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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영화 <엑스맨> 시리즈를 돌아보면서

by 행성인 2009. 6. 1.

 

 오랜만에 달려간 영화관에서 내가 보게된 건 <X-Men Origins : Wolverine>이었다. (원제목은 오글거리는데다가 한영전환이 귀찮으므로 이하 엑스맨으로 부르겠다.) 같이 갔던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긴 했지만, 내심 난 엑스맨을 기대했다. 다른 재미있는 영화들도 많다던데, 굳이 엑스맨을 기대한 건 이유가 있다. 어떤 기대감인지, 엑스맨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알지 못할 것이다.


 뭐, 충분히 모를 수 있을 게다. 눈창을 허옇게 뒤집더니 웬 폭풍이 몰아친다든지 선글라스를 벗더니 시뻘건 파괴광선이 눈에서 뿜어져 나온다든지, 이런 SF 환타지 짬뽕국물 같은 영화 시리즈에 관심과 기대를 걸 사람이 이런 장르 매니아 말고는 잘 없는 탓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의 이야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 보고 지나치고 말거나 할 뿐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엑스맨들 본인에게는 참 억울하고도 슬픈 편견이다. 엑스맨, 정신 없어 보여도 다들 사연 있는 애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사연이 좀 많아서인지 시리즈도 길다. 시간적 순서로 볼 때 전 세 편을 앞서는 이번 <기원 - 울버린> 편을 포함해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총 네 편으로 이루어진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편은 주인공 '울버린'의 숨겨진 과거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의 분위기와 이야기 전개 구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감독도, 스타일도 다른 이번 <울버린>이 엑스맨 시리즈의 이름을 달고 등장했으니 전편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겠다.

 

 내가 엑스맨 시리즈에 지속적인 기대를 걸게 된 건 엑스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바로 그 섬세한 소수자적 감수성 때문이었다. 이런 소수자적인 맥락은 엑스맨 원작 - 원작은 Marvel Comics의 만화이다 - 에서의 폭넓은 세계관이 게이로서 커밍아웃한 전편 감독의 감수성과 어우러져 더욱 더 강조된다. 엑스맨(X-men)의 X가 마치 여러 소수자를 대입해볼 수 있는 방정식의 'X'인 것처럼 엑스맨은 다양한 소수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나는 엑스맨의 '퀴어함'에 특히 주목한다. 그 퀴어함이 얼마나 강렬했던 터인지, 처음 엑스맨을 보고 난 뒤에 흥분에 가득 차서 “엑스맨 동성애자”라는 검색어를 컴퓨터에 두드리던 때도 있었더랬다.


<엑스맨>에서 돌연변이들은 가족과 학교 등에서 돌연변이성을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외면과 폭력에 시달린다. 그들은 또한 '정상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이며 치료와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성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내면이나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고통도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가 이성애규범적인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엑스맨>과 현실 세계 간의 평행선은 명백해진다. 돌연변이들의 모습은 실제 성적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억압의 양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기에, 영화 자막에서 엑스맨과 돌연변이를 모조리 '동성애자' 따위의 단어로 치환해도 어색하지 않을 법하다.



“(전 세계의 인간과 돌연변이를 추적하는 장치 안에서) 하얗게 보이는 점들은 인간이네. ... 그리고 빨갛게 보이는 점들은 돌연변이야. (인간의 수와 거의 대등한 숫자이다) ... 돌연변이는 ...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네. 우리는 혼자가 아니네.”

- <엑스맨 2>, 자비에르



“저, 그러니까, 언제 네가 돌연변이인 걸 처음 알았니? ... 우린 널 여전히 사랑해. ...
그렇지만... 이 돌연변이 문제라는 건...”
“문제요? 돌연변이는 '문제'가 아녜요.”
“돌연변이 문제라는 건 복잡해. ... 오, 하느님. 이건 전부 내 잘못이야. .....
돌연변이가 되지 않으려고 해본 적은 없니?”

- <엑스맨 2>, 돌연변이 아들(아이스맨)과 어머니의 대화 중에서


 “(돌연변이를 일반인으로 변이시킬 수 있는 약이 정부와 제약회사의 제휴로 등장하자) 그건 말도 안돼요. 돌연변이는 치료하는 게 아녜요. ... 언제부터 우리가 환자가 된 거죠? ..치료할 것 따위는 없어요. 돌연변이는 병이 아녜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잘못된 사람은 없어요.”

- <엑스맨 3 : 최후의 전쟁>, 스톰


하지만 <엑스맨>에서 그려진 돌연변이들은 단순히 동정의 대상은 아니다. 돌연변이들은 차별과 폭력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를 세우고, 뒷골목에서 집회를 열기도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기 위해서 투쟁한다. 그러나 그 '행복'이 다 같은 행복이던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다르고, 퀴어한 우리들 또한 그러한 바, '살아내기'의 모습 또한 다양하다. 정상 사회로의 '편입'이 해답인가? '화합'이 해답인가? 아니면 양립 불가능한 자들의 '제거'가 해답인가? 그래서 사실 <엑스맨>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그들의 투쟁 이야기다. 돌연변이들을 말살시키고 탄압하려는 보수 세력들의 음모와 횡포에 맞서는 돌연변이들의 투쟁뿐만 아니라 투쟁의 과정에서 연대하기도 하며 관점과 방법론의 차이로 대립하기도 하는 돌연변이 내 두 세력의 모습은, 현실 세계 속에서 소수자 인권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복잡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이번 편 <엑스맨 탄생 : 울버린>은 '울버린'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탓에 전 세 편을 관통하던 문제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감독이 바뀐 탓일 수도 있고, 울버린의 캐릭터 자체가 기억상실로 인한 자기정체성과 혼란이라는 특징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기존 <엑스맨> 시리즈의 맥락을 기대한 나 같은 사람이라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편 <엑스맨> 시리즈에서 중간중간 함축적으로 전개된 이야기에 궁금증을 느꼈다면 이번 편은 적절한 보충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건 사실이다. 더욱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더욱 더 많은 문제들을 던져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영화 <엑스맨> 전편 제작자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더 이상 엑스맨 시리즈는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원작의 세계는 넓고도 많다. '노스스타'나 '콜로서스', '플랫맨' 같은 캐릭터들은 아예 원작 자체에서 게이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니, 원작의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짐작해볼 수 있다. (게다가 '콜로서스'라는 캐릭터는 '울버린'과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조만간 인터넷에서 '휴 잭맨, 새로운 엑스맨 시리즈에서 과감한 동성애 연기 펼쳐' 따위의 기사를 보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순한(?) 기대를 품어본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엑스맨>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해밀이다 _ 청소년 성소수자 커뮤니티 라틴