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다 게이>와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가 욕망하는 것들




꽃미남 게이들의 낭만적 사랑으로 가득 한 게이영화들이 전 세계의 퀴어영화제를 돌며 핑크 산업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런 영화들을 관람하는 게이들은 전 지구적인 문화상품을 소비하며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동시대 게이로서의 동질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운 좋게 영화제라는 제한적 상영을 벗어나 정식 개봉을 통해 일반 관객들과 조우할 수 있는 게이영화는 여성관객들의 시각적 즐거움에 복무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의 엄격한 잣대 하에서 게이들의 현실을 외면한 꽃미남들의 상품화에 대해 반감을 갖기도 한다. 따라서 게이영화를 둘러싼 논쟁의 초점은 늘 얼마나 사실적으로 게이들의 삶을 묘사했는가의 여부이다. 그곳에는 남성 동성애자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취사선택과 그에 대한 응시만이 있을 뿐, 성차를 지닌 존재이기에 앞서 인간관계의 연쇄회로에 속한 개별자로서의 정체성을 쉽게 간과해 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재현의 올바름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시각에서, 올해 LGBT 영화제 상영작인 <꽃보다 게이Takumi-kun: June Pride Takumi-kun Series>(요코야마 카즈히로, 2007)와 작년 말에 개봉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민규동, 2008)를 거슬러 읽고자 한다. 이 영화들을 그저 현실 반영이냐 현실 외면/미화냐 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재단하는 것은 우리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게 한다. 그것은 또한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매혹적인 장치들의 역능을 부정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두 영화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일본 야오이 만화의 영향력 하에 놓여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 만화를 리메이크한 <앤티크>는 원작을 교묘하게 ‘번역’하고 있고 남자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꽃보다 게이>는 야오이 만화의 재현 공식들을 보다 전형적이고 직설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꽃미남 게이들의 대거 등장과 아름답게 치장된 영상, 호모포비아적 현실의 배제 등으로 인해 상품화된 게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이 영화들을 다르게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그것은 ‘동성애공포증’을 대신하고 있는 다양한 공포증의 틈입이다. 호모포비아의 부재, 즉 동성애자라는 집단적 정체성으로서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적이 가시화되지 못한 상황은 곧 동성애 친화적인 이상향으로서의 호모필리아적 재현의 다름 아니다. 대신 그들이 당당히 맞서야 할 적은 그들 각자가 안고 있는 개별적 트라우마이다.



<꽃보다 게이> - 접촉공포증을 넘어 동성애를 긍정하기 


<꽃보다 게이>는 게이 학원 로맨스물이다. 꽃미남들로 북적대는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주인공 ‘다쿠미’. 그는 재학생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욕망의 대상인 ‘기이’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와 기숙사에 한방을 쓴다! 그러나 다쿠미는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기이를 자꾸만 피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유혹해 근친상간을 했던 형이 당시의 충격으로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는데, 그때의 기억이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어 타인의 육체적 접촉을 병적으로 거부한다. 다쿠미는 이를 ‘접촉공포증’이라고 명명하면서 조금씩 그 병을 치유해준다. 


이 영화에서 동성 성애의 완성을 훼방 놓는 궁극적인 원인은 가족이나 주변의 동성애공포증적 시선도 아니고 그들의 사랑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다쿠미가 품고 있는 내면의 깊은 상처이다. 즉 어린 시절 형과의 근친 동성애와 그 현장을 목격한 어머니, 그리고 그로 인한 형의 자살이 복합적으로 불러온 접촉공포증이 다쿠미와 기이 간의 동성 성애를 지연시키는 것이다. 그 접촉공포증은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과도기의 동성애자들을 괴롭히는 자기혐오나 자기부정의 정서적 혼돈과는 달라, 정체성의 자장을 경유한 보다 은밀하고 사적인 감정 상태이다. 이처럼 외부와 내면에 상존해 온 호모포비아에 의한 동성성애의 훼방이라는 상투적 공식을 비틀기 한 점은 신선한 발상처럼 보인다.




그런데 몇 가지 불온한 의문이 든다. 그의 어머니에게 충격을 준 것은 과연 동성애 그 자체일까, 근친상간일까, 아니면 그 둘 다 일까? 그보다 왜 감독은 하필 친형과의 근친상간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을까? 실제로 최초의 동성 성애 경험을 근친상간과 겹쳐 놓음으로 인해 형제가 동성애자로서 ‘아웃팅’ 되는 순간, 정체성 정립의 정치적 의도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형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잊을 수 없는 근친상간의 기억이다.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생에게 용서를 구했다. 따라서 관객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영화적 메시지란, 긍정적 동성애의 장애물인  근친상간에 대한 혐오와 근친상간의 우위에 놓여 있는 동성애에 대한 확인이다. 여기에는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기제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대립이 아니라 (동성 간의) 근친상간과 (동성 간의) 진정한 사랑의 대립이다. 즉 가족 공동체를 위협하는 성애적 행위는 더 이상 동성애가 아니라 근친상간이며 따라서 그것만 아니었다면 다쿠미의 (동성애와 관계없이) 가족은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근친상간을 밟고 선 동성애의 긍정이라는 비겁한 선택 앞에서 우리는 지속적인 배제와 복속의 메커니즘 속에서 끊임없이 서열화 되는 성애적 행위를 목격한다. 과연 성적 다수자와 성적 소수자라는 반복적인 갈등 구조에 편입되어 획득하는 호모필리아의 헤게모니에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 남성/여성공포증을 넘어 소통하기




이 영화에서 ‘마성의 게이’인 천재 파티세 ‘민선우(김재욱)’는 자기혐오에 빠진 게이도 아니고 이성애규범적인 가부장제 맞서 투쟁하는 게이도 아니다. 그는 심정적 우월감에 도취된 이성애자들의 허울 좋은 동정심을 유발하지도 않을 뿐더러 동성애자 인권운동진영의 열렬한 지지도 받지 못하는 성적 주체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남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아니 모든 남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닌 마성의 게이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선우의 (동성)성애적 과잉은 그 성애가 영화 곳곳에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게 녹아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전복적인 힘은 바로 그 가벼운 성적 유희에 근거한다. 그로 인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는 호모포비아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이자 나아가 동성애자가 뛰어난 능력과 외모로 존중받는 세계로서 호포필리아적 기운으로 가득 찬 동성애 친화적인 공간이 된다.






비록 앤티크의 사장인 ‘김진혁(주지훈)’은 선우를 ‘호모새끼’라고 부르며 호모포비아적인 발언들을 서슴없이 하지만, 정작 그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사랑고백을 하던 선우에게 ‘나가 뒈져버려 호모새끼야’라고 욕을 했던 고등학생 때도 사실은 여성스러운 그를 두둔해주었고 20년이 지나 다시 만난 날에는 게이바에 함께 가기도 했다. 그의 이런 언행의 불일치는 그에게 내재한 동성애혐오의 이성애규범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유발되었다기보다는 개인적 체험에 기인한다. 어린 시절 유괴범에게서 도망친 후 조우한 아버지와의 포옹에서 유괴범(남자)-그는 진혁을 자신의 죽은 아들과 동일시 했다-과의 끔찍했던 포옹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를 밀쳐내던 장면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그가 공포감을 느끼는 대상은 동성애가 아니라 남성간의 친밀한 관계이다. 그것은 곧바로 유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남성과의 포옹이나 키스와 같은 친밀한 신체 접촉에 대한 두려움, 즉 ‘남성공포증malephobia'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남성 동성애에 인상을 찌푸리는 이유도 그것이 그러한 육체적 친밀감의 정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동성애혐오를 단순히 동성애 일반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라는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며 그것을 개별적 경험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영화는 더 이상 동성애 친화 아니면 혐오라는 이분법적 입장표명으로 심문할 수 없는 균열을 발생시키면서 호모포비아의 고립이나 배제의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제 동성애, 혹은 동성 간의 관계를 둘러싼 기억은 개인적 사건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에 대한 공적 담론의 장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동성애는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으로부터 동시에 벗어난다.


나아가 그 사건은 이성 간의 관계까지 아우르며 인간관계 일반의 다양한 성적 경험으로 확장된다. 그것은 선우가 가지고 있는 ‘여성공포증femalephobia’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과 가까이에서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선우로 인해 앤티크는 남성들만의 공동체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동체가 여성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우가 여성에게 가지는 공포심은 개인적 트라우마로서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언제나 열려 있다. 그것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여성 배제의 억압적인 체계와는 분명 다르다. 선우에게 내재한 여성과의 소통 불가능성은 누군가가 채워줘야 할 결핍으로서 진혁의 남성공포증과 등가적인 위치에 놓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프랑스로 떠나려는 선우를 붙잡고자 자신과의 섹스를 제안하는 진혁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은 도덕적 엄숙주의의 시각으로 재단한 성의 물신화/상품화가 아니라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힘겨운 노력의 과정이다. 또한 영화 말미에 세쌍둥이 여고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는 선우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제 여자도 앤티크의 식구가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선우의 여성공포증은 중학교 시절에 자신이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와 섹스를 하는 엄마를 훔쳐보는 원초적 경험에 기인한다. 진혁이 부성애를 동성애로 경험했듯이 선우는 엄마의 정사를 여성에 대한 질투의 감정으로 마주했다. 즉 진혁을 안아 준 사람이 아빠이거나 선우가 목격한 이성 섹스의 여성 주체가 엄마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에게 소여된 명칭은 흐릿하게 사라지며 성적 주체로서의 인간들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되어 있던 성적 경험들의 부각은 기존의 한국 남성 동성애 영화들이 얽매여 있던, 갈등의 중심축으로서의 가족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가족으로의 (재)통합과 그로부터의 배척이라는 양극단의 선택지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남성들에게 가족에 구애받지 않고 오롯이 성적 경험을 사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김경태 _ 동성애자인권연대




  1. 나라
    2009.07.10 10:12 [Edit/Del] [Reply]
    흥미로운 글이에염.. 쪼매 어렵긴 함..ㅋ
  2. 히라
    2013.02.24 23:23 [Edit/Del] [Reply]
    '심정적 우월감에 도취된 이성애자들의 허울 좋은 동정심' '가벼움과 무거움으로부터 동시에 벗어나' 정말 맞는 말이예요. 공감하면서 감사히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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