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이 사회의 총체적인 불합리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불안감, 답답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마땅히 시민들에게 열려있어야 할 시민들의 공간이 권력의 필요에 의해 차압당하는 어이없는 현실 앞에서 힘없는 개인은 그것을 그저 목도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기력은 단지 인권영화제에 대한 불허라는 하나의 사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생각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인권이나 민주주의나, 표현의 자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차별의 최외곽에 외롭게 서있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속은 한층 더 번잡해졌다.
예상을 깨고, 평화롭게 모여 앉아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안도감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국 이게 전부이고, 이걸 원한 것뿐인데, 우리는 왜 이 작은 것 하나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사회에 던져져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광장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개막식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그동안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같이 간 일행과 약간의 담소를 나누었다.
개막식이 끝난 직후 상영된 영화는 용산 참사 이후 남은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의 투쟁을 그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나는 한순간도 그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론을 통해, 그저 하나의 심각한 사건으로만 용산 참사를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현장의 울부짖음은 말 그대로 충격 그 자체였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나, 삶의 터전을 빼앗긴 분노, 그 모든 것들을 가슴으로 삼키며 그래도 어쨌든 싸워야 하는 사람들의 절망. 화면 속에 담긴 그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의 냉담함을 자책해야만 했다. 입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하면서 나는 과연 얼마나 진지하고 따뜻하게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가. 결국 내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그다지 감정을 이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날만큼은 카메라를 향해 양팔을 벌려 하트를 그려보이고는 연기 속으로 사라진 희생자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도, 검찰도,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펴겠노라고 한껏 위선을 부리는 이 정부도 지켜주지 않은 그 힘없는 한 사람의 어깨 위에서 나는 지옥 같은 현실의 짐을 보았다. 그리고 어쩐지 인간적인 유대감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내 주변의 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가족을 잃거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거나,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막막한 세상을 향해서 무참히 짓밟히면서도 싸워나가는 모습이 그 분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가에 눈물이 비치는 순간, 비로소 가슴 깊이 그 분들의 삶에 공감하게 된 것이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절망하면서 기다림을 반복하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영화제가 끝나고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하는 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는, 삶의 터전을 되찾기 위해 떠나지 못하는, 오지 않는 희망을 믿으며 이 땅에서 떠나지 못하는, 우리들 모두의 삶이 참으로 녹록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불합리한 삶의 중심에서 분노하고, 불안해하고, 답답해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끊임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 처절한 저항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런 근원적인 물음에 휩싸인 채, 청계천변을 걸어 종로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 대답이 무기력한 것이 아니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밤은 차갑고 길은 어둡고 길었다.
해와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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