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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소수자 감수성의 미적 실험: 오인환 개인전 ‘TRAnS’

by 행성인 2009. 8. 7.

 

1. 시작에 앞서 질문, ‘우리나라에 성소수자 미술가는 누가 있을까?’

  한때 미술을 공부했던 나에겐 누군가를 만나 말을 트게 되면 그들로부터 피할 수 없었던 질문이 하나 있어왔다. 
  ‘한국에 성소수자 미술가는 누가 있나요?’ 
  이 때문에 나는 학교 모임에 나갈 때나 애인이랑 미술관엘 갈 때, 심지어 번개자리에서 대화가 필요할 때 까지도 항시 한국의 성소수자 미술가를 머릿속에 한두 명쯤은 새겨둬야 했다. 그런데 누가 있지? 
  누구나 한번쯤은 미술종사자 중에 성소수자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가져봤을 것이다. 이유인 즉, 창작을 하는 분야이니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섬세하고 독특한 감수성과 아이디어를 가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미술계보다 좀 더 대중적인 디자인 분야로 판타지 비중이 옮겨간 것 같기도 하다. 이유에도 조금 변화가 있다.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스타일리스트나 디자이너들 중에 ‘끼순이’들이 많더라는 것.  
  하지만 한국에서 디자인이나 미술 분야 모두 실상 찾아보면 오픈리-게이(openly-gay) 미술가, 소위 커밍아웃한 이쪽 작가는 많지 않다.[각주:1] 설령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작가가 무슨 작업을 하는지에 관해 물어보면, 대답하는 입장에서 참 서먹해진다.


그래서, 이쪽 작가가 있으면 어쩔 건데?

  성소수자 작가를 대할 때 마다 매번 겪는 고충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작업이 갖는 의미를 항상 작가의 성정체성 관점에서 읽고자 한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 소재이자 모티브로 작용하겠지만, 꼬리표처럼 정체성의 틀에서만 해석하게 된다는 우려도 항시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열린 자세로 접근하는 정체성 관점의 작품해석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성소수자들이 공유하는 감수성의 새로운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새로운 실천들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2. 그리고 오인환

  이런 맥락에서, ‘커밍아웃 작가’ 오인환의 작업을 되새겨본다. 오인환은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오픈리-게이 미술가이다. 그에게 ‘게이 미술가’ 라는 호칭은 단순히 자기선전의 도구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업으로 구성하며, 그러한 고민은 정체성을 넘어 사회전반에 개입하고 가시화하는 작업으로 확대된다. 작품들 각각에는 자신의 정체성이 작업의 소재로 등장하는 예들이 많이 발견된다. 
  더불어 서구의 게이 아이콘을 차용하지 않는 그의 작업은 회화나 조각 등 전통적인 방식보다 설치 또는 프로젝트 형식으로 제작됨으로써, 전시가 이뤄지는 장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지형에 밀착한다.[각주:2]
  여기에 그의 이전 작들을 소개해 본다. 2001년의 작업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은 전시회가 열리는 도시에 산재하는 게이바/클럽의 이름들을 전시장 바닥에 향가루로 적어놓은 작품이다.


 

                                     오인환,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 서울>, 향가루, 450×400, 2001




  전시의 시작과 동시에 향가루로 적혀진 글자들에 불을 붙이면, 전시기간동안 글자는 천천히 타들어간다. 우리의 부질없는 욕망처럼, 전시의 끝에는 재만 남겨지고 전시장에는 그들의 이름을 수놓았던 향을 피운 연기와 냄새가 허공을 채우며 관객의 폐부로 스며든다. 타들어가는 게이바의 이름은, 흡사 후미진 골목길 위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젊음을 태우고 명멸해간 이들에 대한 애도의 의식처럼 전시장을 향냄새로 가득 채운다.   
  2001년의 작업이 동성애 감수성의 멜랑콜릭한 면모를 보여준다면, 이듬해 개인전에서 선보인 <나의 아름다운 빨래방 사루비아>[각주:3] 에서는 관객의 참여와 행위를 유도함으로써 작품과 현실의 동성애적 공간을 고찰할 수 있도록 한다. 
  전시장 내부에는 빨래방의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 ‘성인 남성 전용’이라는 지시사항에 따라 남성 관객이 들어가게 되면, 작가가 남성관객의 옷을 빨아준다.

 

                                            오인환, <나의 아름다운 빨래방 사루비아>, 360×360×220, 2002.


 


  일단 빨래방에 들어간 남성은 작가의 ‘서비스’가 끝날 때 까지 빨래방 안에서 기다려야 하며,(대개는 한 시간에서 세 시간 남짓 까지 걸린다고 한다.) ‘작업’ 도중에는 빨래방의 공간이 차단된다. 그가 빨아주는 것이 관객의 옷뿐인지, 정말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바깥에 있는 관객들의 상상에 맡겨질 뿐이다. 
  빨래방이라는 공적 공간은 옷을 벗는 사적 행위와 교차한다. 여기에 ‘빨아주는 서비스’는 공적이면서도 지극히 사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공적 공간의 사적 공간화, 그것은 썰렁한 악기골목이 주말 저녁이면 온갖 시선과 유혹으로 즐비한 욕망의 ‘길싸롱’으로 변신하는 종로의 풍경과 어렵지 않게 겹쳐진다. 더불어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남성들 간의 관계를 상상하는 관객의 입장은 게토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비유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작가는 자신이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는 한국의 공간을 관찰하며 느끼는 감수성을 자신의 기지를 발휘해 작업에 표현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은 동시대 동성애자 공간의 초상이기도 하다. 위의 두 작업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다소 폐쇄적이며 우울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10여 년 전 한국의 게토공간과 성소수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환기해보면 위의 작업들이 그렇게 이상하고 낯설지만도 않을 것이다.



3. 2009 개인전 TRAnS

  앞서 소개한 이전의 작품들을 최근의 작업들로 연결시켜보자. 얼마 전 막을 내린 'TRAnS' 전은 ‘빨래방’ 프로젝트 이후 7년 만에 열린 그의 개인전이다.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의 작업들은 이전처럼 성소수자로서 살고 있는 사회를 자신의 감수성으로 반영하거나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회풍경에 개입하고 있다. 
  특히 그의 최근작들에는 소수자적 감수성이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투영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작품들이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품의 컨셉에 성소수자 문화에서 발견되는 특징들을 적절하게 적용해볼 수 있다. 
  다양한 감상과 해석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사회적 금기로서 주변화 되는 소수자들이 사회에 개입하고, 새로운 공동체 구축을 시도한다는 실천적인 방향으로 전시의 흐름을 짚어보았다. 그의 미적 실험에 우리 자신들을 비춰보면서, 우리들 모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다양한 실천방향을 모색해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감춘 채 드러내기

  우리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이름은 자신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자기를 증명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이름은 주변과 관계를 맺고 사회에 소속되기 위해 우리를 항상 따라다닌다. 하지만 간혹, 이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숨겨야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이름을 잃게 되는 상황들을 쉽게 경험한다. 매순간 ‘동성애자’, 라는 이름을 숨겨야 하는 동성애자 당사자들이 결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작가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자신의 지인들과 이반파티를 벌여왔다고 한다. 파티를 준비하면서 그는 매년 포스터를 제작하는데, 그 포스터는 항상 참가자들의 서명을 중첩시켜 알아볼 수 없도록 해놓고, 참가자의 이름을 가려놓는다. 파티는 열렸지만 참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오인환, <이름 프로젝트: 이반파티>, 2006.


 

  술집과 클럽, 바가 많아지고, 커뮤니티 내부에서 다양한 취향과 성격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들켜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 표면적으로 오늘의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관용적으로 수용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커밍아웃의 요구에는 여전히 망설일 수밖에 없다.
  익명성은 단순히 사회의 금기 때문에 숨겨야 하는 현상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사용자와 물건, 사람과 사람이 혈연, 지연 등의 관계처럼 직접적으로 밀착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당사자의 눈 밖에 벗어나면 쉽게 의미를 잃고 이름을 망각하게 된다. 숨겨야만 하는 익명성의 요구 이면에는 주변문화로서, 버려진 물건으로서 사회와 구성원들의 외부로 밀려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유실물보관소’로 만들었다. 그 당시 ‘유실물보관소’는 직원들이 분실물을 습득하면, 보관소로 가져와 사진을 찍어 남겨두고, 분실물을 보관하면서 주인이 찾아가게 되면 그 또한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작업이었다. 이제 주인을 찾지 못한 유실물들이 7년이 지나서야 우리 앞에 빛을 보게 되었다.


                     좌) 오인환, <유실물보관소>, 광주, 2002.         우) 오인환, <유실물보관소>, 아트선재, 2009.


 

  유실물에는 고정된 주인이 없다. 여전히 유실물 보관소에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으니, 작가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잃어버린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 어려운 물건들은 익명의 공간에 던져져 있다. 
  이들은 백화점 진열대처럼 꽃단장 하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지 않는다. 진열된 방식은 같지만, 유실물보관소의 물건들은 한번쯤 이름을 잃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자신의 쓰임을 망각한 채 방치되어 침묵하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회에서 이름을 잃거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만 남게 되면, 당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7년이 지난 지금, 이제 의미를 잃고 낡아버린 유실물들은 선반에 잘 정돈되어 전시되어 있다. 익명의 동성애자, 의미 잃은 물건들이 작가의 소수자적 감수성에 여과되어 애착의 대상으로 자리매김 한 것일까. 익명의 물건, 이름 없이 존재해온 것들을 소중히 기념비화 하는 작업- 이제 이름 없는 존재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관객에게 전도된다.


소수자적 감수성의 개입

  아웃팅의 위협에 익숙해져 이제는 자기만의 처신방법들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익명성을 강조한 포스터는 조금 식상하게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매순간 외부로부터 개인의 익명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공동체를 시각화한 작가의 허심탄회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기서 강조된 ‘익명성’, 동성애에 따라붙는 이 만고불변의 고루한 코드는 한때도 떠나있는 법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의 휘황한 ‘끼’와 찬란한 ‘기갈’은 종로와 이태원, 홍대 등지에만 꽁꽁 숨겨놓을 수 없음을. 우리들 자신은 사회로부터 방치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픈 감수성만을 유발케 하는 한갓 유실물 같은 존재가 절대로 될 수 없음을. 자기 정체성을 감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들의 끼와 기갈은 이제 세상의 질서와 가치체계들의 빈틈을 파고들 수 있는 능력을 발산한다.
  작가에게 발산되는 ‘끼’의 영향은 <태극기 그리고 나>에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피해가지 않는다.



                                                 오인환, <태극기 그리고 나>, 사운드/비디오 설치, 2009.




  세 화면으로 나눠져 재생되는 국기게양대의 영상은 한국에서 가장 큰 국기게양대를 마주하며 예의를 갖추듯 캠코더를 들고 만세자세를 취하며 촬영되었다고 전한다. 영광스럽지만 심히 ‘불편한’ 자세 때문에 촬영자의 상태는 점점 말이 아니게 힘들어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화면은 고통으로 다소 과장되게 높아지는 신음소리와 함께 흔들리면서 조금씩 ‘음탕한 태극기’로 거듭난다.
  작가의 개입은 시각적 상징물을 넘어 청각적 영역으로 확장된다. ‘진짜사나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군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불려진다.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남성주의를 반영하는 군가 ‘진짜사나이’는 이제 여느 클럽에 가져다 놔도 손색이 없을 트랜스 음악으로 거듭난다.



                                                오인환, <진짜 사나이>, 사운드/비디오 설치, 2009.



  화면에는 ‘가나다’ 순으로 가사들이 재배열되어 있다. ‘진짜 사나이’ 1절이 흘러나오면서 가사조각들은 한 글자씩 화면에 뜨게 된다. 조금씩 순서에 변형이 오면서 화면 곳곳에 가사가 뜨고, 2절과 3절이 계속되면서 점층적으로 가사들이 중첩되어 화면에 등장한다. 이윽고 가사들의 중복이 가속화되며 멜로디가 분해 되고 새로운 음들이 결합한다. 최종적으로 가사전달이 불가능해지며 글자들은 현란한 리듬과 일체가 되어 우리에게 전체적인 화면으로 다가온다.
  군가가 트랜스 음악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끼와 기갈의 발산이다. 노래가사와 멜로디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작되고 변하는 것처럼,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소외된 성소수자들에게 이성애적으로 규범화된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은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적 취향 또는 성적 지향’으로 거듭난다. 기존 음악의 변화폭만큼이나 이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성적 규범은 이제 다양한 모델들의 생성으로 열리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입과 의미변화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는 다른 나라 국기가 되지 않으며, 새로운 음악 또한 기존의 음악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지 못한다. 게이 커뮤니티 또한 마찬가지로 이성애적 규범의 상흔을 지니고 있다. 예를 하나 들면, ‘X년, Y년’으로 통칭되는 게이들의 화법은 여성 비하적인 이성애중심 체제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냐고 적지 아니하게 비난되어져왔다. 이러한 비난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상흔은 좀 더 긍정적인 해석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곧, 사회에서 비하되는 여성처럼 그 역시 비하되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소외된 위상까지도 유쾌한 자긍심으로 전환하는 ‘기갈스러움’을 발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헤쳐모여

  그는 일반화를 규정하고 강요하는 사회모델에 개입하여 반복과 비틀기를 시도한다. 이를 ‘해체의 작업’이라고 한다면, 한편에서는 다양한 개인들이 서로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지점을 모색한다. 이른바 ‘재구성의 작업’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새롭게 구성된 공동체는 보편적인 이념과 규범을 지향하기 보다는 다양한 구성원들로 구성됨으로써 여러 가지의 변화가능성을 암시한다.
  <우정의 물건> 시리즈에는 서로 다른 두 방의 사진 앞에 똑같은 책과 물병, 삼각대와 사다리 등 생활용품이나 개인 소장품들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나란히 배치된 물건들은 대부분 대량생산된 상품들이다. 대량생산품이라 한다면 으레 부정적인 인상을 갖기 쉽다. 하지만 작가는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일상의 물건이 개개인을 하나로 엮는 매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좌) 오인환, <우정의 물건- ML/IO>, 2008.       우) 오인환, <우정의 물건- MK/IO>, 2000.




  <우정의 물건>이 갖는 의미처럼, 이 땅의 성소수자들 또한 같은 장소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의 만남과 대화들로 정체성을 공유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우리는 게시판 놀이를 하고, 채팅 혹은 만남 게시판의 사진과 프로필을 주고받으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만남은 1:1 데이트가 될 수도 있고, 단체 술번개로 이뤄지기도 하며, 종종 원나잇으로 끝나기도 한다. 혹은 동호회나 친목 카페 등을 통해 ‘패밀리’를 만들어 지속적인 만남을 추구하기도 한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같은 공기를 마시듯 우리는 같은 규범 속에서 비슷한 생활양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우정의 물건> 시리즈가 서로가 갖고 있는 공통된 물건들을 통해 연대감의 싹을 발견했다면, 그의 <이름프로젝트: 당신을 찾습니다, 서울>은 익명의 사회에서 ‘이름’을 통해 새로운 만남을 탐색한다.


                                               오인환, <이름 프로젝트: 당신을 찾습니다, 서울>, 2009.



  작가는 무작위로 10개의 이름을 선정하여 트럭 광고판에 이름을 쓰고 저녁마다 시내를 달린다. 길가에 해당이름을 가진 이들이 광고판을 보고 미술관에 찾아오면 신분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은 뒤 서명을 하면 된다. 일련의 과정들은 이후의 작업을 기약하는 열린 구조를 취한다.
  재미있게도 <이름프로젝트: 당신을 찾습니다, 서울>은 앞서 익명성을 부각한 <이름 프로젝트: 이반파티> 포스터를 뒤집어 놓은 형식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이반파티’ 포스터가 자기 정체성을 감추며 ‘이반’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당신을 찾습니다, 서울’은 익명의 사람들이 이름을 찾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나를 숨기기 위해 이름을 지우고, 나를 드러내기 위해 이름을 알려주게 되면서 나는 ‘이름’에 구속된다. 이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체성을 드러냄에 있어 이름은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온라인상에서 그토록 실명거론을 자제하는 것은 성소수자로서의 나를 바깥으로 보이지 않기 위한 의도이듯 말이다.
  하지만 성소수자 ‘X’가 아닌, ‘성소수자’ X로 강조점이 바뀌게 되면 상황은 역전된다. 지난 촛불집회 때, 수십만의 군중들 속에서 수십 수백의 성소수자들이 무지개깃발 아래 모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이름’ 아래 결집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섞이는 거리에서 아웃팅의 공포는 공적인 커밍아웃으로 거듭난다.


4. 나가며

  앞서 이야기했듯 오인환은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면서 체득한 감수성을 작업으로 가시화한다. 2000년도 초반에 보여준 그의 작업들이 멜랑콜릭하고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면, 이번 개인전에 소개된 작업들에서는 보다 유쾌하며 개입의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고,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모색까지를 타진하고 있다. 
  이번 전시기간동안 적잖은 성소수자 친구들에게 그의 작업이 재미있다는 평과 더불어 어렵다는 하소연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현대미술의 생소한 부분도 감상에 난관으로 작용하겠지만, 작업을 마주함에 앞서 ‘게이 미술가’라는 호칭이 의미해석에 고통을 부가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의 지각과 습관들이 너무도 단편적이고 말초적인 ‘이바닥’ 생활에 너무도 익숙해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봐야겠다. 우리는 자신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숨긴다고 숨겨질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끼와 기갈은 더 이상 이성애중심의 사회에서 감춰야 할 치부가 아니며, 독특한 스타일 정도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없이 유쾌한 에너지이며 소중한 무기인 것이다.




웅 _ 동성애자인권연대





  1. 가시적인 효과는 미미했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오픈리-게이 작가들의 작업들은 드물게나마 시도된 바 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오픈리-게이 작가들의 작업은 임근준의 2003년도 논문「시각예술의 역사와 동성애」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그의 논문은 http://crazyseoul.com/gayart/my.htm 에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2. 이러한 작업의 특징들은 지난 2월 웹진 문화읽기: ‘거리에서2- 빛과 어둠’에 소개된 Felix Gonzalez-Torres의 작업과 매우 통하는 부분이 있다. 작가 역시도 인터뷰에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한다. [본문으로]
  3. 작품의 제목은 1985년의 영국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와 서울의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를 결합한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대처정부 시절 영국을 배경으로 파키스탄 이주민 2세 청년과 앵글로 계열의 영국인 사이의 우정이 동성 간 사랑으로 발전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도련, 「우연적 커뮤니티, 익명성의 사회: 오인환의 작업에 대하여」, 『오인환/INHWAN-OH』, samuso, 2009, p. 98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