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를 에는 12월의 어느 날, 처음 만난 파트너를 따라 종로 3가 뒷골목에 있는 어느 전집엘 들어갔다. 숨겨진 듯한 방에 착석, 냉골 속에서도 화색이 도는 주변 분위기를 살피며 메뉴를 고르는데, 눈을 사로잡는 건 사방에 가득한 낙서들. 질박하면서도 살짝 앙증맞던 낙서들의 내용은 대체로 이반 손님들의 ‘나 외로워요’가 대세였다. 낙서를 하나하나 훑으면서 사무치는 외로움(?)에 대한 묘한 동질감을 가지며, ‘한’서린 메시지의 향연에 아마도 그날 밤 나는 막걸리 네 병을 내리 비웠던가 보다. (물론 목적은 다른 데 있었지만)

공간과 매체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한 이미지와 흔적들을 본다. ‘우리 이반이에요.’ 라는 말은 굳이 입밖에 올리지 않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보는 것들. 이런 걸 두고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말하는 걸까? 종종 시티 게시판에는 끼범벅이 된 디자인이나 광고, 연예인 심지어는 게이빈 아무개를 둘러싸고 호평과 혹평이 올라온다. 스타일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그러한 디자인과 스타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시선을 사로잡는 관심의 대상이다. 그것들이 동성애 코드를 염두에 두었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러겠거니 하고 즐긴다. 보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동시에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비밀스런 즐거움을 만끽하는 이런 경험, 이전보다는 지금에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공통적으로 ‘호박씨 까는 즐거움’의 뒤꼍에는 남들이 모르기에 우리끼리 향유할 수 있는 은밀함이 있다. 또는 표면에 내놓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는 모종의 눈치게임이 적용된다. 그래서 더 아쉽다. 하나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편한 마음으로 공유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으면 좋을 텐데.

특히 각자의 경험에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공간의 문제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더한다. 실상 우리의 현실은 (소수의 단체 사무실들을 제외한다면) 밤에만 간판조명을 켜고 성업하는 이반 술집과 클럽정도에 그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낮의 공간이라고 해봐야 찜질방 정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고 업소들이 즐비해도 어두운 공간이 갖는 은밀함은 앞서 얘기한 ‘호박씨’가 갖는 성격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종로와 이태원의 낮을 활성화시킨다면 사정이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하지만 사정의 변화를 따지기에 앞서 활성화를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인프라부족과 경제적인 손익계산의 문제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특정 공간에 성적 소수자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어떨까. 다시 말해 공공연히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장소에 공적인 이름을 붙여 ‘커밍아웃’을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어느 장소에서든 자신의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이런 얘기들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도 ‘나 이반입니다’ 라고 밝히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부담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특정 공간에 이름을 부여하는 전략은 사회에 성소수자의 존재를 각인할 수 있는 효과와 더불어 성소수자에 대한 위상변화도 기대해볼 수 있는 이슈이다.

그렇다면 어느 장소가 그 ‘이름’에 어울릴 수 있을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종로나 이태원, 홍대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이들 지역을 그 이름에 어울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냉정하게 ‘게토’라고 부르는 장소들이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물어보자. 우리의 게토는 정작 우리에게 열려 있는가? 우리는 저녁뿐 아니라 낮에도 그 곳을 편한 마음으로 찾을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공적인 장소에 성적 소수자의 이름을 붙이자고 말했지만,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다소 뻔뻔함을 무릅써야 한다.

그럼에도 기존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전략은 분명 성소수자의 공간을 둘러싼 에 있어 중요한 실천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방향을 바꿔 조금 ‘소박하게’ 접근해보고자 한다. 넓은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 말고 이름에 맞는 우리들의 공간을 만들어보는 것으로 말이다. 이른바 공간의 이름이 아닌, 이름의 공간에 집중해 보자는 것.

고민을 하게 되면서 외국에는 어떤 예들이 있을까 궁금증이 생겨 몇 가지 예들을 찾아봤다. 대개는 도심지에 위치한 기념물과 공원들의 형태를 가지며 평범하고 친숙하게 우리 일상에 친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더불어 공간의 성격 뿐 아니라 조형적인 측면에서도 성적 소수자를 재현하거나 상징물들을 활용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조지 세갈(George Segal)의 [그리니치의 게이 해방(Gay Liberation in Greenwich Village)]은 1979년 설치되었다. 아마도 69년 스톤월 항쟁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설치 당시 오랜 기간동안 논란이 있었다. 이유인 즉, 실제 사이즈로 제작된 두 쌍의 커플들은 단순히 분리된 젠더를 강조하며 게이와 레즈비언을 형식화하고 있다는 것. 누가 봐도 게이, 레즈비언이라는 건 알겠지만 흰색의 조형물이 보이는 경직된 자세와 한시대의 옷차림과 머리스타일들은 오히려 위화감을 부른다. GAY st.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가시성을 제공하지 않을까하는 의미가 부여될지 모르겠지만, 지나다니는 이들이 보면서 친근해지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George Segal, Gay Liberation in Greenwich Village.


그렇다면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호모모뉴먼트(Homomonument)]는 어떨까. 1987년 카린 댄(Karin Daan)이 제작한 호모모뉴먼트는 세 개의 분홍색 삼각형이 삼각형의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조형물들은 운하와 보도블럭에 설치되어 조형물이 갖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보행자들의 쉼터가 되는 공원과 광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나치의 박해를 받았던 동성애자들에 대한 애도를 의식하면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조형물 앞에는 매일처럼 사람들이 꽃을 가져다 놓는다.

 

 

Karin Daan, Homomonument.

 

호모모뉴먼트는 이후 퀴어 공간에 대한 롤모델로 자리 잡으면서 외국 각지에 망을 형성했다. 호숫가를 빼곡히 채운 레드리본, 거리 바닥을 수놓은 그래피티와 낙서들 속에서 사람들은 일광욕을 즐기고 각종 행사와 축제를 열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크루징과 애정표현이 자연스러운 풍경을 그려내며 성적 소수자에 대한 가시성은 도시의 일상으로 스며들었으리라.

혹자는 암스테르담이니까, 동성애자들에게 관대한 ‘선진의식’을 가진 지역에서나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의식이 공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공간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들을 바꾸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시선을 우리에게 돌려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어떤 풍경을 머금고 있을까. ‘광장’의 이름을 달고 꽃 양탄자를 도배해놓고 시정홍보물만 빼곡한 장소. 장군님과 임금님이 범접할 수 없는 높이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들이 사복 제복 할 것 없이 아무렇지 않게 상주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어떤 자발성과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온갖 디자인으로 버무려진 소위 ‘쿨하고 엣지 있는’ 라이프스타일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현실은, 한국사회 성소수자들이 겪어온 소외와 억압의 역사는 촌스럽게 치부되며 암암리에 은폐되고 있는 건. 아니, 그마저도 ‘쿨하고 엣지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이렇다할 고정점이 없다는 현실은 종로의 풍경을 주말 저녁으로 한정하고 온갖 콘텐츠들을 한시적으로 유행시키는 데 그칠 뿐이다. 닻이 없는 배는 승객을 태우고 하염없이 파도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상과 애도의 공간일 것이다. ‘성적 소수자’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공적인 공간. 그것은 단순한 전시행정용으로 과시되지 않으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덩그러니 방치되는 형식적인 공간 또한 아닐 것이다. 외려 그 장소는 성적 소수자의 역사를 기억하고 소외받는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으로, 그토록 숨겨왔지만 숨길 수 없었던 정체성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장소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쉽사리 만들어질 리 없다. 또한 지금까지 풀어온 논의들을 단순한 호칭의 문제로 치부하게 된다면 성소수자 공간의 이슈는 ‘우리끼리’ 주고받는 일방적인 선언에 그치고 말 것이다. 보다 가시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를 위한 넓은 범주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을 조망해야 한다. 성소수자 인권을 둘러싼 현재의 정치운동은 물론 문화․예술과도 연계되어야 함은 물론이요, 실천에 있어서는 행정적인 부분에 대해 전문성을 필요로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간의 문제는 공간 자체만을 다루는 분야적 공론의 차원을 넘어 연대운동의 과정에 있어야 함을 명시한다. 우리에게 친근한 전집의 낙서들을, 은폐된 공간을 바깥으로 뒤집어 낼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차근차근 만들어보자.

 


동시신호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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