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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가족

성소수자는 독립의 꿈을 꾸는가

by 행성인 2016. 5. 8.
재연(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성소수자, 비성소수자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독립을 한 번쯤 생각해 본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집, 나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은 사실 많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는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모두—만나 인터뷰를 해 보았는데 그들 모두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독립을 하고 싶다는 이유도 성소수자 여부에 상관없이 비슷했다. 그런데 유독 성소수자에게 많이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왜 성소수자는 독립을 고민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정체성 문제가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독립을 꿈꾸게 만들었을까?

 

 


우리는 모두 영화배우?
“인터넷에 ‘예쁜 여자 배우’라고 검색을 했다. 가장 먼저 나온 사진이 이나영 사진이었다. 그 이후로 누군가 나한테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이나영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이나영이 아닌 이종석을 제일 좋아했다.”

 

성소수자에게 커밍아웃이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는 보통 커밍아웃을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자신’으로 온전히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이후에 찾아올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두려움은 누구에게 커밍아웃을 하든 상관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가족에게 하는 커밍아웃의 경우 그 무게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 독립하지 못한 성소수자에게 더 그러한데, 완전히 자립하기 전까지는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소수자 중에는 친구들에게는 많이 커밍아웃을 했어도 가족에게는 하지 않은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커밍아웃 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소수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전략은 ‘시스젠더 이성애자’ 연기를 하는 것이다. 특히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많은 성소수자들은 이런 식으로 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다. 인터뷰에 응한 한 성소수자는 이렇게 말했다.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하고 있지만 부모님에게는 여성 단체에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여성 단체에서는 이런 젠더 문제도 다 얘기한다고, 이런 일들을 모르는 부모님이 뒤쳐진 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의 실제 정체성을, 자신이 원래는 어떠한 사람인지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 위한 연기를 하게 된다. 스스로를 속이고 연기 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성소수자에게 여전히 차별적인 한국 사회에서 가족에게 커밍아웃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를 안정적으로 받기 위해 성소수자는 연기를 해야 한다. 연기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터뷰를 한 성소수자들이 독립 하고 싶은 이유로 ‘사생활’을 가장 많이 말한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물론 성소수자만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생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성소수자도 그런 사생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생활이 노출되었을 때 겪어야 하는 후폭풍의 무게는 크게 다르다. 인터뷰를 한 어떤 성소수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모님에게 보이기 꺼림칙한 것들을 집에서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야동을 보는 것이 그렇다. 당연히 성소수자나 비성소수자나 야동 보는 것은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비성소수자가 야동을 보다 들키면 쪽팔림과 “그런 거 봤냐!”는 말 외에는 크게 감당해야할 일이 없는 반면, 성소수자가 ‘이쪽 야동’을 보다가 들키면 바로 아웃팅을 당하게 된다.” 성소수자가 말하는 사생활은 단순히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거나 밤에 자려고 할 때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으면 하는 정도의 사생활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 연기를 할 필요가 없는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성소수자가 보장받고 싶은 사생활이란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많은 성소수자들이 독립을 꿈꾼다. 더 나아가 실제로 도전해보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그렇게 독립에 성공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면 축하할 일이지만,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기게 된다. 애초에 왜 성소수자들은 연기를 해야 하는가? 왜 연기를 해야‘만’ 하는가?

 

 


내 아들이 성소수자일리가 없어!
“보통의 한국 부모는 자기 자식이 절대로 ‘그런 사람’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기 자식이 아닌 것처럼.”

 

성소수자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다보면 항상 들어오는 질문이 있다. 바로 “당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도 정말 상관하지 않을 건가요?”라는 질문이다. 이는 결국 당신도 자식이 성소수자라면 싫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시스젠더 이성애자 자식이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슬프게도 저런 질문들이 보여주듯 나의 자식이 성소수자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부모는 우리 사회에 별로 없다. 사실 “나의 자식은 시스젠더 이성애자다”는 생각은 너무 ‘당연’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지 조차 하지 않는다. 애초에 자식이 성소수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모는 당연히 시스젠더 이성애자 자식에게 ‘맞는’ 육아를 할 것이고, 그러한 교육을 시킬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남자인 아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남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받을 것이고, 남자 옷을 받고 남자 화장실과 남자 목욕탕에 가도록 얘기를 들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여자인 아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육아와 교육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방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게 된다. 스스로 느끼기에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고 해도, 겉보기에 남자인 자신에게 주어지는 육아와 교육은 그가 ‘남자처럼' 행동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가 사실 여자라도 남자처럼 행동하도록, 그가 사실 동성을 좋아해도 이성을 좋아하도록 말이다.

 

결국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과 자신에게 주어지는 요구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은 자식에게 소외감, 자존감 저하,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부적절감 등을 주게 된다. 설사 이러한 부정적 정서를 이겨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더라도 자신을 당연히 시스젠더 이성애자로 여기는 가족으로부터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완전히 자립할 수 있기 전까지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보호를 잃지 않기 위해 연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성소수자가 인터뷰 중 “집으로 들어갈 때 내가 잠시 내 몸에서 빠져나왔다가 집에서 나오면 다시 내 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마음일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감정은 좋지 않은 의미에서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성소수자라서 ‘평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마치 비장애인은 ‘정상이고 평범’하고 장애인은 ‘비정상이고 특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성소수자도 비성소수자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다. 이들을 평범하지 않도록 만든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자신의 자식이 당연히 시스젠더 이성애자일 것이라는 생각과 그 생각에서 비롯된 가정환경이 그들을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가정하는 가정 벗어나기
“집에서 독립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부인’으로 느껴지는 장소에서 독립하고 싶다.”

 

성소수자가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서’ 독립을 원한다는 것은 굉장히 슬프고 불공평한 일이다. 성소수자는 이 사회가 ‘가장 편안함을 느껴야 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말하는 집에서, 가정에서 편안하지 못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위에도 언급한 “집에서 독립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외부인'으로 느껴지는 장소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말은 사실 성소수자들이 독립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독립을 ‘하도록' 강요당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집'을 가지기 위해 ‘집'에서 벗어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터뷰를 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 외에는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 모두 독립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들 부모와의 의견 갈등이 있었고, 언젠가는 독립을 할 마음이 있고, 그 이후에는 자신만의 집을 가지고, 가능하면 좋은 사람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평범하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한 성소수자가 “30대 초반에는 좋은 파트너를 만나 우리의 집에서 티격태격 싸우며 지내고 싶다.”고 한 말이 한 비성소수자가 “나도 나의 아내와 함께 사는 단란한 가정에 대한 로망이 있다. 20대 후반에는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결국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고 누군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박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면 ‘이 사람은 당연히 이럴 것이다’라는 가정을 벗어나야 한다. 누구의 자식이라도 비성소수자일 수 있는 것처럼, 누구의 자식이라도 성소수자일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 간단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기존의 당연한 가정을 멈추면 그 가정은 비성소수자 뿐 아니라 성소수자도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더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어느덧 모두에게 스며들어, 더 이상 의식적인 생각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도 ‘당연한 것’이 될 때 성소수자가 독립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아닌, 독립을 ‘하는’ 사회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