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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태성의 Melancholy

봄날은 간다

by 행성인 2008. 9. 29.

동인련 웹진 "너, 나, 우리 '랑'" 9월호


서른은 이렇게 살수도..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나이라고 어느 시인이 그랬다. 그렇게 끔찍한 서른을 맞고도, 거기서 여덟 해가 내게서 지나갔다.


스물 몇 살이 되던 해, 소위 데뷔(?)를 한 셈이니 내가 게이로 살아온 시간도 얼핏 십여 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정체성의 혼란을 고민하다 서른 몇 알의 수면제를 집어 삼키고 응급실에서 눈을 떴던 열일곱 살 이후부터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의 시간은 몹시 힘들었던 기억들로 떠올려진다.


이성애자로서 살아가기를 끊임없이 강요하는 세상에서 나는 용케 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맘을 열어 게이로 살아남았다.

나는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받았던 수많은 상처와 일반이 되지 못해 나를 허비한 시간들이 억울했고 이 사회가 가지는 거대한 호모포비아속 거짓된 진실이 궁금했다.

여러 서적을 뒤적이고 단체들을 기웃거리며 이 사회에서 억압과 차별이 다양한 소수자들에게 수많은 폭력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행동으로 옮기려 노력하며 게이로서의 십여 년을 보내왔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게이로 서른을 넘긴 내가 현재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차별은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동인련에는 정말이지 귀여운 십대와 막 이십대가 된, 보기만 해도 지나간 시절이 생각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예쁜 친구들이 있다.


어쩌다 예뻐서 쓰다듬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다. 아빠뻘이라는 둥, 그건 죄악이라는 둥, 주책바가지라는 둥... 물론 모두 지나가는 우스개 소리 라는 걸 알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면 은근히 어쩌다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이제 나이를 먹은 사람끼리 어울리는 곳을 가야하는 건 아닌지 혹은 분위기를 봐서 자리를 가려가며 참석해야 하는지 사뭇 진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화려한 이태원의 Bar와 댄스클럽, 일반과 이반들이 뒤섞여 있는 홍대의 모든 클럽들 그리고 잘나가는 종로의 게이 바에는 모두 이십대 그리고 삼십대 초중반의 연령대가 주를 이룬다.


사십대와 오십, 그리고 육십 대의 게이들이 찾는 술집은 여지없이 작고 초라한,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공간들은 그들의 욕망이 가져오는 누추함과 추악함 그리고 불쾌한 시선들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나이든 게이들을 가두고 소외시킨다.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사회에서 그것은 나이든 게이의 일반적인 모습일지 모른다.


이 사회에서 생산 가능한 노동의 주체가 젊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이름인 것과 마찬가지로 열정과 매력, 아름다움은 당연히 젊은 게이들의 것이 되고 만다.

소비되고 팔리기를 원하는 게이들의 한껏 치장한 멋도 젊은 게이들의 전유물이다. 어쩌다 나이 지긋한 게이가 감히(?) 팔리려고 꽃남방이라도 입고 나타난다면, 그 나이에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과 추함, 뻔뻔함으로 점철된 존재로서 한낱 구경거리가 되어 흘깃거리는 시선과 입방아에 여지없이 노출되게 될 것이 뻔하다.


자본주의 안에서 이성애자 남자는 멋지게 나이를 ‘먹어가지만’ 상대적인 약자인 여성들과 게이는 추하게 ‘늙어간다.’


요즈음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면 몹시도 낯선 얼굴과 마주한다.

끊임없이 일반적인 삶을 강요하던 사회와 맞장을 뜨며 게이로 살아온 십여 년의 세월이 흐린 프랑스 영화처럼 스쳐지나간다. 모든 것이 너무 힘들었던 이십대에는 서른이 오면, 그리고 더 나이를 먹으면 조금은 숨을 쉴 수 있는 여유와 작은 행복이 오기를 막연히 바라고 기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더없이 가난하고 지극히 불안했던 이십대 시절이 더 행복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건 아마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가장 빛나는, 그리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20대라는 사실과 맞닿는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게이로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 확실히 슬픈 일이다.

게이로 살아가려 마음을 먹는 순간, 우리들은 가족과 혈연 그리고 그동안 쌓아왔던 이성애자 지인들과 당연히 멀어진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의 사람들만으로 관계가 국한되어 지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커뮤니티 내에서의 차별은 사회에서의 것보다 몇 배 아프고 강하다.

대부분의 동성애 문화가 이성애자를 모방하고 답습하듯이 나이듦에 대한 커뮤니티 안에서의 시선과 분위기 역시 이 사회와 닮아 있다. 여성스런 게이를 폄하하거나 흑인 혹은 동남아시아 게이들에 대한 차별, 트렌스젠더들을 오까마 운운하며 따돌리는 분위기 역시 여성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연령주의(ageism)에 따른 나이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도 어김없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돈 없이 늙어가는 게이의 노후란 수백의 야쿠자들 속으로 혈혈단신 뛰어 들어가는 킬빌의 우마서먼 보다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 되었다.

돈 없는 게이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나마 가장 우아한(?) 장소인 게이Bar에서 술 한번 맘 놓고 먹기 어렵다. 싸구려 사우나와 삼류 극장에 게이 노인들이 득실대는 이유는 그들이 성적으로 더 문란하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가지는 노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돈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양주를 무기처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도 아무런 말도 걸어주지 않는 썰렁한 술자리를 망부석처럼 지키고 앉아 있는 중년의 게이들을 종로에서 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욕망과 열정 그리고 삶을 영위하는 즐거움은 이미 그들에게서 끝나고 사라졌어야 하는 젊은 날의 ‘치기’ 정도로 간주 된다.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도 되는 현실에 둔감하고 그것을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설상가상으로 모아놓은 돈도 전무한 내가 달랑 하나 뿐인 의료보험조차 불안한 요즘 세태를 보면서 느끼는 불안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내 영혼을 잠식한다.


특정한 나이에 맞는 정상성과 위치, 어울리는 상황을 강요하는 전쟁터 같은 한국 사회에서 보면 나는 100% 패배자이고 주류가 되지 못한 낙오자다.

적어도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서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지내기를 바라는 내 바람은 공허하기만 한 것일까?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받는 소외와 상처는 분명 폭력이고 차별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이듦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사라져야 하며, 나이에 대한 정당하고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져 한다. 그 개개인의 현재의 삶 자체로 존엄성을 인정받고 사회로부터 적절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이라는 것에 임의적인 구별과 제도의 산물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들 커뮤니티 내에서의 분위기와 모습도 앞으로 많이 달라져야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빨리 늙어 가고 있는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게이들이 이제는 한번쯤 깊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자 풀어야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소원하고 소원한 머나먼 이야기인줄 만 알았던 이십대 때가 내게도 있었듯이 그때의 나를 닮은 십대, 이십대의 아이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모든 것에 구애 받지 않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Jacques Brel의 ‘Ne me quitte pas’를 들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는 와인 같은 친구 하나가 오늘은 몹시 그립다.

이제 그만 여름 같기만 한 가을이 흐드러지게 깊어졌으면 좋겠다...



태성 _ 동성애자인권연대 걸음[거: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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