진다. 팜므파탈의 전형을 보여주며 신부를 유혹했던 태주는 자신의 흡혈귀 정체성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오히려 더 적극적인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내가 사람 안 죽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알아?' 라며 우스꽝스럽게 고무호스를 쪽쪽 빨아대는 상현의 부조리한 딜레마 앞에서 그녀는 살아있는 피를 향해 욕망과 열정을 불태운다.
나여사의 억압과 착취, 남편 강우의 운명 같은 굴레를 벗어던지고 도덕적 금욕을 상징하는 신부와 정사를 벌이는 그녀의 모습은 내게 눈물겹도록 처절한 아름다움을 주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감독은 이 영화의 결말을 상현과 태주와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
죄의식 깊은 곳에서의 욕망을 끝내 단죄하며 고루하고 싱겁기 짝이 없는 결말이야 말로 이 영화를 관객 모두가 끌어안기 힘들게 만든 가장 뼈아픈 실수인지 모른다. 감독은 정상성을 벗어난 뱀파이어를 소재로 택했지만 욕망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지겹도록 되풀이 되는 계몽적인 잣대는 벗어나지 못했다.
상현의 죽음은 ‘구원’을 위해 신부가 된 그가 뱀파이어로서 타인의 피를 ‘구걸’하며 욕망을 채우는 현실 앞에 그 개인으로서의 순교의 의미를 갖을지는 모르지만, 그가 껴안고 같이 죽음을 맞이한 자신에게 더없이 솔직했던 태주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흡혈귀가 된 자신들의 정체성과 부조리한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죽음으로 귀결시킨 결말은 그의 대표작 올드보이를 뛰어넘지 못한 채 이 영화를 그저 수작으로 남긴 안타까움이 되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죽음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풀어가는 용기…… 뱀파이어가 되고 난 후의 정체성과 도덕과 윤리문제를 앞에 두고 비겁하게 죽음을 택하는 상현과 달리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태주의 모습은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웠고 마지막까지 솔직했다.
돌아서지 않고 맞서서 싸우는 용기야 말로 우리들 성소수자 모두에게 필요한 과제 같은 모습인지 모른다.
삶은 목마름의 연속이다.
목마름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머리 아픈 의문만을 남긴 채 영화는 맥없이 끝이 났다.
욕망을 향해 몽유병 환자처럼 내 달려온 태주의 발에는 커다란 상현의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들 위로 태주의 대사만이 공허하게 오버랩 되었다.
‘나는 부끄럼타는 사람이 아니에요……’
욕망은 사라지고 사랑은 남았다. 아쉬운 결말에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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